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4화
기다렸다는 듯이 마현의 입가에 다시금 차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마현의 시선 끝에 걸린 마휴당에서 회색빛 한 줄기가 지붕 위로 치솟더니, 자신이 서 있는 마주전 앞마당으로 다시 이어졌다.
누군지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안다.
바로 귀림주일 것이다.
그의 것이라 예상되는 회색빛 한 줄기가 하늘로 치솟더니 도종극이 있는 곳으로 툭 떨어졌다.
콰과광!
귀가 먹먹할 정도의 엄청난 폭음과 함께 수십 구의 언데드들이 갈가리 찢겨지며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그렇게 삼 장가량 만들어진 빈 공간 중앙에 피떡이 된 채 힘없이 쓰러져 있는 도종극과 귀기가 흐르는 피골이 상접한 장년인 능자필이 서 있었다.
능자필은 마현을 잠시 노려보는가 싶더니 분기 어린 눈빛을 뿜어대며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고 있는 도종극을 내려다보았다.
“네놈의 큰소리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능자필은 발을 들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도종극의 머리를 다시 밟아 눌렀다.
“크으으.”
도종극은 능자필의 발에 짓눌려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꺄아아아!
그때 듀라한 한 구가 괴성을 지르며 능자필에게로 달려들었다.
“클클클.”
능자필에게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듀라한을 쳐다보는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고, 두 눈에서는 흉폭한 광망이 터져 나왔다.
팡!
신음하는 도종극의 몸에 강력한 내력을 실으며 능자필이 듀라한을 향해 걷어찼다.
“컥!”
도종극은 그 충격에 짧지만 무거운 신음을 다시금 토해내며 검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듀라한에게로 날아갔다.
쾅!
도종극의 몸이 듀라한의 복부에 꽂혔다. 곧 듀라한은 흡사 벽력탄을 삼키고 터진 것처럼 몸이 분쇄되어 버렸다. 그때 좀비 두 구가 능자필의 등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능자필은 가볍게 몸을 옆으로 틀며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는 도종극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마치 자석에라도 끌린 것처럼 도종극은 능자필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공섭물의 극을 보여주는 한 수였다.
단지 그것만이라면 능자필의 무위에 순수하게 감탄을 터트릴 수 있었지만, 이어지는 후수에 마현은 눈매를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잡아당긴 도종극을 능자필은 후미에서 달려드는 두 좀비에게로 다시 날려버린 것이다.
퍼벙, 퍼버벙!
그렇게 도종극의 몸에 의해 두 좀비의 몸 역시 폭발하듯이 분쇄되어 버렸다.
“클클클, 그래도 제자라고 쓸모는 있구나.”
능자필은 도종극을 자신 앞으로 당겨와 다시 발로 찍어 누르며 간악한 웃음을 터트렸다.
마현은 그 모습에 살기가 치솟아 올랐다.
도종극은 자신에게 있어서 죽여야 될 자이지만 능자필에게는 다름 아닌 제자였다. 그런 제자를 하나의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 과거 스승이었던 백마법사들을 떠올리게 했다.
마현은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과거 하르센 대륙에서 자신을 죽일 때 쳐다보던,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지우지 않았던 여섯 백마법사들의 경멸 어린 눈빛이 하염없이 떠올랐다.
“그 발 치우라.”
마현의 목소리에는 섬뜩한 살의가 담겨 있었다.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현의 말에 능자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가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 집에서 키우던 개도 그리하지 않거늘, 하물며…….”
이어지는 마현의 목소리에 능자필의 입언저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도종극을 누르고 있는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크으으!”
그러자 도종극의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크크크.”
능자필은 더욱 짙어지는 마현의 살기를 느끼자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능자필은 인광(燐光)을 마현에게 쏟아내며 입술을 오므렸다.
“히이이……, 이히히히히!”
이어 능자필의 입에서 귀곡성이 흘러나왔다. 그 귀소(鬼笑)는 사방으로 퍼지지 않고 마현에게로 집중되었다. 마현은 순간 현기증을 느끼고 재빨리 마력으로 귀를 닫았다. 하지만 그 귀소는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귀소에 마현은 음파차단 마법까지 펼쳤지만 소용없었다. 귀소는 엄밀히 말하면 소리가 아닌 까닭이다. 현기증이 심해지자 갑자기 눈까지 침침해졌다.
마현은 눈을 질끈 감은 후 머리를 털며 다시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마주전 앞마당에는 능자필이 아닌 하얀 로브를 입은 한 늙은이가 서 있었다. 자신을 키워준 여섯 백마법사 중에 은연중 수장 자리를 맡고 있던 이베른이었다.
“네, 네 놈이 어떻게 여기에?”
마현은 너무 놀라 말을 살짝 더듬으면서도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살의가 가득한 마현의 언어는 하르센 대륙의 공통어였다.
“네놈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몰라도, 내 사지를 찢어 그 피로 목욕하고 살점으로 배를 채우겠다!”
혼미한 상태에서 치솟은 살기는 마현의 이성을 잠식했다.
“이히히히히히히!”
능자필은 귀소를 더욱 높이며 도종극의 배를 발로 차 마현이 떠 있는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사랑하는 제자야, 이 스승은 너를 죽이고 싶지 않구나. 그러려면 그 녀석을 죽여야겠지?』
능자필은 전음으로 죽어가는 도종극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면서 능자필은 귀소에 더욱 강한 귀력을 담았다.
마현은 능자필의 발길질에 날아오는 도종극을 보며 눈을 비볐다.
분명 도종극인데, 마현의 눈에는 자신이 날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마현은 얼떨결에 자신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쐐애애액!
조금씩 자신의 얼굴이 흐려지더니 그 속에서 도종극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도종극은 무방비 상태인 마현의 가슴과 복부를 향해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 날카로운 조수를 휘갈겼다.
서걱!
가슴에서 배까지 네 줄기의 긴 상처가 만들어지며 피가 뿜어졌다.
마현은 순수한 마력을 주먹에 담아 마지막 귀력까지 모두 다 사용한 후 축 늘어지는 도종극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도종극은 발악 한번 못한 채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콰당!
마현은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무기력하게 쓰러져 꿈틀거리는 도종극을 무시하며 능자필인지, 아니면 이베른인지 모를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종극의 조수에 당한 깊은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흘러 하의까지 적셨지만 마현은 그를 향해 살기가 담긴 마기만을 폭출시킬 뿐이었다.
그렇게 치솟은 지독한 마기는 마현의 뇌까지 집어삼켰다.
“으아아아!”
양팔을 벌리며 소리를 지르는 마현의 몸에서 이제껏 보지 못했던 엄청난 마기가 폭사되었다.
“죽이리라!”
마현의 얼굴에서 아수라의 형상이 튀어나왔다.
악마의 얼굴로 변한 마현의 눈동자는 핏물이 들어찬 것처럼 붉었다.
* * *
“거참.”
허진은 멋쩍은 음성을 터트렸다.
본교로 오면서 죽음까지 불사할 생각으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허진은 정작 별다른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두 손을 놀린 채 구경만 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상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흐뭇한 눈빛으로 마주전이 내려다보이는 저 허공에서 하늘마저 울려버릴 듯한 쩌렁쩌렁한 소리로 호령하는 마현의 등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허진은 자연스레 마주전에서 고개를 돌려 마휴당 쪽을 바라보았다.
어렴풋하지만 짙은 귀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귀기를 흘릴만한 자는 분명 귀림주일 거라 판단했다. 피폐해진 교주 사공소를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요절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허진은 피어오르는 살기를 조용히 묻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무위를 드러낸 마현 때문이었다.
대략적으로 현재 마현이 보여준 무력이라면 그 나이 또래 후기지수는 말할 것도 없고 천하에서 적수를 찾는다 해도 열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허진은 그런 마현의 무력을 보며 희열을 이기지 못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평생의 소원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는 까닭이다.
‘이것으로 현이는 소교주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허진은 조용히 주먹을 힘주어 말아 쥐었다.
그때 예상한 대로 마휴당에서 한 인영이 나섰다.
쉽지는 않겠지만 마현이 능히 그를 제압할 것이라 여겼다. 아니 꼭 마현이 귀림주를 제압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특별히 마현이 위험에 빠지지 않는 이상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한순간이었다.
귀림주가 무슨 꼼수를 부린다고 느낀 그 순간 마현이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다.
“으아아아!”
폭주하는 마현을 보자 허진은 터질 듯한 심장을 느끼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허진은 허공답보의 경신법으로 마현 앞에 섰을 때 머리를 꿰뚫으며 들어오는 기묘한 음에 현기증을 느끼며 신형을 휘청거렸고, 그로 인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이내 허진은 침착하게 마력으로 머리를 보호하며 다시 계단을 밟듯이 마현 앞으로 올라섰다.
‘귀극환혼사심소(鬼極幻魂死心笑)? 어찌 오백여 년 전 실전된 귀극환혼사심소가 저자의 손에 있단 말인가?’
귀극환혼사심소는 오백여 년 전 정파뿐만 아니라 마교에서도 악인으로 낙인이 찍혀 당시 마교 교주의 손에 명을 달리한 악소음마(惡笑陰魔)의 절기였다.
그렇게 마교의 손에 귀극환혼사심소가 쥐여졌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악독한 비급서여서 마교에서도 불에 태워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런 귀극환혼사심소가 다시 세상에 나타났으니 허진이 놀랄 만도 했다.
왜 마현이 갑자기 심마에 빠진 것인지 알아차렸다. 동시에 자책감도 들었다.
‘현이의 능력과 힘에 내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구나.’
마현이 무공을 착실히 익혔더라면 지금의 능력으로 충분히 귀극환혼사심소에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핑―!
허진은 마현이 더 이상 심마에 빠지지 않게 귀극환혼사심소를 막아서며 수혈을 짚었다. 그러자 귀림주는 좁쌀보다 작은 귀력을 암기 삼아 마현의 미간을 향해 쏘았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고 빨랐지만 허진은 결코 그 지강을 무시하지 않았다. 지강의 크기가 작을수록 더욱 무섭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압!”
허진은 수혈을 짚어 무너지는 마현의 몸을 한 손으로 안으며 몸을 돌렸다.
푹!
능자필의 지강은 여지없이 반탄강기를 꿰뚫은 것도 모자라 허진의 어깨까지 관통했다. 엄청난 고통이 뒤따름에도 불구하고 허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능자필을 노려보며 꿋꿋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그 모습에 능자필은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다시금 허진의 심장을 향해 지강을 쏘아 보냈다.
허진은 왼손을 들어 날아오는 지강을 손등으로 후려쳤다.
펑― 콰광!
허진의 손에 궤도가 꺾인 강기는 애꿎은 장판석 하나만 박살내며 사라졌다.
“유령대주, 현이를 보호하라.”
허진은 능자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하강우를 불렀다.
“본좌에게 맡겨.”
그러는 사이 한껏 어두워진 목소리로 흑도가 허공으로 튀어 올라와 허진의 손에서 마현을 받아들었다.
흑도가 마현을 데리고 바닥에 내려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세 흑사신이 사방을 점하며 호법을 섰고, 그 주위를 유령대가 에워쌌다.
그제야 허진은 몸을 앞으로 튕겨 능자필 앞으로 내려섰다.
“네놈만 죽이면 되는 건가? 낄낄낄.”
능자필은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토해내며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는 용수철처럼 몸을 튕기며 더욱 날카로워진 회색 손톱, 조수를 허진의 목젖을 향해 휘둘렀다.
‘귀곡귀조?’
바로 앞에서 보니 도종극과 사혼마령들이 펼치던 무공의 정체가 구류귀혼공의 귀곡귀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구류귀혼공 역시 사백여 년 전 구류귀마(九流鬼魔)의 독문무공으로 금마공이었다. 하지만 다른 금마공과 달리 구류귀혼공 자체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이 마공을 만든 구류귀마에게 있었다.
그는 인육을 즐겨먹고, 살인을 즐긴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
그 때문에 금마공으로 치부된 마공이었다.
쐐애애액!
허진은 자신의 목젖을 노리고 들어오는 능자필의 조수를 보며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 피했다. 그로 인해 능자필의 등쪽 어깨와 후두(後頭)가 허점으로 드러났다.
그 허점을 보는 순간 허진의 눈에서 마기가 폭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