# 222
22화
“너희들이 제자들을 데리고 수고 좀 해줘야겠구나. 5파 1방과 6대세가는 무림맹 안으로 뫼시고, 중소문파들은 인근 객잔을 잡아 주거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제갈묘는 일원적 명령체계가 잡히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중소문파 연합 앞으로 걸어갔다.
“노 방주.”
명목상 중소문파 연합을 대표하는 통천방의 방주 노건문을 불렀다. 비록 그를 부른 것이지만 중소문파 연합에 소속된 각 문파의 수장들 전부를 부른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노 방주가 중소문파 연합의 대표이시니 함께 맹 내로 들어가 주셨으면 하오.”
“저도 말입니까?”
노건문을 비롯해 다른 중소문파 수장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 제갈묘는 이 기회에 모든 불신을 지우려 하오. 그런 불신이 어찌 대문파 사이에만 있겠소이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을 참석시키기 어려운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오. 그러니 노 방주께서 대표로 참석해 주셨으면 하오.”
노건문은 고개를 돌려 중소문파의 수장들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그들로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오랜 논쟁 끝에 노건문이 대표를 맡았으니 그가 혼자 들어간다고 해도 그다지 큰 불만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내일 정오에 회합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노 방주께서도 오늘 중소문파의 뜻을 모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제갈묘는 노건문과 그 뒤로 나열해 있는 중소문파 수장들에게 포권을 취한 뒤 몸을 돌렸다.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다.
제갈묘는 정문 안으로 사라지는 진필성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진필성의 약점을 찾아 그의 숨통을 틀어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잘 된 것일지도…….’
만약 이 사실을 몰랐다면 훗날 뒤통수를 크게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아울러 진필성과 함께 탄 배가 사실은 오월동주였음도 알았다.
제갈묘가 막 진필성을 따라 맹주실로 발걸음을 떼려는 그때였다.
우검호법이 제갈묘 곁으로 다가왔다.
“아, 우검호법.”
우검호법을 보는 제갈묘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저를 잠시 보시지요.”
“무슨 일이오?”
우검호법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상인의 정체를 알려주겠소.』
“……!”
『그분은 나의 스승님이시오. 그러니 맹주님을 뵙기 전에 잠시 저를 보시지요.』
우검호법이 검림에서 약간 겉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행동은 배반 행위가 아닌가?
‘아니 미끼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것이 또 있는 것인가?’
상황이 너무도 미묘하게 변해가자 제갈묘는 이제 더 이상 검림의 모든 이들을 전처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제갈묘는 우검호법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 *
맹주실에 들어선 진필성은 분노를 삭이느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었고, 곧 무림이 손에 들어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왜! 왜!”
콰직!
진필성이 움켜쥐고 있던 집무실 탁자 한쪽 모서리가 완력을 이기지 못하고 종이처럼 찢겼다.
생각 같아서는 이 분노를 삭이기 위해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때려 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현재 이 방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맹주님.”
방문이 열리고 제갈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눈빛은 웃고 있었다. 맹주실의 방문이 서서히 닫힐 무렵, 전각 한편에서는 한 마리 전서응이 날아올랐다.
* * *
북경 변두리에 위치한 낡고 허름한 물지객잔.
여느 때와 달리 객잔 입구는 닫혀 있었고, 주인은 계산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십여 명만 들어서도 꽉 차는 워낙 작은 객잔이었기에 마현을 비롯해 몇몇의 흑풍대가 며칠 머물자 주인은 아예 문을 닫은 것이다.
“다녀오셨습니까, 주군.”
“오늘은 대주 순번인 모양이군.”
마현은 철용이 앉아 있는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습니다.”
그 무렵 마현은 흑풍대의 절반을 보내 하루씩 번갈아가며 조자경의 집을 은밀히 살피게 하고 있었다. 조자경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으로부터 그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고?”
마현은 그사이 중경과 북해를 다녀오느라 이틀 간 자리를 비웠었다. 제아무리 마현이 흑마법사이고, 7서클의 대마도사라고는 하지만 그 여정은 극심한 피로를 불러왔다.
북경에서 중경으로, 다시 마교를 거쳐 북해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해에서 다시 중경으로 워프 네비게이션 마법과 워프게이트 진을 이용한 순간이동 마법을 펼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현이 객잔으로 다시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운기조식이었다. 그때 마현의 서클 단전은 텅 비다 못해 가볍지 않은 내상까지 입은 것이다.
“갑자기 조 대인의 외출이 잦아져 그를 경호하기가 힘이 들었을 뿐 그다지 위험은 없었습니다.”
“지금 조 대인은 어디에 있는가?”
“현재 자택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끼이익.
그때 굳게 닫혀 있던 객잔 문이 열렸다.
“여기에 마 대협이란 분이 계십니까?”
중년의 문사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시오?”
“조 대인 장원에 집사로 있는 종희당이라고 합니다.”
철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마현에게로 안내했다.
“대인께서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그러지요.”
마현은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군.”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봐야 좋은 것이 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라.”
“명.”
종희당은 객잔 입구로 먼저 나서며 마현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종희당도 사람들의 이목을 염려했는지 그 흔한 종복 한 명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단출하게 종희당과 마현은 나란히 조자경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렇게 한식경 정도 지나자 두 사람은 조자경의 저택에 들어설 수 있었다. 마현이 조자경의 정원에 발을 들였을 때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왕귀진의 전음이었다. 왕귀진은 은밀히 조자경을 감시 겸 보호하느라 몸을 완벽히 숨기고 있었다.
『주군.』
『고생들이 많군. 하지만 본교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니 만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명!』
종희당이 마현을 안내한 곳은 전에 조자경을 만났던 연못이 있던 별당의 정자 위였다.
“어서 오게?”
조자경은 만면에 웃음을 띠운 채 마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조자경이 앉아 있는 석탁 위에는 온갖 산해진미들로 가득 채워진 술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마현은 형식적인 안부 인사를 건넸다.
“별고라 하셨는가? 으하하하하!”
조자경은 마현의 말을 맞받아치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별고가 있었지.”
조자경은 손수 술이 담긴 주전자를 들어 마현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생각 이상으로 일을 아주 잘 처리해 줘서 고맙네. 덕분에 일이 한결 쉬워졌네.”
그는 흥겨운 얼굴로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채웠다.
“서신으로도 충분히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겠지만 내 소협과 술 한 잔 나누고 싶어 부른 것일세.”
“감사합니다.”
마현의 입장에선 조자경의 호의를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몇 순배의 술이 돌았다.
“소협 덕분에 동창의 박 환관과도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었네.”
진지한 얼굴로 조자경이 그간의 경과를 설명하자 마현은 묵묵히 들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소협에 관한 일이 논의되겠지만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정치라는 것이 변수가 많아서 꼭 언제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삼 일 후면 황제 폐하를 만나 뵐 수 있을 것일세.”
“조 대인.”
“……?”
“황제 폐하를 알현할 때 다른 한 분과 함께 가도 되겠는지요?”
“다른 사람?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조자경의 얼굴에 곤란함이 묻어나왔다.
사실 마현 한 사람만 해도 직접 황제 폐하에게 데려간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 정파에서 활동하시는 분들 중 최고의 배분을 가진 걸왕이란 분입니다.”
“정파?”
“예, 아무래도 마교 쪽인 저만 황제 폐하를 만나 일을 해결하는 것보다 정파 쪽에서도 걸왕 선배께서 나서주신다면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정파 쪽이라면 현 무림맹 쪽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마현의 대답에 조자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이 정파, 마교, 그리고 새외 삼궁으로 나눠져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군. 어차피 새외는 이국(夷國)이니 상관없겠고……, 그러는 것이 일을 좀 더 확실히 매듭지을 수 있겠군. 내 그리 해줌세.”
“감사합니다, 대인.”
“감사는 무슨……. 그런데 걸왕이라는 자, 혹시 개방도인가?”
조자경이 걸왕의 별호를 듣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습니다만?”
“소협이 그자를 데리고 올 때는 씻겨서 데려오게. 제아무리 걸왕이고 개방도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자리일 테니까 말일세.”
“그리 하겠습니다.”
마현은 대답을 하면서 지금 이 상황을 얘기했을 때 곤혹스러움에 오만상을 찌푸릴 걸왕을 떠올리며 고소를 지었다.
상석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촘촘한 대나무로 만들어진 발이 걸려 있어 사내의 윤곽만 보일 뿐 자세한 생김새는 보기 힘들었다.
그 앞에 대영반 조범과 율기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에잉, 못난 놈들. 쯧쯧쯧.”
발 너머로 칼칼한 노성(老聲)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노인의 꾸짖음에 율기와 조범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너 하나로 인해 자칫 대계가 무너질 뻔했다.”
“…….”
율기는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마교의 일도, 그리고 꼬리가 밟혀 구금상단에 크나큰 타격을 준 것도 다 자신의 탓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상단에 직접적인 피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대치에게 무리가 가더라도 계획한 대로 움직이라 전하거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대인, 송채모입니다.”
“들어오시게.”
노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푸근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 율기와 조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자네도 여기 있었구먼.”
송채모는 조범에게 인사를 건네다가 율기를 보았다.
“너는…… 기아가 아니냐?”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진무사 어르신.”
율기가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십여 년 만인가? 그사이 어른이 다 되었구나.”
“진무사 어르신은 예전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느냐? 허허허.”
가벼운 인사가 오가고 송채모와 율기, 조범은 다시 발 앞에 나란히 앉았다.
“어쩐 일인가?”
“아뢰옵기 황망하나 북해와 천무왕부의 일이 틀어진 것 같습니다. 또 그 시점에 맞춰 조 도독과 박 환관의 만남이 잦아졌습니다. 우연이라면 우연이라고 할 수 있으나 뭔가가 있다는 판단이 듭니다, 대인.”
보고를 올리는 송채모의 얼굴은 조금 전과 달리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이어 송채모는 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공손히 발 아래로 내밀어 건넸다. 노인은 밀봉된 봉투를 찢은 후 안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내 펼쳐들었다.
“조 도독과 박 환관의 만남을 기점으로 북해와 천무왕부에서 일이 어긋난 모양인데……. 분명 둘 중에 한 명일 것일세.”
“안 그래도 조 도독과 박 환관에게 사람 몇을 더 붙여두었습니다.”
“잘 했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을 가득 덮고 있는 주름이 더 깊어졌다.
“아마 마현이라는 자와 손을 잡은 것 같습니다, 스승님.”
“그럴 확률이 크지.”
“조 대영반의 조언에 따라 금의군 내 마현이라는 자의 용모파기를 숙지시켜 놓았습니다.”
“헐헐, 이래서 이 늙은이가 송 진무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지. 북해의 일이야 천천히 다시 풀어도 되지만…… 천무왕부의 일은 조금 곤란한데.”
푸드득.
그때 한 마리 전서응이 날아와 노인이 앉아 있는 서탁 위에 내려앉았다.
노인은 전서를 펼쳐들었다.
“기아야.”
“예, 스승님.”
“네가 둘째를 좀 도와줘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