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18화
“대인에게 한 수 크게 배웠습니다.”
마현은 고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마지막 패를 펴지. 그 대신 한 가지 해줘야 할 일이 있네.”
“말씀하시지요.”
“그 전에 하나 물어보지. 자네 역량에 따라 패가 덮일 수 있으니.”
“…….”
“며칠이면 북해에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가?”
“사안에 따라 다릅니다.”
“특급이라면?”
“하루면 됩니다.”
조자경의 눈동자가 커졌다.
진심으로 놀란 것이다. 겉으로는 숨기려 했지만 눈동자는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협을 보고 있자니 무림에 대한 생각과 시선을 바꿔야겠네.”
진심으로 감탄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라고 묻지는 않았다.
“북해소궁주가 마교에 있지 아마?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대인.”
“북해궁주가 살아 있다는 것도 왠지 알고 있을 것 같고…….”
마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협의 표정을 보니 선물이 될 것 같군. 북해빙궁주의 위치가 대략 파악되었네. 그러니 소협이 북해로 출정한 황군을 조금 흔들어 줘야겠어. 그리고 더불어 천무왕부, 아니 무림맹도 함께 말일세.”
마현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변했다.
원래 계획은 최대한 빨리 지금의 일을 마무리 지은 후 마교로 복귀하기 전 북해로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북해인들을 데리고 마교로 돌아갈 계획을 세워두었던 것이다.
만약 일이 늦어진다면 흑풍대를 보내서라도 그들을 안전하게 마교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것은 조자경이 하지 말라고 해도 해야 할 일이다.
그녀, 설린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위치가 어디입니까?”
“그 전에 분명히 대답을 해야 하네. 해줄 수 있겠는가? 아니, 달리 말하지. 반드시 해줘야 하네. 그래야 자네와 내가 오월동주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일세.”
조자경은 마현 쪽으로 몸을 숙이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만약 대인이 생각하는 이가 아니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런 건 상관없네. 정치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니까.”
마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인.”
조자경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위치는 북해 북쪽 만년설산(萬年雪山) 부근이라고 하더군.”
“반드시 황군을 흔들어 놓겠습니다.”
“어디 보자, 반응이 오면…… 늦어도 일 주일 안으로 연통(緣通)을 보내겠네. 어디로 보내면 되겠는가?”
“북경 외각 남쪽에 있는 물지객잔에 머물고 있습니다.”
“물지객잔이라…… 알았네.”
그 말을 끝으로 마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은 무슨……. 오히려 내가 해야지. 이왕이면 일을 크게 벌여 주게나. 그래야 입질이 더욱 커질 터이니.”
“그리하겠습니다.”
마현의 포권에 조자경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현이 사라졌다.
“허어, 이거 귀신과 상대한 것 같군.”
조자경은 마현이 떠난 것으로 알았지만 사실 마현은 정자 바로 위에 떠 있었다. 마나 은폐 마법과 더불어 내력을 갈무리하고 투명화 마법으로 모습을 감췄을 뿐이었다.
마현은 북해의 일이 급했지만 그보다 더 조자경의 속내를 정확히 알고자 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분명 조자경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속내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도 모르고 조자경은 그저 생소한 경험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조자경 입장에서는 누군가와 이렇게 만나고 헤어진 적이 없다. 물론 금의위 중 마현처럼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 앞에서 감히 지금처럼 움직이지는 않았다.
특별하고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차를 다시 내와야겠어.”
“대, 대인! 어쩌자고 저런 자와…….”
“…….”
조자경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식은 찻잔을 들었다.
“어찌 저런 무뢰배 같은…….”
하지만 윤심배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무뢰배면 어떻고, 환관이면 어떤가? 기회가 왔을 때 움켜쥐는 것이 바로 간웅(奸雄)이 아닌가? 아니 그런가?”
“하지만…….”
윤심배의 목소리에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쯧쯧쯧. 어찌 생각이 한쪽으로만 치우치는가?”
“…….”
윤심배는 조자경의 말에 그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그 모습에 조자경은 답답해하며 입을 열었다.
“황사를 추종하는 이들이 현 조정에 몇 할이라고 생각하는가?”
“갑자기 황사의 이름이……. 서, 설마?”
윤심배의 질문에 조자경은 그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릴 뿐이었다.
“설마…… 이 일을 벌인 주모자를 황사로 여기시는 것입니까?”
“황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직접적으로 개입을 했든 안했든 그의 동의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지.”
윤심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조자경의 말을 듣고 알았다. 누가 주모자이든 조자경이 황사를 조정에서 몰아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일단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려는가?”
“그거야 대략 삼사 할 정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아직 자네가 멀었다고 하는 게야. 삼사 할 정도가 아니라 사 할, 혹은 그 이상이라고 보면 될 걸세. 아직까지 절반을 채우지 못했지만 가깝게 접근했지. 아마 몇 년이 안 돼 오 할을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걸세. 오 할이라면 힘으로 조정을 쥐락펴락 할 수 있네. 거기에 송 대학사는 현 황제 폐하의 스승인 황사. 지금도 그를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을 정도인데 그리 된다면 현 황제 폐하 뒤에 또 한 명의 황제가 탄생하게 된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나?”
“하오나 황사는 대인 못지않게 황제 폐하에 대한 충정심이…….”
“쯧쯧쯧, 이런 딱한 친구를 보았나.”
조자경은 말과는 달리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조정은 때로 찌들었지만 자네만은 그 때를 잘도 벗겨냈군.”
조자경의 칭찬에 윤심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자네에게 남진무사 자리를 준 것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너무 답답해.”
조자경은 잠시 닫았던 말문을 다시 열었다.
“자네에게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쥐어 준다면 어떨 거 같나?”
“…….”
윤심배는 조자경의 질문이 무얼 뜻하는지 간파하지 못한 듯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필시 검을 휘두르다가 자네 몸을 베겠지.”
맞는 말이기에 윤심배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사가 그런 존재일세. 황제 폐하의 손에 쥐여진 검. 하지만 그 검이 숫돌에 갈리고 있네. 만약 그 검이 주인을 가리게 된다면 어찌할까? 주인을 위한답시고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비록 정적이라고는 하지만 황사가 그럴 인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윤심배는 마현의 존재도 잊은 듯 보였다.
“어찌되었든 무리수는 그쪽에서 먼저 두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무리수라면?”
조자경은 윤심배를 흘깃 쳐다본 후 대답했다.
“무림.”
“……?”
“더불어 부정적인 결과도 나오기 시작했고 말이야.”
조자경은 마현이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자리를 눈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그자를 어떻게 믿고 이런 중대한 거사를 시행하실 생각이십니까?”
“능구렁이 몇 마리를 머릿속에서 키워 보게. 절로 안목이라는 것이 생기는 법이야.”
조자경은 찻잔 속에 담긴 하늘을 내려다보았다.
“아직까지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았음이야……, 끌끌끌.”
그리고는 후르륵 식은 차를 마셨다.
『황사든 그 밑의 문하든 이 일을 잘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난데없이 마현의 매직마우스가 들리자 조자경의 몸이 굳어졌다.
“푸하하하하!”
조자경이 잠시 후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한방 먹었네.”
『생각해 보니 제게 마지막 패가 한 장 더 남아 있더군요. 다 대인께 배운 것입니다.』
“끄응!”
『대인의 말씀으로 대략 윤곽이 잡혔습니다만…… 조정의 일은 조정에서, 무림의 일은 무림에서……. 굳이 말하자면 공승(共勝)이라고 할까요?』
“더불어 이기는 공승이라……. 일이 끝난 후 술이나 한 잔 하세.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싶구먼.”
『알겠습니다, 대인.』
마현의 마지막 인사에 조자경은 마시다만 찻잔을 후르륵 비웠다.
“대, 대인?”
마현이 남아 매직 마우스로 조자경과 대화를 나눈 사실을 모르는 윤심배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중경 외곽에 위치한 빈민촌.
그 빈민촌을 가로지르는 자그만 개울 옆에 거적으로 만들어진 몇 채의 움막이 있었다. 그 움막을 중심으로 거지 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얼핏 거지촌으로 보이지만 이곳은 개방의 부총타였다.
원래는 자그만 분타였지만 중경에 무림성이 들어서며 그 중요성이 달라졌다. 총타와 버금갈 정도로 주요 지부가 되었기에 부총타로 승격된 것이다.
움막들 중 가장 정중앙에 위치한, 다른 움막들보다 조금 규모가 큰 움막 안에 걸왕이 누워 있었다. 걸왕은 그렇게 누운 채 누렇게 변한 종이 한 장을 읽고 있었다.
“에잉, 쯧쯧쯧. 고얀 놈 같으니라고.”
걸왕은 북경 분타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보며 혀를 찼다.
“아무런 말없이 날름 정보만 받아가? 에잉, 천하에 몹쓸 놈 같으니라구.”
걸왕은 보고서를 삼매진화로 태워 버렸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당연한 것을 왜 물…… 이잉?”
누워서 비비적거리며 소리치던 걸왕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걸왕이 누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앞을 바라보았다.
“어르신께서 저를 이렇게 싫어하는지 몰랐습니다.”
움막을 드나드는 거적 앞에 언제 왔는지 마현이 홀연히 서 있었던 것이다.
“아버버버버!”
걸왕은 눈앞의 마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벙긋거리며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음색을 토해냈다. 마현은 그런 걸왕을 보며 그 앞으로 다가가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네, 네놈이 왜 여기에……, 딸꾹! 여기에 있는……, 딸꾹! 있는 것이냐?”
얼마나 놀랐는지 걸왕은 연신 딸꾹질을 하며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했다.
“아니 그게 아니지!”
걸왕은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움막으로 통하는 거적으로 다가가 머리를 빠끔히 내밀며 밖의 동정을 살폈다.
“아무도 저를 본 자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험, 허험.”
마현의 말에 걸왕은 괜히 부산을 떤 것 같아 멋쩍은 듯 헛기침을 내뱉으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래도 이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얼굴을 내미는 것이냐! 앙?”
걸왕은 이대로는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인지 마현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현을 보자 눈살을 찌푸리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간이 붓다 못해 아예 배 밖으로 나왔어.”
걸왕은 근처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곰방대를 들어 입에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걸왕은 다리를 꼬며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사부님, 제자 불취개입니다.”
그때 움막 밖에서 불취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걸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불취개가 안으로 들어왔다. 마현은 불취개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방주님.”
“소, 소협은?”
불취개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
동그래진 눈으로 마현을 쳐다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