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5화
“결국 마교의 일은 틀어진 것인가?”
진필성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중얼거렸다.
“아직 확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검호법, 후동관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담담했다.
“율 군사가 확률은 어느 정도라고 하던가?”
“오 할이라고 했습니다.”
“오 할이라…….”
진필성의 얼굴에 주름이 자연스레 잡혔다.
오 할.
참으로 어중간한 확률이다.
결국 결과를 알 수 없는. 그때 하늘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참으로 애매한 경우다. 특히 앞으로의 일을 꾸미려는 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나쁜 확률은 없을 것이다.
“결국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군.”
진필성에게서 탐탁치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게 모르게 또 누군가의 눈치를 살폈다는 것이 기분이 상한 것이다.
“에잉, 남해태양궁을 너무 믿은 것이 잘못이었어.”
진필성은 그런 불쾌감의 원인을 애꿎은 남해태양궁으로 돌렸다.
“알았네, 나가보게.”
진필성의 말에 후동관이 머리를 살짝 숙이며 천무전을 빠져나갔다.
그가 빠져나가자 좌검호법인 요추광이 다가왔다.
“좌검호법의 말대로 율기를 만난 후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군.”
진필성은 요추광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얼마 전 요추광으로부터 후동관이 다른 이의 눈을 피해 율기를 두 차례나 만났다는 것을 보고받았다.
그중 며칠 전 두 번째 만났을 때의 내용을 오늘 자의적으로 찾아와 보고를 한 것이다.
“비록 같은 식구는 아니라고 해도 이제는 온전히 한 배를 탔으니 너무 심려를 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맹주님.”
확실히 요추광의 말대로 진필성은 어느 정도 짐을 벗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살피는 데에 있어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게. 망할 늙은이가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맹주님.”
푸드득.
그때 활짝 열린 창문으로 전서응이 날아 들어와 진필성이 앉아 있는 태사의의 팔걸이에 내려앉았다.
전서응의 발에 매달려 있는 전서를 떼는 진필성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미세하게나마 전서가 약간 구겨져 있었던 것이다. 진필성은 재빨리 전서응을 살폈다.
이곳에 날아오는 길이 순탄치 않았는지 몸 여기저기에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다.
‘이곳으로 오다가 맹조(猛潮)라도 만난 것인가?’
전서응의 몸에 상처가 없었다면 전서를 의심했겠지만 자잘한 상처로 인해 진필성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런 일이 흔하지 않지만 아주 없는 일도 아니기에 그냥 넘긴 것이다.
전서응의 몸에 난 상처들은 바로 조금 전 비혹은유로 인해 전서구들과 뒤엉켜 난 상처들이었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진필성은 전서를 펼쳐들었다.
전서를 읽는 진필성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하늘이 마교의 손을 들어준 모양이군.”
진필성의 손에 들린 자그만 전서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하얀 재로 변해 사라졌다.
“오히려 잘 된 일인가? 후후후.”
진필성의 입술이 얄팍하게 벌어지며 그 사이로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귀림은 자신의 거대한 꿈을 이루기엔 항상 거슬리는 존재였다.
“무림일통이라……, 이제 늙은이만 사라져 주면 또 다른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겠군.”
“하오나 맹주님. 어르신과 그들의 힘이 적잖을 텐데…….”
“어차피 그들은 무림인이 아니다. 그걸 이용한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야. 무림은 무림인의 것이니까. 제아무리 늙은이라고 해도…… 전 무림을 상대할 수는 없을 거야. 무검단(武劍團)은 어떤가?”
“만족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검림에는 비밀 무력단체가 하나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해 두 개다.
후동관이 알고 있는 검살단.
그리고 후동관이 모르는 무검단. 무검단은 오직 능자필과 요추광만 아는 비밀 무력단체였다.
“시간은 넉넉하니 조급하게 키우지 말게. 그들이 있어야 나의 꿈이 완성이 되니까.”
진필성의 말에 요추광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우검호법 때문에 그러는가?”
“사실 지금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맹주님.”
요추광은 후동관을 몰래 감시하는 것을 우려했다.
“어린 나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우검호법과는 근 십여 년을 동고동락 해왔습니다. 형제가 없는 제게는 가끔 그가 형제처럼 느껴집니다.”
“확실히 아까운 인물이기는 하지.”
진필성은 요추광의 말을 어느 정도 수긍해 주었다.
“너무 심려하지 말게. 후에 그를 끌어안겠네. 그리하면 되겠는가?”
진필성의 말에 요추광의 얼굴이 많이 편해졌다.
“구금상단에 전서를 띄우고, 맹주 직권 회의를 준비하게.”
“명을 받드옵니다.”
요추광이 명을 수행하기 위해 천무전을 빠져나가자 부드러운 웃음을 보이던 진필성의 얼굴에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에잉, 쯧쯧쯧.”
진필성은 혀를 차며 요추광이 나간 문에서 시선을 뗐다.
“나라를 세우면 개국공신(開國功臣)부터 목을 베라고 했던가? 좌검호법은 끝까지 같이 갈 인물이 아니군.”
진필성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언뜻 감돌다 사라졌다.
* * *
마현은 황군의 눈을 피해 은밀히 남만의 밀림으로 들어섰다. 그런 마현의 어깨에는 허름한 천으로 칭칭 감은 뭔가가 매어져 있었다.
바로 도종극의 시신이었다. 귀곡에서 그나마 깨끗한 옷가지를 찢어 씌운 것이다.
“이쯤이라고 했는데.”
마현은 도종극의 시신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런 마현의 눈가에는 주름이 살짝 잡혀 있었다.
마력을 이용해 주위를 살펴도 남만에서는 별반 소용없음을 깨닫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살기를 가진 기운들이 상당수 느껴졌지만 문제는 그 기운들이 남만에서 서식하는 맹수들의 살기인지, 아니면 남만야수궁의 야인들의 기운인지 좀처럼 구분이 가지 않는 까닭이었다.
도시라면 몰라도 남만 밀림 안에서 그들의 기운은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다.
바스락.
미세하지만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알아차렸지 아니면 모르고 넘어갈 정도로 아주 작은 소음이었다.
그리고 살기가 느껴졌다.
마현은 투시 마법으로 소음이 들린 곳을 쳐다보았다.
‘찾았군.’
제법 거리가 떨어진 나무 위에 야인 한 명이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기를 찾아 왔소.』
마현의 매직마우스 마법에 야인은 놀랐는지 인기척을 살짝 드러냈다.
“누구냐?”
경계심이 가득한 날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교의 소교주요.”
마현의 대답에 야인은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그 얇은 나뭇가지에 몸을 완벽히 숨겼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 사내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가는 눈매로 마현의 몸을 훑었다.
그런 야인의 눈동자가 마현 옆에 놓인 천으로 칭칭 감겨 있는 도종극의 시신으로 향했다. 야인은 턱으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본교 배신자의 시신이오.”
마현이 어깨를 살짝 들어 올려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귀하가 마교 소교주라는 증거는?”
마현은 품에서 야율황기가 헤어지기 전에 준 대호의 어금니를 꺼내 야인에게로 던졌다.
어지간한 아이의 주먹보다 더 큰 대호의 어금니를 살핀 야인은 그제야 어느 정도 경계심을 풀었다. 하지만 온전히 다 푼 것은 아니었다.
야인은 대호의 어금니를 잠시 살피더니 다시 마현에게로 던졌다.
“따라오시오.”
마현은 그런 야인의 말투에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식경 정도 야인을 따라 남만 밀림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인위적으로 만든 듯한 넓은 터에 삼사십 채 가량 몽골의 파오와 비슷한 천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황군과 목숨을 건 전쟁 중이여서 그런지 마을 전체에 긴장감이 칼날처럼 날이 서 있었다.
야인은 중앙 공터에서 약간 비켜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제법 큰 천막 앞으로 마현을 데리고 갔다.
“소궁주님.”
야인은 천막 입구에 걸려 있는 발 앞에서 야율황기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마교 소교주께서 소궁주님을 찾아왔습니다.”
“현이가?”
안에서 약간 분주한 소리가 잠시 나더니 입구를 가리고 있던 발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야율황기가 밖으로 나왔다.
“두 놈 다 잡았고?”
“한 놈만.”
마현은 어깨에 들쳐 메고 있는 도종극의 시신에 눈짓을 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야율황기는 마현을 데리고 자신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중앙에는 호피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대호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마현의 얼굴이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나른한 낮잠을 더 즐기고 싶은 것인지 대호는 마현을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앉자.”
야율황기는 호피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마현은 도종극의 시신을 천막 구석에 놓아두고는 야율황기를 따라 호피 위로 올라가 앉았다.
“도종극이겠군.”
야율황기는 허름한 옷가지로 칭칭 싸매져 있는 도종극의 시신을 쳐다보았다.
“율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더군.”
“반쪽짜리 성공인가?”
야율황기의 말에 마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율기를 못 봤으니 황실의 개입은 알 수 없었겠군.”
야율황기의 얼굴에 답답함이 묻어나왔다.
“율기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더군.”
“완전히 꼬리를 자르고 사라진 것인가?”
그 질문에 마현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율기의 뒤에 구금상단이 있다는 것은 알아냈네. 율기가 거기서 기다리겠다고 했다더군. 그래서 구금상단으로 가볼 생각이네.”
“구금상단이라……. 그나마 다행이군.”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상대해야 할 적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지.”
“천하제일의 구금상단이라면 그도 그렇겠군.”
제아무리 남만에서 생활하는 야율황기라고 해도 구금상단의 이름을 모르지 않았다. 그만큼 구금상단의 저력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구금상단이 머리는 아닐 거라는 걸세.”
“구금상단이 단시일에 클 수 있었던 이유가 관과 상당한 밀착관계 때문이라는 것을 어디에선가 들은 듯하군.”
야율황기의 목소리는 더욱 무거워졌다.
“여인과 아이들이 보이지 않던데…….”
“상황이 어찌될지 몰라 여인들과 아이들은 남만으로 대피시켜 놨네.”
“상황이 그리도 많이 안 좋은 겐가?”
“그래 보이는가?”
“공기에 날이 바싹 서 있더군.”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아. 어차피 밀림에서의 전쟁은 반드시 우리가 승리해. 다만 우리의 터전인 밀림이 파괴되는 것이 싫을 뿐이야.”
야율황기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함께 강한 자신감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황군을 무시하지는 말게. 그들은 밀림을 없애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들이니까.”
“야인은 강하네.”
야율황기가 옅은 웃음기를 보였다.
옅지만 당당하고 자신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친우가 왔는데 무얼 하나 대접한 게 없군.”
야율황기는 그제야 아무것도 내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밖에 아무도 없냐?”
“부르셨소, 소궁주?”
마현을 데리고 온 야인이 천막 안으로 얼굴을 빠금히 들이밀었다.
“남만에서는 차보다는 술이다.”
야율황기는 마현에게 그리 말하고는 야인에게 술을 가져오라 명했다.
“잠깐. 맹숭맹숭한 술보다는 이왕이면 최고의 술이 좋겠지. 가서 호유주(虎乳酒) 가져와.”
“호유주요? 궁주님이 아시면…….”
“……괜찮아,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호유주 정도는 대접해야지.”
야인의 말에 야율황기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다시 호탕하게 가져오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