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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무림에 가다-220화 (220/351)

# 220

20화

“휴우.”

설관악은 무거운 한숨을 깊게 내쉬며 고개를 들어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휘야.”

“예, 궁주님.”

설관악의 부름에 그 옆에 있던 냉천휘가 힘차게 대답했다.

“받거라.”

설관악은 품에서 한 권의 두툼한 책자를 꺼내 냉천휘에게 건넸다.

“이게 무엇…….”

“북해의 모든 것이다.”

“……!”

냉천휘의 눈이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구, 궁주…….”

“모든 궁인들은 들으라!”

설관악은 냉천휘의 말도 듣지 않고 궁인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하명하시옵소서.”

설관악의 목소리에 모든 북해빙궁인들이 오체투지를 했다.

“마지막 명을 내린다.”

“크윽!”

“크으!”

설관악의 비장한 목소리에 여기저기에서 슬픔에 잠긴 신음들이 흘러나왔다.

“반드시…….”

설관악 역시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오르자 잠시 입을 닫았다.

“……이 치욕과 복수는 반드시! 북해의 피를 이어받은 후인들이 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반드시 소궁주 냉천휘만은 살려야 한다.”

“며, 명!”

“흐윽!”

“궁주님, 안 됩니다. 어찌 저만…….”

냉천휘는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저으며 궁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들이 담긴 무공서를 설관악에게 내밀었다.

“갈!”

그 모습에 설관악은 일갈을 터트렸다.

“네가 그러고도 북해빙궁의 소궁주라고 할 수 있느냐!”

“하오나…….”

“못난 놈, 내가 너를 그리 가르쳤더냐!”

설관악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냉천휘를 다시 꾸짖었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북해인으로 죽을 것이다!”

“와아아아!”

“우와아아!”

오체투지한 북해인들은 몸을 일으키며 함성을 질렀다. 그 함성은 분노와 슬픔이 담긴 오열이었다.

그 함성을 들으며 설관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설린, 그 아이를 볼 수 있겠구나.”

설관악의 얼굴에 슬픈 웃음이 피어났다.

“가자!”

설관악이 가장 먼저 앞서 걸음을 내딛었다.

그 뒤를 따라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중상을 입은 자들까지 모두 비장한 얼굴을 하고 동굴을 벗어났다.

설관악을 비롯해 백여 명이 조금 넘는 북해빙궁인들이 동굴을 빠져나와 설산에 모습을 드러냈다.

휘이이이 쏴아아아―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눈을 동반한 강풍이 불었다.

마치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것처럼 눈꽃이 사방에서 휘날렸다.

“좋구나! 마지막 가는 길을 눈마저 축복해 주는구나!”

설관악이 뺨을 어루만지는 눈송이를 손으로 훔친 후 주먹을 말아 쥐었다.

“오라, 쥐새끼들아! 본좌가 북해의 주인이다! 으하하하하!”

설관악은 광소를 터트리며 동굴을 겹겹이 둘러싼 병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저승길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냉하상이 그 즉시 설관악의 뒤를 따랐다.

“북해빙궁, 만세! 만세! 만만세!”

“내가 죽지만 북해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 뒤로 북해빙궁의 무사들이 신형을 날렸다.

* * *

새하얀 눈밭에 붉은 피가 뿌려졌다.

챙 챙 챙 챙!

“으아아악!”

“죽어라!”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죽는 이의 단발마, 그리고 죽이고자하는 이의 고함이 한데 뒤섞여 고즈넉했던 설산의 한 중턱을 뒤흔들고 있었다.

“막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라!”

천호장 한 명이 고래고래 기를 쓰며 고함을 질렀다.

천 명이 조금 넘는 황군.

백여 명의 북해빙궁의 궁인들.

근 열 배에 달하는 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싸움은 백중지세였다.

진두지휘하는 천호장의 속은 바싹 타들어갔다.

압도적인 병사의 수로 겨우겨우 균형을 잡아가고 있었다.

금의군의 병사들과 달리 오군도독부의 병사들 대부분은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이들이다.

그나마 처음부터 전쟁을 목적으로 훈련된 병사들의 움직임이 북해빙궁의 무인들보다 유기적이고 체계적이어서 그들의 움직임을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균형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물러서라! 물러서!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 저들과 직접적으로 부딪히지 말란 말이다!”

천호장은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동분서주했다.

“백호장! 백호장들은 어디 있느냐?”

일반 병사들과 달리 백호장들은 무림에 나가도 한가락 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무위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천호장은 백호장들을 다급히 불렀다.

“예, 장군.”

흩어져 있던 백호장 열 명이 천호장의 부름에 몰려들었다.

“북해빙궁주를 맡으라! 어서!”

백중지세의 균형이 조금씩 무너지는 곳에 설관악이 서 있었다. 아니 그가 압도적인 무위로 그 균형을 깨트리고 있었다.

“명!”

“명!”

백호장들은 천호장의 명을 받들며 설관악이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백호군진을 펼치자!”

황군이라고 해도 합격진이 없을 리 없다.

사실 무림에서 중요한 공세 중 하나에 속하는 합격진의 시초는 군부의 합격 전투 기술에서 시작된 것이다. 즉, 무림인들이 군부의 집단전투를 자신들에게 맞게 변형시켜 발전시킨 것이다. 그렇게 발전된 합격진을 군부에서 다시 받아들여 전쟁에 적합하게 발전시킨 것이 바로 군진(軍陣)이었다.

백호장들은 일제히 몸을 날려 설관악을 에워쌌다. 동시에 서슬 퍼런 기운이 설관악을 덮쳤다.

“물러서라! 물러서!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 저들과 직접적으로 부딪히지 말란 말이다!”

북해빙궁의 궁인들을 에워싼 황군의 후미에서 천호장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천호장의 목소리에 검병을 잡고 있는 설관악의 손아귀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지원군이 오기 전 무조건 승기를 잡아야 한다!’

무조건, 무조건이다!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균형을 깨트려야 한다. 그렇게 틈을 만들어야만 냉천휘가 살 수 있다. 냉천휘가 살아야만 북해가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먼저 죽는다!’

설관악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의 몸에서 내력, 즉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단전에서 모든 내력을 폭발시키듯 일시에 끌어올린 것이다.

츠츠츠츳!

설관악의 검에 새하얀 냉기가 담겼다.

동시에 설관악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일 장가량 앞이었다. 어지간한 장정의 가슴 높이까지 올라오는 사각 방패를 서로 맞붙여 길게 늘어진 거대한 방진을 구성한 병사들 앞이었다.

설관악의 앞을 가로막은 방패는 단단한 나무 사이사이에 얇은 철판을 몇 겹이나 층을 쌓아 만든 것이었다. 어지간한 도검이나 창으로는 흠집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방어력이 탁월한 방패였다.

그 강도가 검에 검기를 담아 휘둘러도 방패를 완전히 부숴 버리기는 힘들 정도였다.

이번에 북해와 남만을 정벌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방패였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방어력을 자랑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았다. 그 무게가 엄청나게 무거워 병사들의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쿠웅!

설관악은 검에 새하얀 냉기가 풀풀 날리는 검강을 담아 방패를 관통시켰다. 얼마나 깊게 찔렀는지 검신이 완전히 방패에 꽂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크아아악!”

방패를 들고 있던 방패수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때 설관악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런 설관악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냉기가 팔을 타고 검으로 흘러들었다. 검을 잡은 설관악의 손등에 힘줄이 불룩 돋아났을 때였다.

콰과과과광!

방패 뒤에서 폭음이 터졌다.

새하얀 냉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쳤고, 그런 냉풍 속에 산산이 조각난 검의 파편이 하늘로 비산했다.

푹 푹 푹 푹!

붉은 피가 방패 뒤에서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으아악!”

단발마가 터져 나왔다.

삽시간에 이삼십 명의 병사들이 절명하자 단단하게 북해빙궁의 궁인들을 막아서던 방진 한쪽이 일시에 무너졌다.

설관악은 검을 버리고 무너진 방진 안으로 뛰어들었다.

북해빙궁주의 최고의 무공은 검(劍)이 아닌 장(掌)!

검은 그저 내공 소모를 최소화하며 오랜 시간 버티기 위한 한 방편일 뿐이었다.

팡 팡 팡 팡!

북해의 최고의 절학이라고 일컬어지는 빙백신장(氷魄神掌)이 설관악의 손에 의해 눈부시게 펼쳐졌다.

“크아악!”

“으아아악!”

설관악을 중심으로 새하얀 설풍이 솟구쳤고, 그 설풍에 휘말린 병사들은 여지없이 피를 뿌리며 즉사했다.

설관악에게 있어 다음은 없었다.

후(後)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내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설관악의 일 장 일 장은 그 누구도 쉽게 막을 수 없는 살초였다.

하지만 설관악은 더 이상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병사들과는 기세부터 다른 열 명의 백호장들이 그를 에워쌌기 때문이다.

쐐애애액!

백호장들은 설관악을 감싸기가 무섭게 도를 휘둘렀다.

“아무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설관악은 방어를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공격일변도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서걱!

설관악의 등과 허벅지 등에서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설관악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백호장의 가슴에 일장을 터트렸다.

퍼벙!

“크악!”

백호장은 피분수를 내뿜으며 뒤로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 백호장은 몸을 잠시 부르르 떨다가 축 늘어졌다.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이, 이놈!”

그 모습에 다른 백호장들은 더욱 강하게 설관악을 압박해 들어갔다.

제 한 몸 돌보지 않고 오로지 길을 뚫고 있는 설관악의 몸이 피로 흠뻑 뒤집어쓴 건 한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눈밭에 붉은 피가 번지는 새하얀 설산 위, 새파란 하늘에서 울분에 찬 여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버지! 파파!”

마현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설린의 울부짖음이었다.

붉은 피가 뿌려진 중앙에 그 피보다 더 붉은 피를 뒤집어쓴 설관악이 서 있었다. 그 뒤로 병사의 창에 복부가 관통당해 허물어져가는 한한파파의 모습을 발견하곤 설린의 몸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일단 한한파파에게로 가시오.”

마현은 설린을 한한파파가 쓰러지는 곳으로 보낸 후 설관악이 있는 곳으로 순식간에 신형을 이동했다.

“필드 쇼크, 리터레이트!”

마현은 설관악 곁에 내려서자마자 마력을 땅으로 쏟아 부었다.

콰르르르, 콱콱콱콱!

마현을 중심으로 땅거죽이 마치 파도를 치듯이 사방으로 물결쳤다. 거친 진동과 파장에 주위의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백호장들 역시 제대로 서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한쪽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러는 사이 마현은 설관악의 손목을 잡은 채 후방으로 순간이동했다.

“어, 어떻게…….”

설관악은 설린과 마현의 등장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상세한 내용은 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서 북해빙궁의 궁인들을 반경 삼 장 안으로 모아주십시오.”

마현은 설관악에게 그리 주문한 후 설린을 쳐다보았다.

설린은 한한파파를 냉천휘에게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눈가의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차갑게 눈을 빛냈다. 마현의 시선에 설린은 고개를 묵묵히 끄덕이며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들었다.

“궁인들은 들으라, 원진을 구성하며 집결하라!”

설관악은 설린이 마현과 주고받는 시선을 보자 일단 그 뜻에 따르기로 했다.

둘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방책도 없이 무작정 일을 꾸밀 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설관악의 명에 북해빙궁의 무인들은 빠르게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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