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23화
이틀 전 허진의 명으로 한 달 후 봉문을 푼다는 교지를 내렸었다. 물론 그 교지를 뒤집을 수 있었지만 그리 된다면 나쁜 선례를 남길 수가 있으니 가급적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
잠시 머뭇거리던 마현이 허진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제자가 홀로 다녀오겠습니다.”
“홀로?”
“본교는 현재 봉문 상태에 있으며, 또한 군부가 끼어 있는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이 일은 홀로 움직이는 것이 더 나을 듯싶습니다.”
허진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현이 설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현은 오히려 설린 때문에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율기를 따라가다 보면 분명 남해태양궁과 군부와 이어질 것 같은 직감이 들어서였다.
물론 설린을 홀로 놔두고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하루 빨리 그녀가 웃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어느새 간절해져 있었다.
허진은 한참이나 마현을 내려다보았다.
“자신 있느냐?”
허진의 질문에 마현은 무겁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언제 출발하겠느냐?”
마현은 당장 출발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설린이 깨어나는 것은 물론 안정을 찾는 것도 봐야 했고, 폐관수련으로 미뤄놨던 죽은 네 장로, 팬덤 나이트도 깨워야 했다.
“모레 떠나겠습니다.”
“모레라……, 괜찮겠느냐?”
고개를 돌려 야율황기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이틀이라면 상관없습니다.”
야율황기는 마현을 살짝 쳐다보고는 그 뜻을 받아들였다.
* * *
대전에서 회의가 끝나고 마현은 야율황기를 데리고 흑풍전으로 향했다. 야율황기가 며칠이라도 머물 곳이 필요해 흑풍전 내 객방 하나를 내어주었다.
별채가 따로 있었지만 이미 그곳은 설린과 설영대가 사용하고 있었다.
“차라도 한 잔 할 텐가?”
마현은 야율황기만 달랑 방에 놔두기가 뭐해 익숙해질 때까지 잠시 있어주기로 했다.
“쩝, 차보다는 술이나 한 잔 하지?”
야율황기가 손으로 술을 마시는 흉내를 내며 멋쩍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지.”
마현은 시녀를 시켜 설린이 깨어나면 바로 알려달라는 명과 함께 술상을 내오게 했다.
잠시 후 탁자 위에 술상이 차려졌다.
“크흠.”
술상을 바라보던 야율황기가 크게 헛기침을 한 번 내뱉고는 마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미안하네.”
화통한 그의 성격답게 사과도 꽤나 직설적이고 단순했다.
“그렇다면 벌주 세 잔을 마시게.”
마현의 말에 야율황기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술잔이 아닌 안주가 담긴 대접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젓가락으로 대접 안에 든 안주를 다른 접시에 옮기고는 술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는 대접으로 연거푸 석 잔을 마셨다.
“크으!”
야율황기는 기분 좋은 듯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소매로 입가를 쓰윽 닦았다.
비록 야율황기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현은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술잔이 대접으로 바뀔 만큼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음을 말이다.
“자네도 한 잔 받게.”
야율황기가 그 대접을 마현에게 내밀었다.
그 모습에 마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야율황기처럼 술잔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듣자하니 소교주가 된 듯하더군. 그걸 축하하는 의미일세.”
“고맙네.”
마현은 대접에 가득 찬 술을 단숨에 마셨다.
그렇게 둘은 하나의 대접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독을 비웠다.
“근데 말이야. 이거 내가 머리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서. 대전에서 있었던 일을 좀 자세히 설명을 해주겠나?”
마현은 화산파 무림대회에서 있었던 일부터, 북해빙궁과 남만야수궁의 일까지 추론과 주장을 곁들여 야율황기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해 주었다.
“그래서 황실이란 말이 나온 것인가?”
야율황기의 질문에 마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이 일이 보이는 것보다 숨어 있는 것이 더 클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드네.”
마현의 목소리가 차츰 무거워졌다. 또한 야율황기 역시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꽤 되었군.”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푹 쉬지 못했으니 이틀이라도 편히 쉬게.”
마현은 근 일 년간 이어져온 운남성 황군과 남만야수궁 사이에 끝없는 접전을 떠올렸다. 거기에 얼마 전 황실에서 별군까지 가세했으니 전세는 더 치열할 것이다.
“편히 쉴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야율황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남만야수궁은 운남성 황군이나 별군으로 이루어진 남만토벌군과 전쟁을 치루고 있을 것이다.
“돌아가서 그 이상 싸우면 되지 않겠나?”
마현은 어두운 표정을 한 야율황기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친 후 방을 빠져나왔다.
그사이 해가 저물어 날이 깜깜해져 있었다.
크게 숨을 내쉬니 취기가 코끝을 찔렀다.
마현은 마력을 끌어올려 취기를 모두 날려 보냈다. 야율황기를 비롯해 남만야수궁 야인들은 그사이 푹 쉴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은 그 안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팬텀 나이트를 깨우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오늘 할 생각이었다.
‘사신 키디악의 흑마법은 우선 미뤄야겠군.’
마현이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왔을 때 팬텀 나이트를 깨운 후 바로 사신 키디악의 흑마법을 본격적으로 익히려고 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지독한 사기와 원한이 가득한 혼, 즉 망자들이 깨어 있는 사지(死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곳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교 내에서 적합한 곳이 있었지만 이미 그것은 흑풍대의 스켈레톤을 부활시켜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으며, 다른 한 곳 역시 팬텀 나이트로 인해 사신 키디악의 흑마법을 익힐 수 있는 원천적인 밑바탕을 만들어 내기에는 부족했다.
그나마 허진의 독문무공인 마라역천공이 있어 위안이 되는 동시에 든든함도 느꼈다.
마현은 서둘러 마교 서쪽에 마련된 공동묘지로 향했다.
팬텀 나이트를 깨우는데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만 그 사이 설린이 깨어날까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마교 서쪽 외문을 빠져나가 도착한 공동묘지는 일반인은 느낄 수 없었지만 마현은 묘하게 흐르는 사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공동묘지에는 짙은 사기가 깔려 있었지만 단순히 고르게 퍼져 있지 않았다.
공동묘지 한 중앙을 기점으로 동서남북, 네 지점에서 사기가 느리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흑사신.”
마현은 그 중심에 서며 흑사신을 소환했다.
“주인, 무슨 일이야?”
흑도가 사기가 가득한 묘지에서 자신들을 깨우자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오늘 팬텀 나이트를 깨울 것이다.”
“오오!”
흑도는 얼굴 가득 잔뜩 기대감을 드러냈다.
“팬텀 나이트 역시 그 하나로 훌륭한 기사임에는 틀림없지만 전에 말한 것처럼 그들을 그대들의 권속 아래 둘 것이다.”
“크크크, 귀여운 수하 한 놈이 생긴단 말이지?”
흑도는 아주 좋아 죽겠다는 듯 웃음을 연신 내뱉었다.
“언데드를 다스리는 너희들의 권능은 팬텀 나이트에게로 이어질 것이다. 시작하지.”
어차피 팬텀 나이트에 대해서는 흑사신들이 숙지하고 있었기에 마현은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를 중심으로 각자 마음에 드는 방위에 서라.”
마현의 명에 따라 흑사신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방위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구오오오오!
마현의 몸에서 잔잔한 파장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파장은 짙은 마기를 동반하며 정확히 사방위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뻗어나간 마현의 마기는 정확히 흑사신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크헉!”
마치 뇌력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흑사신들은 일제히 뻣뻣하게 몸을 일으키며 부르르 떨었다.
마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양이 늘어날수록 흑사신의 몸은 더욱 강하게 떨었다. 그렇게 몸을 부르르 떨던 흑사신의 몸에서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마기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렇게 흑사신의 몸을 한 번 거친 마현의 마기는 정확히 팬텀 나이트가 될 네 장로들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콰르릉!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들썩이더니 마기가 떨어진 곳에서 검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마현이 네 구의 시신을 묻으며 펼쳐놓은 흑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어둠의 기운의 주인인 나 카칸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팬텀 나이트로 다시 태어나 깊은 어둠에서 일어나 나를 숭배하라!”
룬어로 이루어진 마현의 목소리가 한 자 한 자 흘러나올 때마다 마법진이 깔린 네 곳의 땅이 그에 맞춰 들썩거렸다.
―크아아아아!
―캬하아아아!
땅속에서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푸학!
들썩거리던 땅거죽이 터지며 새카만 손이 튀어나왔다. 그 손은 한참이나 바르르 떨더니 손목을 꺾어 땅을 강하게 짚었다.
그리고 또 손 하나가 튀어나와 다시 땅을 짚었다. 그렇게 뚫린 땅에서 기이한 녹색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땅속에서 피부가 온통 검은 인형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모습은 흡사 목내이(木乃伊; 미라)처럼 비쩍 말라 있었다. 거기에 피부까지, 온몸이 먹물처럼 시커멓다.
그런 그들의 몸에서는 인광(燐光)처럼 보이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흑사신, 저들을 귀속시키라!”
마현의 명에 따라 네 흑사신은 팬텀 나이트 앞으로 걸어갔다.
흑권이 가장 먼저 자신에게 귀속될 팬텀 나이트에게로 팔을 들어올려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주군께 받은 권속으로 너에게 암권(暗拳)이라는 이름을 내린다!”
흑권의 손바닥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와 팬텀 나이트의 눈으로 스며들었다. 복종의 인을 팬텀 나이트의 머릿속에 각인시킨 것이다.
“오, 암권! 그거 이름 좋은데……. 크크크, 네놈의 이름은 암도(暗刀)다, 암도!”
그렇게 나머지 흑사신들 역시 암(暗)자를 이용해 팬텀 나이트들에게 복종의 인을 새겼다.
―크으아악!
그 과정이 실로 고통스러운지 팬텀 나이트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 고통도 서서히 사라지자 고통에 찬 몸부림도 함께 사라졌다.
“일어나라!”
흑권의 명에 그에게 귀속된 팬텀 나이트, 암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누구냐?”
“나의 주인이자 상관인 흑권이십니다.”
“나의 주군은?”
“어둠의 근원, 마현이십니다.”
흑권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복종의 인이 실패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시험 삼아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본 것이다.
“어둠을 갈무리하라.”
“명!”
암권의 몸에서 활활 타오르는 푸른 기운이 그의 몸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러자 그의 검은 피부도 서서히 사라져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얼굴을 드러낸 암권은 바로 살아 있을 때 대장로 혈월마성이었다.
흑검의 팬텀 나이트는 팔장로였던 혈음검이었고, 흑창의 팬텀 나이트는 오장로 염왕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흑도의 팬텀 나이트는 삼장로 역천마도였다.
“흠! 마음에 안 들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흑창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염왕부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저마다 절기에 어울리는 수하들을 거느렸지만 흑창은 아니었다.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고금제일천하무쌍우내무적창인 이 몸의 수하로는 영 마음에 안 들어.”
흑창은 이제는 암창이 된 염왕부가 들고 있는 도끼를 보며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암창.”
“예, 대공(大公).”
암창에게 있어 흑창은 언데드를 지휘하는 군단장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장군’이라는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자신들은 황군이 아니다. 그렇기에 암창의 입장에서 ‘장군’과 비견되는 호칭인 ‘대공’을 사용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