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13화
“할아버지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 본교가 다시금 네놈들의 발에 짓밟히는 것을 보며 죽어야 하다니…… 내 인생이 허무하고 슬플 뿐이다.”
『학식 또한 뛰어나나…… 아직 어리군.』
나이로만 따진다면 마현보다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마현이 말한 어림은 나이가 아니었다.
조금만 깊게 주위를 간파한다면 지금 이런 행동과 과정이 어수룩함을 느낄 텐데, 홀로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그런 허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헛똑똑이인 셈이다.
마현이 조용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거사를 진행하기 전 네놈을 다시 찾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마현은 의식적으로 율기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그 목소리에 공효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해서인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와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복수의 기회를 엿본다고 얄팍하게 도피를 한 내 잘못인 것을. 네놈의 칼에 목이 날아갈지언정 차라리 칼을 뽑았어야 하는 것을.”
공효는 눈을 꾹 감았다.
“죽여라.”
애들 장난 같은 허술한 납치극이었지만 마현은 공효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현은 라이트 마법을 없애며 가릉을 쳐다보았다.
“대장로, 어떤가? 쓸 만한 아이인 것 같은데…….”
그 말에 가릉 역시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갑자기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공효는 슬며시 눈을 떴다.
분노를 일깨운 율기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 않았고, 낯선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흑풍대?…… 그렇다면?”
마현은 공효의 말에 얄미울 정도로 하얀 이를 싱긋 드러내며 웃었다. 곧 그 행동이 수긍이었기에 공효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왜 억울한가?”
마현은 웃음기를 지우며 차갑게 물었다.
“아무리 내가 힘없는 교인이라고 해도…….”
“그대는 천하를 속였다.”
마현은 그런 공효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천하에서 차이고 차이는 그중 한 사람이 그대를 속였다. 뭐가 다르지?”
마현은 입꼬리를 말며 그의 뒷목을 탁탁 쳤다.
“이, 이…….”
공효는 그 자리에서 뭐라고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마현의 무거운 기운에 숨이 턱 막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평생 술로 세월을 허비했으니 남은 인생은 술 먹을 시간조차 잊을 정도로 바쁘게 해주지.”
마현은 가릉에게 고개를 돌렸다.
“교육만 잘 시키면 제법 쓸 만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사이 왕귀진이 의자에 묶인 그의 몸을 풀어주었다.
“내 언젠가 소교주의 얼굴에 주먹을 꽂을 것이오.”
“능력만 된다면야, 주먹이 아니라 검도 받아주지.”
마현은 뺨을 씰룩거리는 공효를 보며 다시금 입술을 말아올렸다.
* * *
“이제 바쁜 일은 다 처리했느냐?”
허진이 서탁 위에 올려놓은 초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예, 스승님.”
마현은 촛불을 밝히고 자리에 앉는 허진을 보며 대답했다.
둘이 이렇게 편한 시간을 갖는 것도 근 보름 만이었다.
허진은 허진대로 교주 자리에 올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고, 마현은 마현대로 네 장로를 팬텀 나이트로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제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허진은 마현의 대답을 듣고 두툼한 한 권의 서책을 내밀었다.
“흠.”
마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유는 서책 위에 웅장하고 강한 힘이 느껴지는 필채로 써진 네 글자의 제목 때문이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스승님, 이건?”
마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허진을 쳐다보았다.
“교주에 오르니 자연스레 따라오더구나.”
허진은 어색한 웃음을 살짝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도 잠시, 허진의 표정은 근엄하게 바뀌었다.
“원래는 네게 이 스승의 무공을 가르치려 했다.”
그 말에 마현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하지만 이 스승 손에 천마신공이 들어왔다. 그래서 네게 이 천마신공을 가르칠 것이다.”
천마신공 무공서를 잠시 쳐다보고 있던 마현의 눈동자가 급격히 커지며 허진에게 향했다.
“스승님.”
저도 모르게 마현은 허진을 불렀다.
천마신공 전수에 대한 놀라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마현이 원하는 것은 천마신공이 아닌 허진의 마라역천공이었다.
허진이 교주 자리에 올랐기에 마현의 마음 한편이 많이 편해졌다.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르센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까닭이다.
율기, 그리고 그와 연관된 검림에 관한 일만 마무리가 된 후 마현은 본격적으로 하르센 대륙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렇기에 마현이 원한 것은 마라역천공이었다.
허진이 말한 것처럼 자신에게 부족하고, 이제껏 등한시해왔던 무공을 메우기에는 마라역천공이 적격이었다.
물론 고금 제일의 무공이라고 일컬어지는 천마신공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마현에게 있어 지금부터 허진에게 배울 무공은 단순히 무공의 의미가 아니었다.
무공의 의미를 넘어 허진의 체취를 갖고 싶은 것이다.
그 이유는 하르센 대륙으로 돌아간다면 어쩌면 다시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허진의 전부인 마라역천공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스승님.”
마현은 무거운 음성으로 허진을 불렀다.
허진이 자신의 과거를 알기에 어쩌면 어렴풋이 자신이 떠날 거라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솔직히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아니 어쩌면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마현의 음성이 달라지자 허진의 표정 또한 조금은 굳어졌다.
“이 제자는 천마신공이 아닌 마라역천공을 제대로 전수받고 싶습니다.”
“천마신공을 마다하고 마라역천공을 배우고 싶다는 속내를 알 수 있겠느냐?”
허진은 마현의 굳어진 얼굴을 보며 그 속내를 알아차렸다.
어렴풋 짐작만 하고 있던 불안감이 떠올랐고, 그로 인해 목소리는 한층 무거워졌다.
“이 제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마현의 말에 허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해야 할 일이 그 복수더냐?”
그로 인해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는 더욱 침중해졌다.
“예.”
마현의 대답으로 둘 사이에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다.
“이 일이 마무리가 되면…….”
그저 먼 일이라고 느낀 이별이 갑작스레 코앞으로 다가온 듯해 마현의 코끝이 찡해지며 목소리가 잠겼다. 그래서 마현은 말을 끊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르센 대륙으로 가는 방도를 찾을까 합니다.”
“…….”
허진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다른 세상입니다. 어쩌면 가는 방법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간다면 다시 돌아…….”
마현은 다시 마음이 울렁거리며 목이 잠기자 말을 잠시 끊었다. 겨우겨우 마음을 달랜 후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스승님.”
마현의 말에 허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흔들리는 감정을 보여주기 싫은 탓이다.
“그래서 천마신공이 아닌 스승님의 무공을 전수받고 싶습니다. 아니 제 몸에 각인시키고 싶습니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허진은 조용히 눈을 떠 마현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마현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제자 그리하고 싶습니다.”
그런 마현의 모습에 허진의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왔다.
잠잠해진 것이 아니었다. 애써 모른 척 억눌렀을 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이 찢어져도 어쩌겠는가?
기구한 삶을 산 마현을 제자로 받은 자신의 팔자이거늘.
“한 가지 약속을 하거라.”
“……?”
“다시 돌아와 이 스승의 뒤를 잇겠다고 약속하거라.”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꼭 돌아오겠습니다.”
“흐음!”
마음의 쓰라림이 조금 가시자 허진은 큰 숨을 내쉬며 아픈 가슴을 달랬다.
“그래, 마라역천공 역시 천마신공에 결코 뒤지지 않는 마공이다. 내일부터 친히 너에게 마라역천공을 전수해 주겠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자신의 뜻을 받아준 허진의 호탕한 대답에 고개를 숙인 마현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 * *
이른 아침, 아직까지 정식으로 천무왕부라는 호칭을 얻지 못한 무림성 정문 앞에 사두마차와 서른 명가량의 인마가 있었다.
바로 북경 자금성, 당금의 황제를 알현하기 위한 행차였다.
관과 무림 사이의 암묵적인 불가침 관계로 인해 무림맹주 정도라면 능히 팔두마차를 타도 되지만 지금은 다르다. 황제의 신하가 되기 위해 가는 행차였다.
그런 신분으로 팔두마차를 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또한 푸른 무복으로 통일한 청천대 역시 각자의 무구들을 얇은 한지로 가린 상태였다. 하지만 금방 찢을 수 있는 한지로 가렸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무구를 뽑을 수 있게 해놓았다.
그렇게 자금성으로 갈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무림맹 주요 인사들이 정문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전날 무림성에 도착한 오파일방과 남궁세가를 제외한 오대세가의 가주들과 장문인들이었다. 진필성과 제갈묘를 배웅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좀처럼 감추지 못하는 화색이 감돌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 둘과 동행하는 금대치에게 있었다.
진필성과 제갈묘가 소화산에서 있었던 일을 감추고, 혹여나 드러나게 되더라도 유야무야 무마시키기 위해 금대치로 하여금 수만금을 그들에게 푼 까닭이었다.
자금이 부족하지 않는 문파는 문파대로 여유 자금이 생겨 좋고, 자금이 부족한 문파는 그 부족함이 단번에 메워지니 좋은 것이다.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맹주님. 그리고 감사합니다, 금 장로님.”
수뇌들은 전보다 더 친근한 목소리로 진필성과 금대치에게 인사했다.
“언제든지 어려운 점이 있으면 여기 계신 맹주님과 군사께 언질을 넣으시면 이 금 모 언제든지 힘을 보태드리겠습니다.”
“아이고,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금 장로님.”
특히 종남파의 곡상천과 청성파의 청허자가 ‘금 장로’라는 호칭에 힘을 줘 애써 한 식구임을 강조했다.
그런 모습을 금대치 역시 은연 중 즐기는 듯하자 사천당문을 제외한 다른 네 세가의 가주들 역시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소.”
금대치가 결국 먼저 마차에 타고 나서야 그 소란이 사라졌다. 이어 진필성과 제갈묘가 마차에 올랐다.
“가자!”
청천대의 대주를 맡은 학방이 소리치자 사두마차와 서른 명의 청천대는 속도를 내 무림성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눈에서 사라지자 무림맹 수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무림성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후미에서 조용히 그들을 배웅한 우검 호법 역시 무림성 안으로 막 발걸음을 뗄 때였다.
“저기, 어르신.”
때가 꼬질꼬질한 거지 행색의 낯선 꼬마 하나가 우검 호법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어르신 성함이 후동관 맞나요?”
아이의 말에 우검 호법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은 까닭이다.
“누가 보내서 왔느냐?”
우검 호법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 모습에 아이는 겁을 먹은 듯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웬 아저씨가 이, 이걸 전해드리라고…….”
아이는 말을 더듬으며 품에서 한 장의 쪽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뒷걸음질 치며 우검 호법의 손에 던지듯 건네고는 쪼르르 도망을 가 버렸다.
“흠…….”
우검 호법은 재빨리 쪽지를 펼쳐들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무슨 일인가?”
그때 좌검 호법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