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21화
“역시 내 제자답구나.”
능자필은 귀한 보물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도종극을 풀어주었다.
그 둘의 모습에 율기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율기의 모습을 본 능자필이 도종극을 옆으로 밀치고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뒷짐을 졌다.
“험, 험험.”
율기는 능자필과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내뱉으며 슬쩍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끼긱 끽끽 끼이익!
능자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길어진 회색 손톱을 오므려 손바닥 안을 마구 긁었다. 흡사 날카로운 못이 강철판을 긁어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만들어졌다.
그 소리에도 율기는 못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바, 반드시 제자 스승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그 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착각한 도종극이 바닥에 엎드려 바르르 떨며 있는 힘껏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도종극이 이렇게까지 낮게 엎드리는 것은 능자필이 이런 소리를 내는 것이 상당히 마음이 언짢아졌다는 뜻이고, 그 후에는 십중팔구 꼭 피를 보았기 때문이다.
“림주님!”
그때 방문이 활짝 열리며 마교의 사장로이자 귀림의 간세였던 흑살거부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능자필의 가슴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살기가 튀어나와 흑살거부를 덮쳤다. 그러자 흑살거부는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 이공자 사, 사공찬이 대장로 혈월마성을 대동한 채 교주님을 뵈어야겠다고…… 마, 마주전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야.”
능자필은 바싹 엎드려 있는 도종극 앞으로 쪼그려 앉아 그의 머리를 긴 회색 손톱으로 쓰다듬었다.
“예, 예, 스승님.”
“이 스승이 말이다. 어서 빨리 당당하게 마교의 태사의에 앉고 싶구나. 어차피 내가 앉아야 너도 앉게 되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그래, 그럼 나가 봐.”
능자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율기를 쳐다보았다.
“내 제자가 며칠 내로 태사의에 앉혀 준다니 마주전은 다음에 가지.”
능자필은 히죽 입술을 벌리며 웃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 대답하는 율기를 향해 능자필은 귀신처럼 소리 없이 다가갔다.
“그리고 율 군사. 조심해. 난 검림주하고 달라.”
능자필은 율기의 뺨을 톡톡 두들기고는 사공소가 사용하던 침소로 들어갔다.
율기는 그런 그의 등을 보며 또다시 비릿하게 웃었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서는 은은한 황금색이 맴돌다 사라졌다.
한편 마휴당을 벗어난 도종극은 목 언저리 옷깃을 손가락으로 느슨하게 만들었다.
“휴우.”
마치 물속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처럼 막혔던 숨을 터트리는 도종극의 얼굴과 목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빠드득.
도종극은 땀을 식히며 고개를 돌려 마휴당을 향해 이를 갈았다.
“흑살거부.”
“예, 소림주.”
“아직까지는 보는 눈이 많다.”
“죄, 죄송합니다. 소교주님.”
도종극은 애꿎은 흑살거부에게 화풀이를 하듯 살기를 일으켰다.
“아직도 못 찾은 것이냐?”
“며, 면목이 없습니다.”
“분명 마현 그놈이 골강시 삼백 구를 가지고 교를 떠나지 않았어. 그렇다면 교 내부 어디에 삼백 구의 골강시를 숨겨두었다는 뜻인데…….”
도종극은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마의당 내 어디이거나, 아니면 부마전에 숨겨두었을 확률이 큰 듯싶습니다.”
“하긴, 아직까지 그 두 곳은 살펴보지 못했으니.”
도종극은 애써 살기를 거두며 흑살거부에게 명을 내렸다.
“고루귀령과 사혼마령을 모두 소집하라.”
“고, 고루귀령까지 말씀이십니까?”
귀림의 세력이 마교에 잠입해 삼공자의 직속 무력단체로 성공적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혼마령이라는 귀공(鬼功)을 익힌 귀인(鬼人)들이지 고루귀령은 아니었다.
고루귀령은 엄밀히 말해 무인이 아니었다.
물론 귀림의 귀공을 익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한 몸 지키기 위한 미미한 수준이었다. 고루귀령의 진정한 힘은 강시들이었다. 즉, 고루귀령은 강시를 조종하는 시술자인 것이다.
흑살거부가 이처럼 놀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고루귀령이 나선다는 것은 귀림의 숨은 힘인 강시를 전면으로 내세운다는 뜻인 것이다.
“그 말씀은……?”
“길게 끌어봐야 좋을 것이 없다. 압도적인 힘으로 이공자와 대공자 측을 모두 숙청시키는 것과 동시에 교를 완벽히 장악해야지. 현재 철골강시와 묵혈강시가 몇 구씩 있지?”
“묵혈강시는 현재 오백 구가 있고, 철골강시는 이천 구 정도 있습니다.”
“그만하면 단숨에 교의 주인을 바꿀 수 있겠군.”
도종극은 고개를 끄덕인 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소림주님.”
그사이 율기도 마휴당을 나와 도종극과 흑살거부 사이로 다가왔다.
“하지만 좀 더 세세하게 계획을 잡는 것이 좋겠군요. 일단 현재 교를 장악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하는 이는 세 명입니다. 첫 순위는 이공자 사공찬, 그 다음이 대장로 혈월마성, 마지막으로 마의당주 가릉입니다. 일단 사공찬과 혈월마성은 교주와의 알현을 허락한다는 명분으로 마주전으로 부른 후 치면 될 것이고, 가릉은…….”
율기는 이미 이런 일까지 염두해 둔 것인지 계략을 짜는데 막힘이 없었다. 그다지 길지도 않는 시간 동안 세부적인 부분까지 모두 짚고 넘어갔다.
워낙 완벽한 계략이라 도종극도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과연 율 군사야. 흑살거부. 지금 당장 모든 귀림인에게 명을 내리라.”
“알겠습니다, 소교주님.”
흑살거부는 명을 받들며 몸을 돌렸다.
『반드시 마현 그놈이 부리는 삼백 구의 골강시를 찾아라.』
『명!』
도종극의 전음에 잠시 걸음을 멈췄던 흑살거부는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도종극은 고개를 돌려 마휴당을 쳐다보았다.
‘사부, 내 당신을 존경은 하오만……, 당신이 죽을 때까지 아등바등 살기 위해 몸부림치기는 싫소.’
도종극의 눈동자에서 귀기가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후후.”
그 모습에 율기는 나직하게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도종극은 그 웃음소리가 거슬렸는지 율기를 향해 눈매를 찡그렸다.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무슨 뜻이지?”
도종극의 찡그러졌던 눈매가 가늘고 날카롭게 변했다.
율기는 히죽 웃음을 지으며 도종극의 눈앞에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삼백.”
그리고는 뒤로 물러나며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닙니까?”
“흠…….”
“제가 보기에 림주님은 그리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십니다.”
“어떻게 알았나?”
도종극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바뀌어 있었다.
“소림주께서 지금은 림주께 대공자의 삼백 구 골강시에 대한 얘기는 숨길 때라고 하면 이해가 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종극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율기를 쳐다보았다.
“율 군사는 누구 사람인가?”
“일단은…….”
“일단은?”
“귀림 소속입니다.”
“귀림 소속이라…….”
율기는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이제 사공찬을 보러 가시지요.”
“그러지.”
율기를 따라 발걸음을 내딛은 도종극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워져 있었다. 그렇게 변한 눈동자는 율기의 등에 꽂힌 채 벗어나지 않았다.
* * *
웅장하고 거대한 마교를 병풍처럼 두른 산.
시퍼런 하늘까지 찌를 듯 가파르게 치솟은 거산들 중 한 정상에 마현이 서 있었다.
마현이 딛고 서 있는 산 정상에서 사람이 온전히 딛을 만한 평평한 곳은 3장이 채 되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마현이 서 있는 거산뿐만 아니라 그 옆으로 빼곡하게 치솟은 거산들도 마찬가지였다.
병풍처럼 빼곡하게 들어선 거산들은 모두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 거대한 검을 뒤집어 땅에 꽂은 듯한 형상들이었다.
그러니 천하의 그 어떤 무인이라도, 설령 역사상 고금 제일의 무인이라고 해도 이 천산을 넘어 마교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모두들 마교로 들어가는 길은 호로병 입구와도 같은 천산 줄기 끝 협곡뿐이라 했다. 그것이 정설이었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인간의 힘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천산 줄기의 어느 거산 봉우리에 마현이 서 있었던 것이다.
삼 일이었다.
허진에게 허락을 구하고, 흑풍대까지 남겨둔 채 오로지 텔레포테이션과 휴식만을 번갈아하며 이곳으로 왔다.
오자마자 운공을 해 고갈된 서클 단전에 마력을 다시 가득 채웠지만 삼 일, 그리고 허진에게로 가는 오 일까지 합해 근 팔 일 동안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해 몸이 많이 무거웠다.
잠시 눈이라도 붙이고 싶었지만 마현이 온 그 시점을 시작으로 갑작스럽게 부산스러워졌다. 워낙 먼 거리라서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일이 터진 것이 분명했다.
마현은 투명화 마법을 직접 몸에 시전하고는 플라이 마법을 이용해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굳게 닫힌 마의당주실 아래 가릉의 지하연구실.
쾅 쾅 쾅!
석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가릉은 내력을 일으켜 오른손에 독을 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석문 쪽으로 다가갔다.
“누구냐?”
“가 당주. 나요, 회회혈마.”
회회혈마의 목소리에 가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굳게 닫힌 석문을 열었다.
그그그극!
돌과 돌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석문이 열렸다. 석문이 미처 다 열리기도 전에 회회혈마와 삼안혈화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가릉은 고개를 내밀어 뒤에 따라붙은 자가 없는지 확인한 후 다시 석문을 굳게 닫았다.
“무슨 일이오?”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는 회회혈마의 모습으로 보아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쯤 본교에서 큰 사단이 일어날 것 같소.”
“사단이라니? 좀 더 자세히 말씀을 해보시오.”
“조금 전 이공자가 자신의 독혈대를 이끌고, 대장로와 함께 마주전으로 향했소.”
“흠……. 결국.”
회회혈마의 말을 들은 가릉은 어두워진 얼굴로 침음했다.
“문제는 삼공자가 실력 행사를 할 것 같소.”
“외부에서 들어온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오?”
“그런 것 같소.”
회회혈마는 좀처럼 숨이 돌아오지 않는지 두리번거리다가 석탁 위에 올려놓은 찻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때였다.
쾅 쾅 쾅!
다시 석문이 울렸다.
“가 당주님! 무영대주입니다.”
무영대 역시 막 일어나는 혼란을 알아차렸는지 그가 찾아왔다. 무영대주가 들어와 한 말은 회회혈마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좀 더 세세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영대는 어찌했느냐?”
“일단 모두 본교 밖으로 피신을 하라 했지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벌써 본교로 나가는 출입구가 막혔다는 뜻이냐?”
“그, 그렇습니다.”
“크흠…….”
가릉의 침음성은 더욱 커졌다.
“그런데 가 당주님, 그리도 장로님들.”
그들을 부르는 무영대주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수하들을 대피시킨 후 이곳으로 오면서 보지 못한 인물들을 더 보았습니다.”
“본교에 활보하는 이들 외에 더 있다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영대주의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서 말해보라.”
회회혈마가 무영대주를 다그쳤다.
“가, 강시를 본 것 같습니다.”
“강시?”
너무 놀란 나머지 가릉은 큰 소리를 냈다.
“이곳으로 오면서 본 자들이 강시를 부리는 것 같았습니다.”
“강시라니! 강시라니! 말이 되지 않는다. 네가 잘못 본 것이 아니더냐?”
가릉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영대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검은빛이 감도는 푸르스름한 그들의 피부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닐 것이야, 아닐 게야.”
가릉은 무영대주의 말을 애써 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