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92화 (192/351)

# 192

17화

양위도는 그 둘을 무시하며 진필성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어서 오시오, 양 궁주.”

“처음 뵙겠소이다. 양위도올시다.”

양위도는 포권만 취하며 간략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어허, 이런 무례한!”

양위도의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태사의 옆에 있던 노인이 걸걸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하던 양위도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그 노인을 노려보았다.

“이, 이런 안하무인인 자를 보았나!”

고급 비단 장삼을 입은 노인은 양위도의 기세에 전혀 눌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날카로운 목소리로 호통을 칠뿐이었다.

“그만들 하시오.”

결국 진필성이 태사의에서 내려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했다.

“장 좌시랑(左侍郞), 양 궁주는 무림인이오. 엄격히 황실 법도를 적용하기는 어렵소. 그리고 양 궁주, 장 좌시랑 역시 조정의 사람이라 무림에 대해 잘 모르오. 그러니 양 궁주도 이해해 주시오.”

“크흠.”

비단 장삼을 입은 노인, 장제는 언짢은 듯 기침을 내뱉으며 양위도를 잠시 쏘아본 후에야 뒤로 물러났다.

반면 양위도의 얼굴은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옷을 보고 평범한 노인은 아니라 여겼지만, 그 신분이 양위도로선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엄청났다.

좌시랑이면 정3품의 조정 고위관리였다. 양위도가 제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해도 한 수 양보를 해야 할 정도로 무시할 수 없는 직책이었다.

“자자, 다들 황제 폐하를 위해 모인 것이니 처음부터 얼굴을 붉히지 맙시다.”

진필성이 제갈묘에게 눈치를 살짝 주었다.

“대전은 딱딱하니 자리를 옮기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시녀에게 시켜 차와 다과를 준비하겠습니다.”

제갈묘는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미연에 차단했다.

그렇게 자리를 옮겨 함께 앉자마자 차와 다과가 차려졌다. 하지만 동석한 이들 누구도 차나 다과를 들지 않았다. 조금 전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크흠, 아무래도 서로 인사부터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여기 계신 분은 병부(兵部)의 좌시랑이신 장제 대감이시고, 이분은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 중 전군도독부(前軍都督府)의 도독동지(都督同知)로 계신 원직 대감이십니다.”

“장제요.”

“원직이오.”

여색한 얼굴이었지만 제갈묘의 권유에 둘은 자신을 소개했다.

둘의 인사를 받자 양위도의 입안에서는 쓴맛이 맴돌았다. 장제만이 아니라 그 옆에서 그와 별반 다르지 않게 탐탁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던 장년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도독동지라 하면 정1품으로, 전군도독부의 부사령관인 까닭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면 제아무리 소림사나 무당파라도 피로 씻기는 건 시간문제일 만큼 원직이 가진 권력은 엄청났다.

“이쪽은 새외삼궁 중 하나인 남해태양궁의 궁주인 양위도이고, 옆에 있는 이 사람은 군사 창서입니다.”

양위도는 쓴맛이 감도는 침을 애써 삼키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 제갈 모가 여러분을 이리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북벌(北伐)에 관해 말씀드릴 게 있어서입니다.”

제갈묘는 어색함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그럴 바에는 최대한 빨리 용건으로 들어가는 게 그나마 어색함이 덜할 것이라 여겼다.

“남해태양궁은 북해빙궁에 원한이 있습니다.”

제갈묘의 말에 양위도는 살기가 가득한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북해 쪽에 명확한 국경선을 긋고 싶어 하십니다.”

그 말에 창서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 두 마디로 대략적인 윤곽을 잡은 것이다.

황제가 북해의 땅을 원하는지, 아니면 말 그대로 명확한 국경선을 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것 하나만은 명확했다.

조정 대신들은 북해의 땅을 황제에게 바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가뜩이나 몽고 때문에 북쪽이 바람 잘날 없는 시국이었다. 그렇기에 군부 쪽 대신들은 북서쪽 북해의 땅을 확실히 정리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창서는 아마 이 추론이 정확할 것이라 여겼다.

“그 말씀은…… 우리 남해태양궁이 북해빙궁을 칠 때 지원을 해주시겠다는 뜻으로 들어도 무방한지요?”

창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제갈묘의 대답에 양위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해태양궁으로서는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크흠!”

양위도는 생각지도 못한 조건이라는 단어에 나직하게 침음성을 삼켰고, 창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조건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창서는 농담을 하듯 편한 얼굴로 말했지만 그 속에는 숨은 가시가 있었다.

“조건은 이제 남해태양궁도 황제 폐하의 신하가 되라는 것이오.”

제갈묘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옆에 앉아 있던 장제가 칼칼한 목소리로 말했다.

“……?”

장제의 말에 창서뿐만 아니라 양위도도 눈을 부릅떴다.

“대신 그에 따르는 대가도 클 것이오.”

“남해태…….”

양위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터트렸지만 창서가 재빨리 그를 말렸다.

『궁주님, 일단 끝까지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양위도는 분기가 들끓었지만 창서의 말에 잠시 노기를 가라앉혔다.

“궁주나 군사도 알겠지만 해남도는 중원의 땅이지만 중원의 힘이 미치지 못하오. 솔직히 말하자면 방치한 땅이지. 언제라도 가질 수 있는 곳이니까.”

의외로 장제는 솔직하게 말했다.

해남도는 최남단에 위치한 섬. 그곳은 비록 일개 섬이지만 한 성으로 인정받을 만큼 거대한 땅덩어리였다. 하지만 북쪽이나 서쪽과 달리 누군가에게 빼앗길 염려가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 해남도를 주겠소.”

양위도와 창서는 너무 놀라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해남도는 남해태양궁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남해태양궁의 것이라고 말하긴 어려운 곳이었다.

“그 말씀은…… 해남성주 자리를 주겠다는 뜻이오?”

마음이 급해진 양위도가 서둘러 물었다.

하지만 양위도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장제는 조용히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오?”

“궁주님.”

격하게 반응하는 양위도를 창서가 다시 한 번 조용히 만류했다. 그로 인해 양위도가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급하고 울컥하는 성정을 잘 알기에 양위도는 창서를 대동했다. 그렇기에 양위도는 창서의 말대로 눈을 잠시 감으며 마음을 달랬다.

“비록 허울뿐이지만 성주, 정확히 관직으로 말하자면 승선포정사사(丞宣布政使司)의 자리는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소.”

“그렇다면 무슨 방도로 해남성을 남해태양궁에게 준다는 것인지……?”

창서가 조용히 물었다.

“어차피 그동안 남해태양궁은 해남도의 무력을 대변하지 않았소이까?”

“그럼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창서의 말에 장제는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 직책이 적합하겠지만, 조정의 눈들이 있어 그 자리에 제수하기는 어렵소. 하여 논의 끝에 변경에 파견되어 군사를 총괄하는 별직인 순무(巡撫) 직이 어떨까 하오. 물론 도지휘사사와 같은 정2품의 품계 또한 하사될 것이며, 남해태양궁주가 순무로 있는 한 도지휘사사의 직은 임명되지 않을 것이오.”

양위도는 장제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천성이 무인인 양위도가 관직에 대해 상세히 알 리가 없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대략적인 것은 분위기로 간파할 수 있었다.

“그, 그렇다면?”

양위도는 순간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운남성.”

“그렇소. 우리 군부는 황제 폐하께 새외삼궁 모두를 바칠 생각이오.”

“흐음!”

양위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러한 특권은 남해태양궁에만 적용되는 것이오.”

양위도는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창서에게 전음을 보냈다.

『군사의 생각은 어떤가?』

『속하가 무림맹에 관해 알아본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에 비춰 보면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만일 황실에서 칼을 빼든다면 남해태양궁으로서는 멸문까지 각오해야할 것입니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다면 무림맹처럼 든든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창서의 전음을 들으며 양위도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 양위도의 모습에 함께 자리한 이들이 모두 조용히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너무나도 좋은 조건임에는 틀림없소. 하지만 본인은 무림인으로 살고 싶소.”

양위도의 말에 두 관리는 조금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렸다. 설마 거절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맹주님도, 저도 근본은 무림인입니다. 관직이 있고, 그로 인해 황제 폐하께 충성을 서약할 뿐 제약은 없습니다.”

제갈묘가 끼어들었다.

“정말 아무런 제약이 없소?”

그 말에 양위도의 마음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양위도는 장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무림인으로 살아도 되오. 어차피 조정에서도, 황제 폐하께서도 그 이상은 원하지 않으시니까. 단, 순무의 직책을 가지면 그에 해당하는 의무는 해야 하오. 왜구로부터 신민들을 지키는 것.”

장제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대답했다.

양위도는 그런 장제를 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좋소. 그리하리다. 대신 본인에게도 조건이 있소.”

“무엇이오?”

“어쩔 수 없이 군부의 힘을 빌리나 북해빙궁을 치는 것은 우리 남해태양궁이 할 것이오.”

양위도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 * *

석관 두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석실.

석관 위, 그리고 바닥에 뽀얗게 쌓인 먼지만이 시간이 흘렀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조차 잊었다고 느낄 무렵이었다.

그극, 그그극.

석관 하나가 제 스스로 요동을 치며 돌과 돌이 갈리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 소리가 서서히 커져가며 음의 정점에 올라섰을 때였다.

콰광!

석관을 덮고 있던 뚜껑이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돌 파편들은 석실 사방 벽에 부딪히며 가루로 변했다.

뚜껑이 사라지고 난 석관 속에서 푸른빛이 살짝 감도는 새까만 손 하나가 불쑥 튀어 올라왔다. 그 손은 한동안 파르르 떨리더니 석관 위에 매달려 있는 거울을 잡아당겼다.

“나의 주인은 나!”

음산한 목소리가 석관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 시커먼 몸뚱이가 석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전라의 몸, 하지만 피부가 온통 푸른빛이 감도는 새까만 몸이어서 사람의 것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더욱이 눈동자 역시 푸른빛이 스며들어서인지 그의 모습은 더욱 괴기스럽게 보였다.

시뻘건 혀로 피처럼 붉은 입술을 핥는 그는 바로 도종극이었다.

“크하하하하하!”

도종극의 웃음이 터지자 석실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로 흔들렸다.

도종극은 오른손을 뻗어 정확히 열 달 동안 자신을 품고 있던 석관을 가리켰다. 묵빛 기류가 도종극의 손에서 뿜어져 나와 석관을 내리쳤다.

콰과광!

석관은 정말 좀 전까지의 육중한 그 석관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도 쉽게 도종극의 가벼운 손짓에 산산이 부서졌다.

도종극이 처음 석관에 몸을 눕힐 때 안에 가득 차 있던 영약과 독극물이 혼합된 액체는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액체가 모두 도종극의 몸에 흡수가 된 것이다.

“이 느낌, 너무나도 좋군.”

도종극은 내부에서 끊임없이 넘쳐 오르는 기운을 느끼며 다시 붉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러면서 도종극은 또 다른 석관으로 눈을 돌렸다.

“나의 충실한 종복을 깨워볼까? 크크크.”

도종극은 온전한 모양의 석관으로 다가가 두꺼운 뚜껑을 열고 마치 지푸라기를 걷어내듯 구석으로 휙 던져버렸다.

와당탕!

그 안에는 도종극처럼 푸른빛이 감도는 새까만 몸을 한 늙은이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바로 능자필이었다. 그 석관 역시 먹물처럼 검은 액체는 이미 능자필의 몸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것이 똑같아 보였지만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능자필의 백회혈에 꽂혀 있는 침이었다.

도종극의 몸에 꽂힌 침은 자연스레 몸에 흡수할 수 있는 금침이었지만 능자필에게는 절대로 융화될 수 없는 옥침이 박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