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8화
허공에 떠 있는 마현의 몸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얼굴에도 그만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제아무리 마현이 7서클의 흑마법사라고 해도 연거푸 텔레포테이션 마법을 이용해 순간이동을 펼친 것 자체가 상당한 무리였다. 거기에 불을 끄기 위해 이페이스 마법을 펼친 것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특히 남만야수궁 본진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방화된 시간이 길어 그만큼 불길의 크기도 더욱 커져 있었던 것이다.
“후욱!”
마현은 마지막 불길을 없애며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마현은 힘은 들었지만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밀림 수십 곳에서 검은 연기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밀림을 태우던 불들이 모두 꺼졌다는 뜻이다.
마현은 이대로 남만야수궁 본진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고개를 틀어 남만토벌군 진영 쪽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렇게 불을 끈 것은 말 그대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래서 여분의 스크롤을 더 만들어 응후에게 넘겼지만 임시적으로 만든 것이라 영구적으로 쓰지 못한다.
아마 육 개월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습기가 많은 밀림이라 석칠이 없다면 이처럼 대규모 불을 놓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마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석칠이 없으면 이런 무자비한 공격은 하지 않겠지.’
마현은 실질적인 남만토벌군의 본진인 동벌군(東伐軍)의 진영으로 순간이동했다.
* * *
수만의 군사가 집결된 동벌군의 진영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크기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거 쉽지 않겠는걸?’
너무나 넓은 진영이라 쉽게 석칠이 보관된 곳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겠군.’
마현은 투시 마법을 이용해 동벌군 진영을 샅샅이 훑었다. 그런 마현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생각 이상으로 석칠의 양이 엄청났던 것이다.
마현이 파악한 석칠의 양이라면 남만의 밀림 태반을 태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동벌군 내 진영이 어수선하게 변했다.
아마 밀림 수십 곳에 놓아둔 불길이 한순간 모두 사라진 것 때문일 것이다.
이런 어수선함은 오히려 더 좋은 기회였다.
혼란이 커지면 커질수록 수습하는데 시간이 더욱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마현은 마력을 막 끌어올리려다가 다시 서클단전으로 갈무리했다. 이유는 남만토벌군 수장의 군막으로 부장급 장수들이 급히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왕 온 김에 유용한 정보를 얻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마현은 석칠을 없애고 돌아가려는 생각을 바꿨다. 그리고는 장수들이 급히 모여드는 군막, 남만토벌군 수장인 유기량의 군막으로 조심스럽게 향했다.
마현은 투명화 마법으로 몸을 숨긴 채 군막 위에 올라섰다. 마현의 능력으로 굳이 위험하게 군막 안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투시 마법을 이용해 안을 훤히 들어다볼 수 있었고, 음향 증폭 마법을 이용해 군막 안에서 들려오는 아주 자그만 목소리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장들과 함께 군막 안으로 들어온 유기량은 남만의 군사지도가 펼쳐져 있는 탁자를 주먹으로 거칠게 내리쳤다.
쾅!
임시로 만든 탁자가 부러질 듯 휘어졌다가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부장들은 어떻게 일을 진행했기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인가?”
마현이 예상했던 대로 유기량은 목소리에 핏대를 세우며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유기량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석칠이 어떤 것인가?
석칠을 이용해 불을 붙이면 물로도 끌 수 없는 것이다. 바닥에 물이 고여 있으면 물 위에서도 불을 토해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석칠이다.
그런 석칠이 폭음과 함께 한순간 꺼지니 부장들 역시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다들 입에 꿀이라도 처넣었나? 왜 다들 말이 없나?”
유기량은 그런 부장들의 모습에 탐탁치 않는 표정을 지으며 목에 더욱 핏대를 세웠다.
근 석 달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 하나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유기량 역시 초조해질 대로 초조해져 있었다.
“……혹시 벽력탄이 아닐까 싶습니다, 장군.”
그때 유기량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무평이 자리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벽력탄?”
“전장에서 불길을 잡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큰 불길을 이용합니다. 그런 맥락으로 벽력탄을 이용해 불길 한 중앙에서 터트렸다면 오히려 불길이 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무평의 말에 유기량은 눈썹 사이를 좁힐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리는 있었지만 설득력이 무척 낮은 까닭이다.
“……그게 아니라면 무림인들이 원래 해괴한 술수를 잘 부린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런 술수가 아닐까 합니다.”
그 뒤를 장준호의 말이 이어졌다.
무평의 말처럼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설득력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유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북벌군 쪽에 무림인이 있었지 않나?”
유기량은 보고서를 통해 북벌군에 율기와 도종극의 무리가 합류한 것을 떠올렸다.
“전서구를 통한 보고에 의하면 더 이상 참전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장군.”
“에잉, 막상 필요할 땐 없다는 게 개똥이라고 하더니.”
유기량의 얼굴에 짜증이 확 묻어나오며 오만인상을 다 찌푸렸다.
“부장들은 내일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원인을 찾아 보고하라.”
“며, 명!”
“원인을 제대로 찾아오지 못할 시 내 직접 부장들의 목을 칠 것이다!”
유기량의 말에 낯이 흙빛으로 물들며 부장들이 목을 움츠렸다.
유기량이 이렇게 역정을 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북해를 정벌하러 간 전군도독부 때문이었다.
홀로 남만을 토벌하러 왔다면 시간이 다소 걸려도,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지 못해도 그다지 큰 상관이 없다. 약간의 오점이 묻을 수는 있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남만토벌군과 동시에 출발한 전군도독부에서 북해를 정벌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정에서는 반드시 자신과 전군도독부의 도독동지 원직과 비교를 할 것이다.
그렇게 비교가 되는 전군도독부는 북해의 흡수라는 혁혁한 전과를 만들어냈다. 그에 반해 자신은 석 달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무 성과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군.”
그때 참장(參將) 한 명이 군막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당연히 유기량의 입에서 고운 목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그 목소리에 참장은 어깨를 움츠리며 두루마리를 들어올렸다.
“운남성에서 서찰이 도착했습니다.”
참장은 유기량에게 공손히 서찰을 넘겼다.
“성주에게서 온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장군.”
괜히 애꿎은 시간만 잡아먹었다고 느껴 막 자리를 뜨려던 마현은 조금 더 엿듣기로 마음을 돌렸다.
“알았다, 나가 보거라.”
유기량은 참장을 내보내고 두루마리를 활짝 펼쳤다.
마현은 조금 자리를 이동해 유기량 머리 위로 향했다. 유기량의 목소리를 통해 운남성주에게서 온 서찰 내용을 알기보다 직접 읽기 위함이었다.
남만토벌군 유 장군 전.
석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뚜렷한 전공이 없어 조정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질타가 내려오고 있소.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일 내에 결과를 내어야 할 것이오.
……중략.
서찰을 읽는 동안 유기량의 얼굴은 구겨진 종잇장처럼 일그러져갔다. 유기량이 짐작한대로 조정뿐만 아니라 군부에서도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직접 그러한 내용을 접하자 유기량의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졌다. 또한 서찰을 잡고 있는 손도 부들부들 떨려 종이가 금세 찢어지더라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운남성주는 두루뭉술하게 말을 돌려서 했지만 결국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유기량과 함께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중 마현의 눈동자에서 짙은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군부에서 직접적인 명령이 내려왔소이다.
수일 후 조정에서는 마교를 역도의 무리로 규정을 지을 것이외다. 그 이유는 북해빙궁의 역도 무리 일부가 마교로 피신했으며, 간악하게도 마교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오.
하여 마교가 역도의 무리로 규정이 되자마자 황제폐하의 신하인 천무왕께서 직접 역도의 무리를 처단할 것을 천명하며 출병식을 가질 것이오.
거기에 북해를 접수한 전군도독부에서 군사 일부를 차출하여 별군을 만들어 마교로 진군시킨다고 하오.
하지만 내 은밀히 알아본 결과 조정과 군부에 보고된 전과에는 빠진 것이 있었소이다.
바로 외형적으로는 남해태양궁과 전군도독부가 북해를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조금 다르다 하오. 그건 지금까지 북해를 지배하고 있던 북해빙궁주 설관악을 완전히 척살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특히나 북해빙궁과 북해의 중심인 북해빙궁주, 그 아래 주요 수뇌들이 살아 암암리 재건을 노리고 있다고 하오.
이건 유 장군에게 기회가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하오.
천무왕의 출정식이 있은 후 실질적인 마교 토벌까지는 얼추 보름, 현 시점으로부터 대략 한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여기오.
그사이 유 장군께서 남만을 완전히 토벌을 한 후 마교로 군사를 돌린다면 오히려 공로는 전군도독동지 원직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여겨지오.
건투를 비오.
운남성주 서.
운남성주의 서찰을 다 읽은 마현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살아 있단 말이지?’
마현은 이 소식에 누구보다 좋아할 설린을 떠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이 서찰로 분명 율기가 황실이나 조정의 누군가와 끈이 닿아 있는 것이 확실해졌군.’
생각보다 귀한 정보를 얻은 것이다.
마현이 군막에서 몸을 돌렸을 때였다.
콰광 콰과과과광!
유기량의 군막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이 부르르 떨렸다.
* * *
팟!
흑풍전 내 한 지점에서 밝은 빛이 터졌다.
마현이 미리 만들어놓은 워프게이트진이 발동한 것이다. 아무래도 전에 만들어 놓은 워프게이트진은 마구간들이 집결되어 있는 곳이어서 안정적으로 운용하기 힘든 곳이었다.
그래서 마현은 그 워프게이트진을 없애고 흑풍전 내에 새로이 설치를 했었던 것이다.
빛이 사라지고 마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워프게이트진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워프게이트진이 필요하다. 즉, 마현은 남만야수궁 본진에 워프게이트진을 설치한 후 바로 마교로 돌아온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마교로 돌아와야 할 이유도 있었지만, 혹시나 남만야수궁에 큰 위험이 닥쳤을 때 바로 마교로 피신을 시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야율초재와 야율황기 둘 다 쉽사리 워프게이트진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마현이 보여준 능력이 있어 일단 수긍을 시키고 돌아온 것이다.
“주군. 돌아오셨습니까?”
워프게이트진을 지키고 서 있던 흑풍대원 하나가 군례를 취했다.
마현은 어깨에 걸쳐 메고 있던 도종극의 시신을 흑풍대원에게 넘기며 바로 명을 내렸다.
“바로 마주전으로 갈 것이다. 가 대장로에게 연락을 넣어 지금 당장 수뇌부 회의를 열 것이라 전하라.”
“명!”
마현은 흑풍전에도 들리지 않고 그 길로 곧장 마주전을 향했다. 그만큼 사안이 시급했다.
마주전에는 허진과 공효가 있었다.
“스승님, 다녀왔습니다.”
“갔던 일은 잘 처리했느냐?”
허진 역시 배후가 궁금했기에 안부인사를 받자마자 곧바로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