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21화
북해의 차가운 설풍보다 더 차가운, 지독하게 차가운 은빛이 번쩍였다. 반월을 그린 은빛은 여지없이 설관악의 가슴을 갈랐다.
“크아악!”
설관악은 힘도 써보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머리에 큰 뿔이 난 괴물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붉고 긴 혀로 설관악의 피가 묻은 검을 핥았다. 그리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으아악!”
이번에는 한한파파가 괴물의 검에 양단이 되며 죽었다.
“안 돼! 안 돼에!”
설린은 울부짖으며 설관악과 한한파파를 향해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대로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고개를 내려다보니 그녀의 다리는 돌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다리만 돌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돌이 자라나는 것처럼 조금씩 자신의 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몸을 이리 틀어보고 저리 틀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니 그러다 보니 주위가 너무 조용한 것 같아 급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장면은 잠시 후 다시 반복됐다. 설관악과 한한파파가 죽을 때마다 설린은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시 머리에 큰 뿔이 난 괴물이 나타났고 설관악과 한한파파는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렇게 똑같은 장면을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보고 또 보았다. 한 번 보기도 참담한 장면을 끊임없이 봐야 하는 것이다. 설린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살육이 끝나면 마치 맛있는 음료라도 마시는 듯 검에 묻은 피를 혀로 핥던 뿔 달린 괴물이 설린을 쳐다보았다. 그 괴물의 얼굴은 양위도였다.
“차라리 나를 죽여! 나를 죽이란 말이다! 꺄아아악!”
마현은 의자에 앉은 채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침상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푹신한 비단 이불이 깔린 침상 위에는 설린이 누워 있었다.
연 이틀째였다.
그녀는 한시도 편히 있지 못하고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몹시 괴로워하며 앓고 있었다. 메마른 목소리로 뭐라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괴로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꺄아아악!”
그때 설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용수철이 튕기듯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설린은 마구 비명을 지르며 비단 이불을 찢어발겼다.
“차라리 나를 죽여! 나를 죽이란 말이야!”
설린은 땀에 젖은 옷을 찢고, 자신의 몸에 붉은 손톱자국을 남기며 자해하기 시작했다.
“설 소저!”
마현은 재빨리 침상으로 달려갔다.
마현은 어쩔 수 없이 미친 듯이 날뛰는 설린의 어깨를 강제로 잡아 눌렀다.
“차라리 나를 죽이란 말이다. 차라리 나를…….”
마현의 양손에 눌린 설린은 그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힘이 얼마나 억세던지 마현은 어쩔 수 없이 마력을 끌어올려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설린을 막을 수 없어 배에 올라타고 나서야 겨우 그녀를 누를 수 있었다.
“꺄아아악!”
더욱 억세게 몸부림치는 설린의 눈동자는 넋이 나간 광인처럼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또한 뭐가 그리 무서운지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에는 짙은 공포가 어려 있었다.
콰당!
문이 활짝 열리며 곤오가 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마 설린의 비명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마현은 그런 곤오에게 아는 척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시오!”
마현은 양다리로 설린의 팔을 옭아맸다. 그리고는 손으로 설린의 얼굴을 잡았다.
“아아아악!”
그래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설린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 앞으로 당겼다.
“설린!”
마현은 설린의 얼굴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바싹 주었다. 하지만 설린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몸부림과 비명소리가 더 커지고 있었다.
마현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섭혼술을 사용했다.
순간 마현의 눈동자에서 기이한 마력이 만들어졌고, 그 마력은 설린의 눈빛을 잡아당겼다.
“나요, 나. 마현이란 말이오. 어서 정신을 차리시오!”
설린의 눈동자에 생기가 보이자 마현은 급히 섭혼술을 거둬들였다.
“마, 마 공자?”
“그래, 나요. 이제 정신이 좀 드오?”
마현은 설린을 억세게 누르고 있는 양다리와 손을 살짝 풀었다.
몸을 짖누르는 고통에 설린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이것도 꿈인가요?”
“아니요, 여기는 본교의 내 침소요.”
“아버지는? 한한파파는?”
“악몽을 꾼 모양이오. 연 이틀 듣기 힘들 정도로 아픈 잠꼬대를 했소.”
마현의 말에 설린의 눈동자에 눈물이 핑 돌았다.
“흐흑, 흑흑흑흑.”
설린은 침상에서 일어나는 마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마현은 차마 침상에서 떠나지 못하고 조용히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 모습에 곤오는 무거운 표정을 한 채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흑풍전 앞뜰,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바위에 걸터앉은 곤오는 깊은 시름이 담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게 우두커니 얼마나 있었을까.
끼익.
경첩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흑풍전에서 마현이 걸어 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곤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께서는?”
곤오는 급히 마현에게로 다가갔다.
“편히 잠들었소. 마의당 의원의 말을 빌자면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그러더군.”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곤오는 마교로 와서 마현이 소교주 자리에 올랐음을 들었다.
“아니오, 내가 한 일이 뭐 있다고. 일단 자리를 옮깁시다.”
마현은 연못 한 모퉁이에 만들어진 정자로 곤오를 데리고 올라갔다.
“북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마현이 아는 것이라고는 남해태양궁과 군부가 북해를 침범했다는 것뿐이었다.
“저 역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답답합니다.”
마현의 눈썹 꼬리가 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곤오의 대답이 원하던 내용도 아니거니와 설영대주라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도 아닌 까닭이다.
곤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해가 뜨자마자 군부를 앞세우고 남해태양궁이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수만의 군사를 앞세운 남해태양궁을 막기란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정오가 채 되지 않은 시간…….”
말을 하다 갑자기 입을 닫은 곤오의 두 눈에서는 살기가 뻗쳤다. 한참 동안 뺨을 부르르 떨던 곤오는 어렵사리 다시 말을 이었다.
“본궁이 무너졌습니다. 본궁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무고한 북해의 생민(生民)들까지 무참히 학살당했습니다. 마지막까지 궁주님과 소궁주님이 남해태양궁을 막아섰지만 수만의 황군을 막아내지는 못하셨습니다. 결국 죽음을 각오하신 듯 궁주님은 아가씨를 모시고 북해에서 도피하라 마지막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게 제가 뵌 궁주님과 소궁주님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곤오의 마음을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마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고 결국 설린이 소궁주 자리에서 물러났음도 알게 되었다.
북해빙궁이 몰락한 지금 그것을 따지는 것도 별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을 모두 버릴 상황은 아니군.”
“저 역시 그러기를 바랍니다만……. 양위도, 그놈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을 보면 분명 궁주님과 소궁주님은…….”
곤오는 끝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굵은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아직 명확하지 않은 일이다. 설사 본인이 그리 말했어도 그대가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거늘.”
마현은 실망 어린 목소리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도 많이 지친 모양이군. 설 소저도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니 그대도 쉬게. 그대가 건강해야 설 소저도 지킬 것이 아닌가?”
마현이 정자에서 막 내려올 때 마충이 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주군.”
“무슨 일인가?”
“지금 본교 정문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난리? 남해태양궁인가?”
“남해태양궁이 아니라 남만야수궁입니다.”
“남만야수궁?”
뜻하지 않은 대답에 마현의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
“남만야수궁이 왜?”
“남만야수궁의 소궁주가 오십에 가까운 병력을 끌고 와 한바탕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난리라니? 자세히 말을 해보라.”
“그게…….”
마충은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말하라!”
마현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항명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주, 주군을 죽이겠다고…… 날뛰고 있습니다.”
“나를?”
마충의 말에 마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날뛸 이유가 없었다.
“……단순히 엄포를 놓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문을 뚫고 주군을 만나기 위해 사생결단을 한 모습이었습니다.”
마충의 말을 들으니 마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듯했다. 문제는 왜 야율황기가 그처럼 날뛰는 것인지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무고한 인명 피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주군.”
“알았다. 가자.”
마현은 서둘러 마교 정문으로 향했다.
* * *
크허어어엉!
집채만 한 대호 한 마리가 굳게 닫힌 거대한 철문이 흔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포효했다.
“마현, 이 새끼! 나와라! 내 오늘 죽는 한이 있어도 네놈만은 죽여 버리겠다!”
거대한 몸집을 한 사내, 야율황기가 악과 살기가 바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쿵 쿵 쿵!
그러는 사이 남만에만 산다는 검은 물소 십여 마리가 철문을 들이받고 있었다. 중원의 어지간한 황소도 옆에 두면 마치 송아지처럼 보일 정도로 검은 물소의 몸집은 엄청났다.
중원의 황소라면 아무리 들이받아도 두꺼운 철문을 뚫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하지만 남만야수궁의 물소, 흉포한 맹수들 사이에서 한 자리를 떡하니 꿰차고 있는 검은 물소는 달랐다.
물소가 철문을 한 번 들이받을 때마다 철문이 철컹거리며 몸살을 앓았고, 철문을 지탱하는 성벽이 삐거덕거리며 돌가루를 내뱉을 정도였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계속 물소를 방치하다가는 외원으로 통하는 정문이 뚫릴 수도 있었다.
소극적으로 그들을 막아서던 수문장은 어쩔 수 없이 성문을 방어하기 위해 공격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물소 떼를 공격하라!”
수문장의 명령에 마인들은 날카롭게 날이 선 창을 정문으로 돌진하고 있는 물소 떼를 향해 날렸다.
검과 도, 창.
온갖 병기가 난무하는 무림이지만 결코 사용할 수 없는 병기도 존재한다.
바로 대형 공성 무기와 화탄, 그리고 활이다.
이 세 가지만은 황실에서 사용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있었다.
비록 황실의 눈치를 보지 않는 마교라고 할지라도 이것만은 지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수문장의 명에 마인들은 일회용으로 사용되는 화살과 거의 진배없는 단순한 모양의 창을 일제히 날린 것이다.
쐐애애액!
단순한 창이라 할지라도 내력이 담겼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작고 예리한 화살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창은 충분한 살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창이 정문으로 돌진하는 물소 떼에게 꽂히기 일보 직전.
꺄아악!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파란 하늘 위에서 독수리 떼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마리의 독수리 떼는 튼튼한 날개로 창을 후려쳐 막는 동시에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창대를 반 토막으로 쪼개 버렸다.
“웅가량, 이 새끼. 뭐해? 성벽을 점령하지 않고!”
“알았쑤다.”
야율황기의 호통에 웅족장(熊族長) 웅가량이 일족의 수하들을 데리고 앞으로 나왔다.
“가자, 이놈들아!”
“와아아아!”
“더러운 배신자를 벌하자!”
웅족 야인들은 곰을 앞세워 성벽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