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2화
세 척의 거리는 의도된 것이 분명했다.
대사혼마령이 지배하는 공간은 두 척 반.
조금 전 죽음을 당한 사혼마령처럼 반걸음을 유도하고 있었다.
대사혼마령이 그런 심증을 굳힌 이유는 자신을 벗어나 다른 사혼마령과 강시들과의 거리는 세 척이 아니라 두 척 반인 까닭이었다.
즉, 자신들은 완벽하게 원진을 구성하고 있는데 강시들은 자신이 서 있는 부분이 움푹 일그러진 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사혼마령은 고개를 들어 허공에 떠 있는 마현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그 아래 포진하고 있는 흑사신들을 쳐다보았다.
단숨에 강시들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다시 부리는 자들이 바로 저들이었다.
“으아아악!”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대사혼마령이 서 있는 원진의 반대쪽에서도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들 무조건 자리를 지키란 말이다!”
하지만 대사혼마령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사혼마령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익!”
대사혼마령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느낀 대사혼마령은 후미에 서 있는 사혼마령을 자신의 자리로 잡아당기며 도종극과 대고루귀령이 있는 원진 안으로 몸을 날렸다.
“으아아악!”
그 사이에 대사혼마령이 메운 원진 반대쪽에서도 한 사혼마령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고루귀령! 당신네들이 만든 강시들이 아닌가? 어떻게 좀 해보란 말이오!”
대사혼마령이 대고루귀령에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다그쳤다. 하지만 그를 몰아붙이는 이는 대사혼마령 뿐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강시들을 어떻게 만들었기에 저들이 우리를 공격하느냐 말이다!”
도종극 역시 대사혼마령과 합세해 노기로 가득 차 소리를 빽빽 질렀다.
그 둘의 말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대고루귀령의 회색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귀림의 가장 큰 힘은 귀림주 능자필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힘의 핵심은 강시들이었다. 그렇기에 귀림에서 대고루귀령의 위치는 대사혼마령보다 높고, 소림주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막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로서는 당연히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자존심이 구겨졌다.
아니 이미 강시들이 통제에서 벗어나 귀기와 귀성을 자신들에게로 돌렸을 때 이미 자존심이 상했었다.
하지만 울컥하는 분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사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에 그저 눈두덩이만 씰룩거리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이다.”
대고루귀령은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품에서 피처럼 붉은 피리를 꺼내들었다.
“고루마령들은 제혼적성적령진(啼魂笛聲笛聲陣)을 구성하라!”
고루귀령들은 대고루귀령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원진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대고루귀령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대고루귀령이 꺼내든 적색 피리는 단지 강시들을 통제하는데 쓰이는 매개체만이 아니다. 적색 피리에서 만들어지는 소리 없는 귀음은 강시들의 통제를 원활하게 유도하지만 만일 강시들이 통제를 벗어난다면 그 즉시 사멸시키는 사음(死音)이 되어버린다.
거기에 피리에 귀음의 파장을 더욱 증폭시키는 제혼적성적령진까지 함께 펼치려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자신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것으로써 장차 가장 큰 힘이 되어줄 강시들을 허무하게 소멸시키는 것이지만, 사실 지금으로선 그것 말고는 더 이상 방법은 없었다.
대고루귀령이 어떤 일을 벌이려는지 도종극과 대사혼마령은 알았기에 그들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둘 역시 그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대고루귀령을 막지는 못했다.
“젠장!”
도종극은 애꿎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허공에 떠 있는 마현을 쳐다보았다.
분노로 가득한 감정이 도종극의 눈동자에 떠올랐다. 입술을 자근자근 씹는 도종극의 뺨은 분기로 인해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대고루귀령을 중심으로 겹겹이 원진을 구성해 자리를 잡은 고루귀령들은 박자에 맞춰 일제히 귀력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이백의 파장이 서로 섞여 하나의 거대한 파장을 만들며 대고루귀령에게로 집중되었다.
그 파장을 흡수한 대고루귀령의 몸이 석 자가량 허공으로 떠올랐다. 대고루귀령은 눈을 감은 채 그 파장을 흡수하며 자신의 귀력을 이용해 적색 피리에 불어넣었다.
우우웅!
그러자 적색 피리가 사시나무처럼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번쩍!
대고루귀령이 감았던 눈을 뜨자 엄청난 귀광이 터져 나왔고, 부르르 떨리던 적색 피리는 순간 떨림이 사라졌다. 그 순간 어마어마한 파장이 주위로 퍼져나갔다.
―캬캬, 캬아아아!
그 파장에 좀비와 듀라한들은 거센 폭풍에 휩싸인 듯 석단 아래 장판석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그리고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마치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몸을 떨어댔다.
―꺄아!
―캬아아.
괴로운 듯 언데드들은 장판석에 나뒹굴며 비명을 질러댔다.
인위적인 기운에 민감한 마현은 대고루귀령을 통해 흘러나오는 파장에 눈살을 찌푸렸다.
“사운드 아이설레이션!”
마현은 마력을 뿜어 음파차단 마법을 이용해 원진을 이룬 귀림을 에워쌌다.
적색 피리와 제혼적성적령진을 통해 증폭되는 음파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제혼적성적령진을 통해 증폭되는 적색 피리의 음파는 생각보다 더욱 강력했다.
쩌적 쩌저적!
보통 무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마현은 보았다.
대고루귀령이 적색 피리로 만들어낸 파장이 마현이 친 음파차단 마법에 의한 무형의 막을 깨트리고 있음을.
“스트랭션(Strengthen)!”
음파차단 마법으로 일으킨 무형의 막을 몇 번이나 강화시키고 나서야 어렵사리 대고루귀령과 고루귀령들이 만들어낸 음파를 차단할 수 있었다.
“누가 나서겠나?”
마현이 네 흑사신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묻긴 왜 물어? 당연히 본좌지.”
흑사신 넷 중에 가장 호전적인 흑도가 먼저 나섰다.
마현은 플라이 마법으로 흑도를 자신이 서 있는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흑도가 다스리는 군대가 된 오백 구의 철골강시와 백스물다섯 구의 묵혈강시를 염력 마법인 싸이코키니시스(Psychokinesis) 마법으로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아직까지 7서클인 마현으로서는 이 정도 많은 수를 들어올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흑도가 강시들의 움직임을 완벽히 통제했기에 큰 무리 없이 허공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흑풍대는 아래를 맡으라!”
마현의 명에 흑풍대의 움직임도 부산해졌다.
언데드 뒤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검은 스켈레톤들이 땅 속으로 푹푹 사라졌다. 그 사이 마현은 언데드들을 원진을 구성한 귀림의 머리 위로 옮겼다.
마현은 언데드들을 허공에 띄운 채 귀림 쪽을 바라보았다. 대고루귀령의 멱살을 잡고 있는 도종극이 보였다. 마현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도종극은 대고루귀령의 멱살을 거칠게 놓으며 분노를 참지 못해 한쪽 뺨을 씰룩거렸다.
마현은 그런 도종극을 내려다보며 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이…….”
도종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기에 찬 모습으로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보였지만 마현은 무시하며 흑풍대와 흑사신을 향해 목소리에 내력을 담아 소리쳤다.
“피의 축제를 시작한다!”
마현의 목소리가 마주전과 그 앞 넓은 마당을 쩌렁쩌렁 뒤흔들었다.
“와아아아아!”
“우와아아아!”
흑풍대의 함성이 터졌다.
―캬아아아!
―꺄아아아!
그 기운에 동화된 언데드들까지 귀성을 터트렸다.
“가라!”
마현의 차가운 미소가 사라지고 냉혹한 눈동자만 남자, 허공에 떠 있는 오백 구가 훨씬 넘는 언데드들이 귀림의 머리 위로 소나기처럼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강시들이 자신의 머리 위에 뜨자 도종극은 분노를 터트리며 제혼적성적령진 중앙에 앉아 있는 대고루귀령 앞으로 걸어가 멱살을 쥐며 얼굴을 바싹 잡아당겼다.
“네놈들이 만든 강시가 아니더냐!”
도종극이 마구 몸을 흔들었지만 대고루귀령의 불신이 가득 찬 눈동자는 멍한 채 초점조차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황망히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어떻게…….”
평생 음지에 몸을 숨긴 채 강시 제조와 강시를 다스리는 조혼강술에 매달려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있어 제혼적성적령진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 피를 토하고 살을 오려내는 아픔까지 느끼며 강시를 소멸시키는 제혼적성적령진을 펼쳤었다.
제혼적성적령진은 그에게 있어 절대로 깨질 수 없는 대법이었다.
그런데 깨졌다.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대고루귀령은 강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비록 강시술이 귀림주 능자필에게 전수받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강시와 조혼강술은 자신의 자랑이자 모든 것이었다.
도종극은 마현의 시선이 느껴지자 대고루귀령을 억세게 밀치며 고개를 틀었다. 그때 허공에 떠 있던 언데드들이 원진 안으로 툭 떨어졌다.
그러자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순간 원진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아수라장은 피로 덧칠해졌다.
푸학!
피가 튀고, 살점이 튀었다.
“으아아악!”
가장 먼저 터져 나온 비명은 고루귀령들의 것이었다.
사혼마령과 달리 고루귀령들의 무공은 일천했다. 그렇기에 언데드들의 가장 손쉬운 먹이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믿을 수 없어, 히히히히.”
자신이 만든 강시들에 의해 제자나 다름없는 고루귀령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대고루귀령은 실성한 사람처럼 실실 웃었다. 그러더니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찔렀다.
“히히히, 으하하하하!”
두 눈에 피가 철철 흘러내렸지만 대고루귀령은 오히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짙은 피 냄새 때문일까. 대고루귀령 주위에 있던 언데드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캬아아아!
그리고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대고루귀령을 향해 몸을 날렸다. 떼로 몰려드는 좀비들에 의해 쓰러진 대고루귀령의 몸 위로 좀비들이 아귀처럼 새까맣게 달라붙었다.
그렇게 좀비들로 만들어진 자그만 봉분 아래 장판석으로 대고루귀령의 것이라 여겨지는 붉은 피가 넓게 퍼져나갔다.
“으아아악!”
대고루귀령 곁에 모여 있던 고루귀령들의 비명소리 또한 일제히 터져 나왔다.
오로지 본능만 살아 있는 언데드들에게 있어 고루귀령보다 더 좋은 먹잇감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데드들의 입장일 뿐 도종극과 사혼마령들에게는 달랐다.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그들은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 아니라 한 발 더 나가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아무 쓸모없는 놈들!”
도종극은 그의 진정한 독문무공인 구류귀혼공(九流鬼魂功)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거치적거리는 근처 몇몇 고루귀령들을 발로 쳐냈다.
“오늘 네놈의 명줄을 기필코 베어 버리겠다!”
허공에 떠 있는 마현을 향해 일갈을 터트리는 도종극의 몸에서 짙은 회색빛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눈동자 또한 흰색과 검정색이 사라지고 온통 회색으로 바뀌었다.
도종극은 허공에 떠 있는 마현을 향해 일갈을 터트리며 사방으로 떨어진 강시들을 향해 손가락을 구부려 날카롭게 만들었다.
―캬아아아!
강시들은 그런 도종극을 향해 귀성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그때 도종극의 신형이 사라졌다.
콰득! 서걱!
도종극을 향해 달려들던 강시들, 좀비 네 구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딱 멈췄다. 그런 좀비들의 온몸에 긴 선들이 거미줄처럼 그려졌다.
투둑 툭 툭!
좀비들의 몸은 조각조각 갈라지더니 몇 십 개의 고깃덩이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사혼마령, 고루귀령들은 포기한다. 마주전 지붕으로 오르라!”
이대로 가다간 모두가 당한다고 판단한 도종극은 강시들이 오를 수 없는 곳으로 마주전 지붕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