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4화
학성과 당화평은 들어서며 개방 제자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그만큼 눈에 익었다는 뜻이다. 학성과 당화평은 거리낌 없이 구석에 놓인 탁자로 걸어가 자리했고, 걸개아는 손수 차를 내왔다.
이렇게 셋이 어울리게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원래 걸개아와 당화평은 마현이라는 공통의 목적이 있었기에 친해졌다.
그때 마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학성과 친분을 쌓았다.
하지만 그런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학성은 만나면 만날수록 괜찮은 이였다. 그렇다 보니 호감은 어느새 정(情)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셋의 어울림은 청천대로 와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처럼 마음을 터놓을 정도로 끈끈한 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된 것은 셋이 청천대에 소속된 이후였다.
비록 학성의 사형인 학방이 청천대주로 있다고는 하지만 학성이 마현의 절친한 친우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알게 모르게 청천대 안에서 은근한 배척을 받았던 것이다.
그 배척은 조만간 마교와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공공연히 돌면서 서서히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그런 따돌림은 평소 학성과 잘 지내고 있던 걸개와와 당화평에게까지 번졌다. 그렇게 셋을 배척하는 무리의 중심에는 남궁세가의 남궁혁과 청성파의 태일 도장이 있었다.
둘 다 마현을 뼛속까지 싫어하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걸개아와 당화평은 그런 분위기에 발끈했지만 학성의 만류로 그냥 속으로 삭혀야 했다. 그렇게 셋은 더욱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걸개아는 불취개를 통해 치부나 다름없는 무림맹의 감춰진 비밀을 들었고, 그 중심에 학성이 있음을 들었다. 당연히 그 이야기는 당화평에게 전해졌다.
당화평은 애초에 무림맹에 대해 어느 정도 반감이 있던 사천당문 출신이었기에, 그 일로 인해 셋은 진정으로 의기투합하게 되어 지금까지 친분이 이어진 것이다.
“청천대는 어때?”
걸개아는 찻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아직까지는……. 청천대 내부에서는 곧 마교와 전쟁을 치른다는 소문이 날이 갈수록 커져 가는데 무슨 정보라도 있어?”
당화평의 질문에 걸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 특별한 것은 없어.”
“그렇다면 단순히 총사의 생각일까?”
당화평은 홀로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둘의 의견을 묻는 행동이기도 했다.
“남궁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이니 다분히 그럴 수도 있겠지.”
학성은 남궁혁과 제갈세가의 장녀인 제갈영영 사이의 관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사안이 보이면 알려줄게.”
걸개아는 차를 마시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가 초조한 감정이 언뜻 드러난 학성의 얼굴을 보자 다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마. 다른 건 몰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드러나는 곳이 여기니까.”
걸개아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한두 번 두들겼다.
“문제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무림맹주의 진정한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거지. 현이와 연락이라도 되어 무림맹주의 정체를 속 시원하게 안다면 속이 편하겠다만……, 휴우.”
학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걸개아와 당화평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마교에서 축출된 귀림이라는 단체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것까지는 어렵게 알아냈는데 그 이상 진척된 것이 없었다.
“기다려, 기다리다 보면 분명 움직임이 있을 거야.”
인내하는 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는 당화평이 학성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 행동에 학성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았는데……, 내가 신기한 거 보여줄까?”
걸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서 자그만 약병 하나를 가져왔다.
단순한 약병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한 당화평의 눈동자는 어느새 호기심으로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누가 당가 놈이 아니랄까봐. 미리 말해두겠는데, 요건 개방의 비전이라서 못 알려줘.”
걸개아의 강한 어조에 당화평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요게 뭐냐? 천 리 밖에 있는 전서구도 유혹해서 불러들일 수 있다는 비혹은유(飛惑銀油)란 말이야.”
“요게 풍문으로만 듣던 비혹은유?”
당화평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걸개아의 손에 들려 있는 자그만 약병을 빼앗아들었다.
“야, 야!”
걸개아가 소리를 빽 질렀다. 하지만 걸개아가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당화평이 약병 마개를 열었다.
“안 돼!”
걸개아가 그런 당화평의 행동에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텁텁하고 느글거리는 진한 기름 냄새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마, 망했다.”
걸개아는 정신 줄 놓은 사람처럼 울먹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뾰롱 뾰로롱.
푸드득 푸드득!
전각 상층에 있는 모든 전서구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당화평에게로 모여들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수백 마리가 그 좁은 천안각 상층 수발대 안을 마구 헤집으며 일제히 날기 시작한 것이다.
“컥!”
당화평도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자 그제야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약병을 닫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전각 안에서 마구 헤집고 날아다니는 전서구의 수만큼 전서구들이 들락거리는 전용 공간으로 많은 수의 전서구들이 몰려들어온 것이다.
수백에 달하는 새들이 그 좁은 건물 안에서 마구 날아다니니 방 안이 엉망이 된 것은 둘째 치고 공기보다 먼지와 깃털이 더 많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던 걸개아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당화평의 손에 들린 약병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당화평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막 날리려는 때였다.
꺄아악!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귓가를 할퀴며 매서운 바람이 걸개아를 덮쳤다.
걸개아는 재빨리 몸을 틀어 매서운 바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턱!
“응?”
그때 걸개아의 손에 잡힌 것은 한 마리 매였다.
“전서응?”
전서응은 황실이나 군부, 관이 아니고서는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아고야!”
어디 관에서 날려 보낸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런 전서응이 비혹은유 향을 맡고 왔으니 자칫 일이 틀어지면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걸개아는 일이 커지기 전에 전서응을 놔주려 했다. 하지만 전서응은 걸개아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가 발목에 매달린 전서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헉! 화, 화평아 빨리 전서 주워라.”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음을 깨달은 당화평이 재빨리 탁자 아래로 떨어진 전서를 주워들었다. 그런데 전서를 주워든 당화평이 굳은 얼굴을 하며 전서를 걸개아에게 넘기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전서를 펼쳐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야, 너 죽고 싶어? 구족이 멸할래? 빨리 안 넘겨?”
걸개아가 전서응을 잡은 채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지만 당화평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전서를 읽고 있을 뿐이었다.
“이거 맹주의 전서다.”
“맹주?”
당화평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걸개아도 고래고래 지르던 소리를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냐하면 맹주의 전서도 이곳을 통해 외부로 나간다.
즉 사사로이 외부로 전서를 날렸다는 뜻이리라.
“야, 누구 이리 와서 이놈 잡고 있어.”
걸개아는 개방 제자 하나를 불러 전서응을 넘기고는 당화평에게로 다가갔다.
당화평은 걸개아와 학성이 잘 보이게 탁자 위에 전서를 펼쳤다.
천무왕 전(前).
귀림이 마교를 장악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
더 이상 귀림을 믿고 기다릴 수는 없으니 천무왕의 이름으로 마교를 멸문하시게.
명분은 북해의 일을 걸고 넘어가면 될 것이며, 황실에서도 힘을 실어줄 것이네. 아울러 필요한 물자는 상림을 통하면 될 것일세.
상인(上人) 서(書).
“상인?”
학성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지만 이 자리에서 대답해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검림, 귀림, 상림……. 황실일까?”
당화평이 고개를 들어 둘의 의중을 물었다.
“일단 전서응부터 다시 놓아줘야겠어.”
걸개아는 전서를 다시 전서응의 다리에 묶어 밖으로 날렸다. 잠시 주위를 맴돌던 전서응은 원래 자신이 가야 할 천무전으로 날아갔다.
“모두 함구해야 한다. 알았나?”
모두가 충실한 개방의 제자들이었기에 믿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유출을 막기 위해 걸개아는 개방 제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소방주.”
콰당!
그때 방문이 떨어져나가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거칠게 문이 열렸다.
“너 이 새끼,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불취개였다.
그의 얼굴과 역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보아 단단히 화가 났음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불취개는 걸개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귀를 잡아당겼다.
“아! 아! 아악!”
걸개아는 총총 위로 뛰면서 비명을 질렀다.
“방주님을 뵈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당화평과 학성의 인사에 불취개는 걸개아의 귀를 놓아주었다.
“너희들도 있었느냐?”
“예.”
“우씨.”
걸개아는 빨개진 귀를 만지며 불만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불취개는 귀가 밝았다.
“뭐야? 요, 요놈. 이거 사부 없으면 아주 대놓고 욕을 할 놈일세.”
불취개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통나무만한 팔뚝에 힘을 주었다.
“하하하, 사부님.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그 누구도 아니고 사부님 아닙니까?”
걸개아는 마치 이형환위를 한 것처럼 어느새 불취개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건 그렇다만은…….”
불취개의 목소리가 조금 수그러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다시 쌍심지를 켜고 있었다.
“잘못한 일은 잘못한 일. 너를 사랑하는 이 사부의 사랑이 담긴 매이니 달게……, 아주 달게 받아라.”
쿵!
불취개는 큼지막한 주먹으로 걸개아의 머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하지만 걸개아는 고개를 살짝 젖혀 불취개의 주먹을 피해버렸다.
“어라? 피해? 타구봉이 어디 있더라?”
불취개는 약삭빠르게 자신의 주먹을 피한 걸개아를 보며 눈썹을 역 팔(八)자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매여 있는 푸른빛이 감도는 타구봉을 꺼내들었다.
“귀림이 마교 장악 실패, 천무왕의 이름으로 마교를 멸문시켜라. 명분은 북해의 일을 거론하면 되고, 황실에서도 힘을 실어줄 것임. 아울러 필요한 물자는 상림에서 지원. 상인이라는 자가 맹주에게 보낸 전서입니다, 스승니임!”
촉새도 저리도 빨리 말하지 못할 것이다.
걸개아는 한 호흡도 내쉬지 않고 저 긴 말을 단숨에 내뱉었다. 그 소리에 걸개아를 내려치려던 불취개의 타구봉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그게 무슨 소리냐?”
조금 전과 달리 불취개의 목소리는 다분히 진중해져 있었다.
“그게 말입니다, 스승님. 제가 실수로 비혹은유를…….”
걸개아는 조금 전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확실하냐?”
“제자뿐만 아니라 화평이와 학성이도 함께 보았습니다.”
그 말에 불취개는 고개를 돌려 당화평과 학성을 쳐다보았다.
“사실이더냐?”
“그렇습니다, 방주님.”
당화평의 대답에 불취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불취개는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사실은 일단 함구하거라.”
“본가 어르신에게도 말입니까?”
불취개는 당화평의 질문에 그와 학성을 쳐다보았다.
“일단 함구하거라. 그리고 수일 내로 가주와 장문인을 한 번 뵙겠다고 전하고.”
불취개가 직접 이야기하겠다는 뜻이다.
이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수긍했기에 당화평과 학성은 고개를 숙여 그 뜻을 받아들였다.
“이렇고 있을 때가 아니지.”
불취개는 몸을 돌리다가 말고 타구봉을 휘둘렀다.
딱!
걸개아의 머리 위에서 경쾌한 소리가 터졌다.
“앞으로 그런 실수하지 마라. 이건 이 스승의 사랑의 매란다.”
불취개는 고통에 눈물을 글썽이는 걸개아를 뒤로 하고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