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19화
과거 허진이 사용하던 부마전을 약간 손본 것이 다였기에 크게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지만 익숙지 않아 상당히 낯설었다. 그나마 얼굴이 익숙한 시녀들이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마현은 그동안 몸에 쌓인 묵은 때와 먼지를 씻어내고 깨끗한 묵색 곤룡포로 갈아입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마현은 서둘러 마주전 뒤 허진의 거처인 마휴당으로 향했다.
새로이 지어진 마주전과 마휴당은 태상교주가 된 사공소가 머무는, 과거의 마휴당에서 명칭만 변한 상마전(上魔殿) 자리에서 교묘히 빗겨나 세워졌다.
사공소는 사공소대로 안락한 노후를 보낼 수 있고, 허진은 허진대로 마음껏 활기차게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염두에 둔 배치였다.
일 년 만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새로이 지어진 마주전은 놀라웠다. 그 엄청난 규모는 마현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마현은 마휴당으로 가기 전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마주전의 전경을 잠시 감상했다.
전소된 과거 마주전과 비교해도 절대로 뒤지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고 품격이 있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화려함은 빠지고 수수해졌다. 그런 담백함이 오히려 더욱 강한 위압감을 만들어내는 듯싶었다.
딱 허진의 성품이 드러나는 그런 마주전이었다.
그렇게 마주전을 보고 있자니 마현은 달라진 본교 모습에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꼈다.
바로 엊그제 마교에 들어온 것 같은데, 바로 어제 스승님의 제자가 된 것 같은데……, 어느새 복수를 위해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전에!’
마현은 눈을 빛내며 율기와 검림주 능자필, 그리고 도종극을 떠올렸다. 그런 마현의 눈동자에서 은은한 마기가 머물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북해빙궁에서 7서클에 도달했다.
그래서 과거의 힘을 찾았다고 우쭐해졌다.
그 방심 탓에 바로 얼마 전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능자필의 음공에 당했다. 그로 인해 자칫 광인이 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이 스승이 아는 바, 적어도 무림에 너보다 강한 자가 열 명,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언제가 허진이 들려준 그 말이 처음에는 가볍게 다가왔으나 지금은 거대한 바위가 되어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런 듯해 마현은 뼈저리게 자신을 질책했다.
7서클이면 하르센 대륙으로 돌아가 충분히 복수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 백마법사들이 언제까지나 6서클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자만일 뿐…… 사실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은 전보다 더 강력해진 지위로 전 대륙의 마법사들을 휘어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들을 상대하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완벽히 재점검하고 다듬어야 했다. 아니 최상이라 여기던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모습은 어떤가?
흑마법의 원천이요 주(主)된 힘인 군신 아이벤의 힘만 갈고닦았다.
자신의 또 다른 힘이었던 사신 키디악의 힘은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아니 간간히 그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외면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신 키디악의 힘 대신 마공을 익혔으니 그것으로 대체가 되었다고 여겼다.
마현의 입에서 고소가 지어졌다.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더 높은 곳으로 나는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 만든 모든 자들에게 복수를 할 것이다!’
마현은 현재 자신의 힘인 군신 아이벤의 흑마법에 마공과 사신 키디악의 흑마법까지 융화시킬 작정이었다.
허진이 시킨 폐관수련은 끝났지만 마현의 진정한 수련은 지금부터였다.
‘아차!’
잠시 마주전을 구경한다는 것이 상념에 잠기는 바람에 그만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가 버렸다. 마현은 서둘러 마주전을 지나쳐 그 뒤에 세워진 마휴당으로 들어갔다.
마주전 앞에서 시간을 제법 허비한 탓인지 이미 마휴당에는 사람들이 모두 와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스승님.”
“아니다, 막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하니 그리 늦은 것도 아니다. 앉거라.”
탁자에는 허진을 비롯해 다섯 장로와 군사 공효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정신이 없어 잘 몰랐지만 이렇게 허진과 마주 앉으니 확실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에는 허진의 기도가 마치 망망대해처럼 그 끝을 모를 정도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망망대해의 깊은 심연에 마치 자신이 갇힌 것처럼 느껴졌다.
허진의 기도는 여전히 잔잔하고 부드럽지만 과거와 비교해 훨씬 중압감이 크게 느껴졌다.
자신이 한층 발전할 때 허진 역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마치 허진이 묵언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안이함을 질책하는 듯했다.
마현이 잠시 침묵을 지키는 사이 식사가 차려졌고, 소소한 대화들이 오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좌중의 대화는 서서히 무거워져갔다.
“교주님, 어느덧 본교가 봉문한 지 일 년이 다 되었사옵니다.”
조심스러운 가릉의 말에 허진은 막 입에 넣으려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공 군사.”
허진이 공효를 불렀다.
“하명하시옵소서.”
“본교 내부는 어떤가?”
“아직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고 판단되옵니다.”
“그렇다면 봉문을 풀어야겠군. 본교의 안정을 위해 잠시 미뤄놨던 일도 마무리 지어야겠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허진이 고개를 들어 마현을 쳐다보았다.
“현아. 귀림과 율기에 관한 일은 네가 맡아라.”
원하던 바였다.
또한 당장 움직여야 할 일도 아니었기에 그사이 마공과 흑마법을 적절히 융화시켜 나가면 된다. 어차피 그 두 힘을 융화시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명을 받으옵니다.”
“이 일을 벌인 검림은 무림맹과 한 몸이 되었다고 하니 잠시 지켜보도록 하자.”
봉문으로 마교의 외부 활동들이 정지되었지만 중원으로 향한 귀는 늘 열어놓고 있었다. 당연히 검림과 무림맹에 관한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당장 검림을 벌하기 위해 무력을 일으키기에는 천무왕이라는 왕호가 부담스러웠다. 황실과 대척점에 서는 일만은 가급적 피해야 하므로.
“봉문을 풀 시기는…….”
그때 무영각주 마충이 마휴당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마충이 들고온 보고서는 공효를 거쳐 허진에게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 보고는 다시 마현을 거쳐 다섯 장로에게까지 전해졌다.
“남해태양궁이 북해빙궁을 친다는 소식을 접한 지 열흘이 채 되지 않았거늘…….”
허진은 적잖게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처럼 그가 놀란 이유는 바로 보고서에 있었다. 힘의 균형이 팽팽하리라 보았던 북해빙궁이 남해태양궁에게 맥없이 무너졌다.
처참한 살육으로 북해빙궁이 완전히 몰락했으며, 겨우 목숨만 부지한 몇몇이 도망쳐 조금 전 신강 내 마교의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것도 놀랄 일이지만 그보다 허진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순수한 남해태양궁의 힘만으로 북해빙궁을 무너트린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남해태양궁 뒤에 군부가 있었다는 것.
“군부라니! 어찌 남해태양궁과 북해빙궁 사이에 군부가 낄 수 있다는 소리인가?”
마현은 갑자기 설린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가슴 한편이 아렸다. 쓰린 감정은 곧 격한 목소리로 표출되었다.
“몇 달 전부터 남해태양궁주와 무림맹주 사이에 비밀스런 회동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설마 그 일이 군부를 끌어들일 회담일 줄은…….”
마현의 질타에 마충이 아닌 공효가 대답했다.
“공 군사, 말이 너무 쉽지 않은가? 그럴 줄 몰랐다 하면 끝인가? 만약 무림맹에서 군부를 동원해 본교를 친다 해도 그리 말을 할 것인가?”
마현의 반응에 공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현의 질타가 틀린 건 아니지만 솔직히 반응이 조금 과한 탓이었다.
“그만 하거라. 공 군사,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허진은 조금 과한 반응을 보이는 마현을 말리며 공효에게 의견을 물었다.
“매정하지만 본교는 아직 봉문조차 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봉문을 애써 풀면서까지 그들을 구해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또한 군부가 끼어들었다는 것은 분명 새외로 영토 확장을 꾀하려는 황제의 뜻이 배후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언젠가 치러야 할 무림맹과의 결전을 대비한다면, 군부가 끼어드는 것을 막지는 못할망정 굳이 우리가 저들에게 먼저 빌미를 줄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스…….”
다시 마현이 나서는 것을 허진이 조용히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면서 허진은 딱딱하게 굳은 마현의 얼굴을 보았다.
‘흠…….’
마현이 저리 평정을 잃은 데에는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허진은 조용히 공효와 마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공효의 말도 맞고, 마현의 손도 들어주고 싶었던 까닭이다.
“공 군사의 말대로 하지. 예정대로 본교는 한 달 후 봉문을 푼다.”
“스, 스승님…….”
“현이 너는 그동안 폐관수련으로 심신이 지쳤을 터. 어디 가까운데 외유라도 한 번 다녀오거라.”
허진의 말에 마현과 공효가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알겠습니다, 교주님.”
“감사합니다, 스승님.”
두 사람은 허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다시 허리를 펼 때 눈이 마주쳤다. 찰나지만 날카로운 눈빛이 교차되었다.
* * *
휘이이― 쏴아아아!
거대한 용오름이 황량한 땅을 휩쓸었다.
“하악, 하악! 아악!”
지칠 대로 지쳐 힘겨운 숨소리가 고통에 찬 신음으로 바뀐 것은 바로 용오름이 한바탕 몰아치고 간 후였다.
붉은 피를 뒤집어 쓴 한 인영이 무릎을 꿇었다.
바로 설린이었다.
오랜 시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상처는 곪아 있었다. 그 상처에 날카로운 모래가 스치자 쓰라린 통증에 결국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만 것이다.
“아가씨.”
그런 설린을 향해 설영대주 곤오가 허겁지겁 달려와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괜찮아요!”
곤오의 손이 부끄러울 정도로 설린은 모질게 그의 손을 뿌리치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표독스럽게 반짝였다.
“몸이 많이 축나셨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곤오는 그런 설린을 걱정하며 잠시 쉬어갈 것을 권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설린의 대답은 싸늘하기만 했다.
“곤 대주. 피로 뒤덮인 북해를 벌써 잊으…….”
차가운 말을 내뱉던 설린의 입술이 중간에 잠시 멈추더니 파르르 떨렸다.
설린은 파랗게 질린 입술을 꽉 깨물며 마음을 가다듬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셨나요? 우리의 아버지가, 형제들이, 그리고 아이들이! 남해태양궁과 명제국 군부의 손에! 갈기갈기 찢기고 능욕당하고 죽어나가 혼도 얼어붙을 저 차가운 땅에 파묻혔어요. 고작 이런 고통은 먼저 죽어나간 형제들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린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애써 펴며 다시 섰다.
“빠드득! 반드시 살아남아 남해태양궁에 똑같이 돌려주겠어요, 똑같이…….”
지나친 독기 때문일까? 아니면 중한 상처를 입은 심신 때문일까……. 그녀는 순간 정신을 잃으며 신형이 앞으로 허물어졌다.
“아가씨!”
곤오가 재빨리 앞으로 쓰러지는 설린을 감싸 안았다. 설린이 짊어진 수천수만 목숨의 무게 때문인지 유달리 그녀의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곤오는 설린을 등에 업을 수밖에 없었다.
곤오가 휴식 겸 다시 대오를 갖추고 막 그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두두두두!
저 멀리서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고, 뒤를 이어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대, 대주님!”
후미 쪽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설영대원 하나가 파리해진 얼굴로 다급히 달려왔다.
곤오도 점차 형체를 드러내는 한 무리의 인마 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인마 떼 위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는 순간 급격히 어두워졌다.
황금빛 바탕에 타오르는 붉은 태양이 그려진 깃발, 바로 남해태양궁의 깃발이 자욱한 먼지 속에서 펄럭이며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