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19화
“앉아. 이놈 말로는 아무도 본 놈 없다고 하니까.”
걸왕이 곰방대를 뻑뻑 빨며 골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불취개와 마현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앉았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다행히 뜻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걸왕은 궁금해 하는 마현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무당, 개방, 남궁, 당문. 이 네 무가는 무림맹에서 곧 탈퇴할 것이다.”
그 말을 시작으로 상인(上人)이라는 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는 네놈은 뭐 얻은 거 없냐?”
고개를 끄덕이는 마현을 보며 걸왕이 물었다.
“탈퇴보다는 안에서 무림맹을 흔들어 주십시오.”
“안에서? 뭔가 얻은 것이 있구나.”
반문하던 걸왕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리된다면 이 일을 벌인 배후를 찍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현은 조자경과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황사 송겸이나 아니면 그 문하의 누군가가 이 일을 벌였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아울러 걸왕께서는 북경으로 올라가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또 왜?”
“저와 함께 황제 폐하를 알현했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정파 쪽에서도 한 분이 나서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겠습니까?”
“믿을 수 있겠느냐?”
걸왕은 조자경에게 전적으로 모든 일을 맡겨도 되겠느냐고 묻고 있었다.
“일단 믿어봐야겠지요. 그를 통해 일을 푸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고 판단이 됩니다.”
“그리된다면야 더 바랄 것도 없지.”
걸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취개를 쳐다보았다. 불취개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는 의미다.
“시기는 언제쯤이면 되겠소?”
“사흘 후가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흘이라……. 그렇게 하겠소.”
불취개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
“상황이 달라졌으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겠습니다.”
“엥, 너는 또 왜?”
불취개를 따라 마현도 자리에서 일어나자 걸왕은 콧잔등에 잔뜩 주름을 만들며 물었다.
“저도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뭔 도깨비도 아니고…….”
걸왕은 바닥에 누우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럼 며칠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마현은 불취개에게도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검 한 자루가 허공을 베지 못하고 그냥 훑었다. 마치 검을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하아!”
결국 검의 주인은 검을 아래로 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검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설린이었다.
마현이 중원으로 떠난 지 어느덧 열흘이 다 되었다.
그로 인해 아버지와 북해빙궁의 주요 인사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도 잠시, 당장 갈 수 없다는 현실이 그녀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가씨, 차라리 들어가셔서 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보다 못한 곤오가 나섰다.
설린은 곤오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들어가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수련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설린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마 공자께서 무사히 아버지와 빙궁의 사람들을 데리고 마교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마현의 높은 능력은 알고 있었지만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설린은 무리를 해서라도 북해로 떠나거나 아니면 마현을 따라 마교로 떠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어느 정도 불안과 초조를 주리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힘드시더라도 참으십시오, 아가씨.”
번쩍!
그때 소연무장에 검은 빛이 터졌다.
이 빛이 무얼 뜻하는지 둘은 알고 있었다.
“마 공자님!”
설린은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마현 앞으로 뛰어갔다.
마현은 그런 설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갑시다, 린.”
“네?”
“곤 대주, 자세한 상황은 다녀와서 얘기하리다.”
곤오도 설린처럼 당황스럽기만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런 마현의 행동에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곤오의 눈앞에서 마현과 설린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휘이이잉!
마현의 손에 이끌려 빛무리에 휩싸였던 설린이 느낀 것은 싸늘한 한풍이었다. 그리고 점차 돌아오는 시력에 맞춰 펼쳐진 광경은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이었다.
“이, 이곳은?”
바로 북해빙궁을 기준으로 북쪽에 자리한 만년설산이었다.
“어떻게 소녀를 이곳에…….”
“후우……. 일단 조금 쉬면서 이야기합시다.”
마교에서 북해까지 천 리 길이다.
설린은 단숨에 북해의 설산으로 온 것으로 느끼겠지만 실상 마현은 몇 차례의 워프 네비게이션 마법을 펼쳤었다.
마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상당히 무리해서 장거리 순간이동 마법을 펼쳤기에 마현의 서클 단전 내 마력은 완전히 고갈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일단 서클 단전 내 마력을 다시 채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설린도 그런 점을 느꼈기에 조용히 마현 뒤에서 호법을 서 주었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마현이 눈을 떴다.
“공자님, 어떻게 된 건가요? 왜 소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건가요?”
설린은 마현이 눈을 뜨자마자 참았던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리 한꺼번에 물으면 다 대답을 할 수 없지 않소.”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런 설린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다.
“아!”
설린이 무안해하는 모습을 보며 마현은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여기에 온 것은 북해빙궁의 궁인들을 본교로 안전하게 피신시키고자 함이오.”
“그 일은 공자님 홀로 하신다고…….”
“원래 이 일은 배후를 캐낸 다음 본교로 복귀하기 전 하려했소만…… 사정이 달라졌소.”
마현은 간략하게 조자경과 만나 북해빙궁에 관련된 얘기를 나눈 것을 설명해 주었다.
“아무리 나라도 며칠 내로 이 설산을 다 뒤지는 건 무리가 아니겠소. 그래서 린, 그대와 함께 온 것이오.”
“지금 바로 찾아 나설 건가요?”
“아니오, 일단 설산 아래 주둔하고 있는 황군 쪽을 먼저 살펴본 후 움직이는 게 나을 듯하오.”
마현은 설린을 데리고 전군도독부와 남해태양군이 주둔하고 있는 설산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 * *
상당한 크기의 군막 아래에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커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모여 앉아 있었다.
길게 늘어선 탁자 끝 두 상석에는 전군도독부 도독동지 원직과 남해태양궁주 양위도가 앉아 있었고, 그 주위로 장수들과 남해태양궁의 군사, 적검대주와 광양대주가 앉아 있었다.
“늦어도 오 일 안으로는 숨은 작당들을 찾아야 하는데…….”
원직의 얼굴에는 짜증과 초조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겉으로는 완벽하게 북해를 장악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빈집을 차지한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아직이더냐?”
원직은 휘하 장수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설산이 워낙 거산이라…….”
“그걸 누가 몰라서 묻는 것인가? 이 일에 동원된 병사의 수가 자그마치 2만이다! 2만!”
“…….”
원직의 호통에 휘하 장수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에잉!”
“너무 노여워만 하지 마시오. 아직 그들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오.”
양위도가 원직을 달랬지만 그의 노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 모습에 양위도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 날짜가 촉박하다면 가기 전에 소규모라도 한 부대를 남겨두시오.”
그 말에 원직이 미간을 좁히며 양위도를 쳐다보았다.
“본인은 복수 그 하나면 충분하오. 공은 도독동지에게 드리리다.”
“그 말이 진심이오?”
“그렇소.”
“흐음.”
원직은 낯이 가려워진 탓인지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노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으로 보아 양위도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였다.
“장군!”
그때 백호장 하나가 급히 군막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빙궁인들의 흔적을 찾았사옵니다.”
그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희소식인 그 전언에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곳이 어디냐?”
“설산 주봉(主峰) 옆에 위치한 천의봉 중턱입니다.”
“그곳에는 은신할 만한 곳이 없지 않았는가?”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교묘한 위치에 사람 한 명 정도 지날 수 있는 동굴 입구를 확인했습니다. 우연히 회군하던 중 발견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그 주위를 포위해 놓았습니다.”
백호장은 비교적 세세히 북해빙궁 수뇌부들이 숨어 있는 은신처에 대해 설명했다.
“하늘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음이야.”
원직은 주먹을 말아 쥐며 양위도를 쳐다보았다.
“군사, 당장 궁도들을 소집하라.”
양위도는 원직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인 후 창서에게 명을 내렸다.
“당장 병사들을 소집하라. 본 장군이 직접 이끈다.”
원직도 그에 지지 않고 병사 소집 명을 내렸다.
“장군, 선봉은 남해태양궁이 서겠소.”
“그리해 주시오.”
양위도의 제안은 원직도 바라마지 않던 것이었다. 오히려 북해빙궁과 같은 무인들을 상대하기에는 병사들보다 남해태양궁의 무인들이 더 효율적이었다.
『그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소?』
마현은 설린과 함께 몸을 숨긴 상태로 군막 위에서 지금 상황을 빠짐없이 염탐하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그곳은 어릴 적 설린이 우연히 찾아낸 장소였다.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가 워낙 은밀해서 그 일대 사냥꾼이나 약초꾼들도 모르는 비동(秘洞)이었다. 그 동굴이 발견된 후 궁 차원에서 더욱 입구를 은밀히 손을 보아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해 은신처로 만들어둔 곳이었다.
마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설린과 함께 천의봉으로 순간이동 마법을 펼쳤다.
* * *
북해빙궁 중앙 대전만큼이나 넓은 동굴에 백여 명 정도의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안색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흐음!”
그런 그들의 중앙에 앉아 있는 북해빙궁주 설관악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낮게 흘러나왔다.
“궁주님.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습니다.”
설관악은 고개를 들어 부궁주 냉하상을 쳐다보았다.
냉하상은 무복 곳곳이 찢어지고 상처에 의한 혈흔이 몸 곳곳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또한 한 달이 넘게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했을 뿐더러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을 수십 차례 치룬 탓인지 눈마저 퀭했다.
그런 참담한 몰골을 한 이는 비단 냉하상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설린을 대신해 소궁주 자리에 오른 냉천휘도, 여전히 병자들을 돌보고 있는 백초신의 구엽도, 큰 중상으로 거동조차 힘들어하는 한한파파도 모두 하나같이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한풍대와 설빙대의 대주와 대원들, 그리고 북해빙궁 소속 궁인들까지 지친 얼굴로 설관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관악은 자신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백여 명이 조금 넘는 궁인들의 얼굴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