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70화 (170/351)

# 170

20화

“그나저나 자리를 일단 피해줘야겠다.”

허진은 걸왕과 불취개를 슬쩍 눈으로 가리키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본교로 최대한 빨리 복귀해야 할 듯싶습니다.”

“걸왕에게 들었느냐?”

“그것 외에도 제자가 따로 알아낸 것도 있습니다.”

“그건 돌아가면서 듣기로 하자.”

허진은 곧바로 귀갑철마대주와 그사이 모습을 드러낸 유령대주에게 회군을 준비할 것을 명했다. 그에 마현도 흑풍대를 소집시켰다.

그렇게 그들이 막 소화산을 벗어나려는 때였다.

우우웅!

마현의 품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마나에 의한 파장이 일어났다. 그 느낌에 마현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냐?”

허진은 그런 마현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현은 품에서 한 장의 두꺼운 양피지를 꺼내들었다. 그 양피지는 혹시나 모르는 그 어떤 상황을 대비해 마교로 먼저 보낸 회회혈마에게 준 양피지와 한 쌍을 이루는 것이었다.

과거 마현이 하르센 대륙 전장에서 급히 연락을 취할 때 종종 사용했던 보고용 마법 스크롤이었다.

깨끗한 양피지에 글을 적은 후 찢으면 그 내용이 고스란히 다른 양피지로 공간을 넘어 그대로 복사되는 그런 마법 스크롤이었다.

마현은 서둘러 양피지를 펼쳤다.

교주님 중태.

하지만 삼공자와 율기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교주님을 알현하지 못함.

공식석상에서 교주님이 모습을 감추자마자 삼공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을 등에 업고 소교주 자리에 오름. 군사 율기가 교주님이 삼공자를 공식 후계자로 하명했다고 천명함.

이공자의 반발.

그로 인해 기다렸다는 듯이 삼공자가 정체 모를 자들을 이용해 피의 숙청을 시작.

……중략…….

주군.

속하를 비롯한 두 장로와 가 당주, 무영대주 등이 모두 숙청 대상 일순위에 올랐습니다. 아마 주군을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불충한 대죄를 짓는 속하를 용서하시옵소서.

회회혈마 배상.

현재 마교에서 일어난 일을 간결하게 쓴 후 회회혈마가 개인적으로 남긴 글이 양피지에 담겨 있었다. 양피지에 나타난 회회혈마의 글은 급히 쓴 것인지 매우 어지러웠다.

“율기, 이놈!”

부릅뜬 마현의 눈에서 가공할 만한 살기가 터져 나왔다.

* * *

마교의 주인이 머무는 곳, 마휴당.

평소 마휴당을 지키는 수마대는 없고,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귀기를 뿜어대는 자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로 인해 과거 패도적인 분위기가 흐르던 마휴당의 기운은 음침하게 바뀌어 있었다.

마휴당 안에는 현 마교의 주인인 사공소의 침실이 있었고, 그 침실 한쪽에 난 무겁고 단단한 석문 뒤로 교주의 개인 연무석실이 있었다. 그곳은 오로지 단 한 명, 교주 사공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금역이었다.

연무석실 안 한쪽 벽.

그곳에 연무실과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굵은 쇠사슬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쇠사슬 아래 한 중년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앉아 있었다.

중년인은 단순히 쇠사슬에 포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쇠사슬 중간 중간에 삐죽하게 솟아난 굵은 쇠침들은 중년인의 요혈 깊숙이 박혀 있었고, 쇠침이 박힌 요혈에서는 제대로 지혈조차 되어 있지 않아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피는 쇠사슬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을 끈적끈적하게 메우고 있었다.

봉두난발이 되어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중년인의 얼굴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서슬 퍼런 칼날처럼 살아 있었다.

그 중년인은 바로 마교의 주인이자 교주인 사공소였다.

“빠드득.”

물조차 몇 날 며칠 입에 대지 못했던지 갈라지고 찢어진 입술 사이로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흘러나왔다.

그그그극.

그때 개인 연무석실로 통하는 육중한 석문이 열렸다.

단 한 명만 출입이 허용된다는 사공소의 개인 연무석실 안으로 세 명의 인물이 나란히 들어왔다.

가장 선두로 들어온 것은 군사 율기였고, 그 뒤로 이제는 소교주 자리에 오른 도종극과 해골처럼 깡마른 장년인 한 명이 들어왔다.

“교주님, 오랜만입니다.”

율기는 사공소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으며 히죽 웃으며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사공소가 율기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기경팔맥이 모두 막혔지만 그의 안광에서는 전처럼 절대자의 눈빛이 번쩍였다.

“곡기도 물도 끊은 지 벌써 보름입니다. 목숨이 제아무리 질기다고 해도 물마저 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율기의 목소리에는 사공소를 걱정하는 마음이 다분히 담겨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

찰랑 찰랑.

율기는 물이 담긴 호로병을 사공소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철커덩 철컹!

사공소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번뜩이더니 율기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사공소는 쇠사슬에 걸려 율기의 목까지 손을 뻗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쇠사슬이 박힌 채 그나마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터지며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반드시 네놈의 피로 이 갈증을 풀 것이다.”

사공소는 나직하지만 맹수의 울음소리처럼 으르렁거렸다.

“내가 뭐라고 그랬나? 말이 통하는 늙은이가 아니라고 했잖아.”

도종극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율기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그가 들고 있던 호로병을 가로챘다. 그리고는 마개를 열어 사공소의 머리 위로 부었다.

그 물은 사공소의 머리를 타고 눈으로, 코로, 뺨으로, 입술로 흘러내렸다. 심한 갈증에 입을 벌려 흘러내리는 물을 핥을 법도 하건만 사공소는 도종극을 노려볼 뿐이었다.

“여전히 기분 나쁜 노친네야.”

도종극은 호로병을 구석으로 집어던지고는 사공소 앞으로 바싹 다가앉아 그의 턱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천마신공을 내놓던지, 아니면 불어.”

“크크크, 조막만 하던 놈이 많이 컸구나.”

사공소의 웃음소리는 그의 입술처럼 메말라 있었다.

“아직 네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구나!”

도종극은 사공소의 턱을 거칠게 밀어버리며 손가락을 독수리 발톱처럼 오므렸다.

회색빛 귀기가 도종극의 눈동자에서 어른거리더니 그의 손톱이 길게 삐죽 튀어나왔다. 손톱은 금방 날카로워졌으며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도종극은 사공소의 가슴을 매섭게 할퀴었다.

사사삭!

사공소의 눈이 부릅떠지며 얼굴이 위로 젖혀졌다. 머리부터 시작된 떨림은 목줄기를 타고 내려와 온몸으로 번졌다. 지독한 고통에 휩싸인 사공소였지만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그의 몸을 따라 쇠사슬이 출렁거리며 엉키는 소리가 그의 신음을 대신했다.

“과연 십만 마교인의 주인이군.”

그동안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깡마른 장년인에게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됐다. 어차피 마교를 정리한 후 강시로 만들어 빼내면 된다.”

“하지만 스승님.”

“좋은 실험체가 상해서야 어디 쓰겠느냐?”

깡마른 장년인의 말에 도종극은 사공소를 노려본 후 물러났다.

사공소는 부들부들 떨리는 머리를 간신히 아래로 내려 그 장년인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네놈은 누구냐?”

“클클클.”

깡마른 장년인은 수염 하나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음산한 웃음을 내뱉었다.

“본좌는 귀림주 능자필이라고 한다.”

귀림주 능자필은 선심을 쓴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군사.”

“예, 림주님.”

“마교 대종사의 태사의에나 어디 한 번 앉아볼까?”

“소인이 안내를 하겠습니다.”

“그거 좋지.”

능자필은 거만하게 뒷짐을 지고 사공소를 한 번 흘겨보고는 개인 연무석실을 빠져나갔다.

“고루강시 제작은 어찌 되어 가느냐?”

“그간 마땅한 시신이 없어 제작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귀림에서 제작할 수 있는 강시는 강함에 따라 고루강시, 묵혈강시, 철골강시 이렇게 세 종류다.

절정급 고수로 만든 묵혈강시와 삼류 무인이나 일반 양민으로 만든 철골강시와 달리 고루강시는 적어도 초절정 경지에 오른 무인으로만 만들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묵혈강시와 철골강시는 암암리에 제작되어 이번에 투입되었지만 고루강시는 아니었다. 투입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동안 운신의 폭이 좁았던 귀림으로서는 초절정 이상의 무인들을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들의 시신을 빼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림이 마교를 장악하자마자 벌인 일이 바로 자신들을 반하는 자들 중 초절정급 이상의 마인들을 죽여 고루강시로 만드는 것이었다.

“현재 이공자 측인 오장로 염왕부와 팔장로 혈음검, 그리고 대공자 측의 삼장로 역천마도. 이렇게 세 구의 고루강시가 지금 연성 중에 있습니다.”

“부족하다.”

도종극은 칭찬을 받기 위해 뿌듯한 얼굴로 말했지만 돌아온 목소리는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만간 숙청 작업에 들어가면 모든 장로들을 고루강시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시일을 좀 더 앞당겨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리고 율 군사.”

능자필은 고개를 끄덕이며 율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본좌가 말한 재료 준비는 모두 끝나 가는가?”

“예상보다 재료 양이 줄어든 탓에 삼사 일 정도면 모두 준비가 될 듯싶습니다.”

율기의 말에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능자필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하더니……. 허명만 있는 무덤인 줄 누가 알았누? 에잉, 쯧쯧쯧.”

능자필은 마교로 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이 네 명의 마도 영웅이 잠들어 있다는 마웅총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시신이 비교적 온전하다면 자신의 모든 역량을 들여 천강시로 만들려고 했었다.

헌데 막상 마웅총을 파보니 단지 이름만 있는 무덤일 뿐 능자필이 원하던 시신은 없었다.

“그래도 싱싱한 철혈마제를 잡았으니 그걸로 만족해야겠지?”

능자필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굳게 닫힌 사공소의 개인 연무석실로 들어가는 석문을 쳐다보았다.

“스승님, 이미 고루강시에 대한 모든 재료 준비는 끝마……. 설마?”

도종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하다가 순간 말문을 닫고 능자필을 향해 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떴다.

“저 좋은 재료로 고작 고루강시를 만들 수 있느냐?”

“그렇다면……, 혹, 처, 천강시?”

도종극이 놀라는 이유는 바로 능자필이 만들려는 강시 때문이었다.

귀림에서 만들 수 있는 강시의 종류는 세 종류.

그중 가장 강한 것이 현재 장로들을 이용해 만들려는 고루강시였다.

고루강시만으로도 충분히 강했지만 능자필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수십 년간 강시 제작에 심혈을 쏟은 결과, 몇 해 전 고루강시를 뛰어넘는 강시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능자필은 그 강시를 천강시라 명명했다.

천강시는 다른 강시와 달랐다.

그저 어떤 매개체를 이용해 단순히 꼭두각시처럼 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살아 있을 때 사용했던 무공을 고스란히 펼친다.

하지만 천강시의 무서움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자의 몸을 이용해 강시를 만드는 것도 있지만 진정한 무서움은 그런 강시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렇게 산 사람처럼 자유롭게 사고하는데, 눈을 뜨고 맨 처음 본 자에게는 맹목적인 충성을 한다. 또한 그 충성이 인간의 경우처럼 깨어지는 일도 결코 없다. 절대충성만이 있는 것이다.

도종극은 천강시를 본 적이 없다.

그렇다지만 능자필이 평소 허언을 하지 않음을 도종극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를 통해 들은 천강시는 아마도 지상 최강의 무기가 될 터였다.

그러니 사공소를 이용해 천강시를 만든다는 소리에 도종극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클클클.”

능자필은 입술을 비틀며 쇠가 부딪치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제자야.”

“예, 스승님.”

“염라서생 역시 꼭 잡아야 한다.”

“그 말씀은……?”

“제아무리 만들기 어렵다는 천강시라도 최소 두 구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클클클.”

“하하하하, 역시 스승님이십…… 컥!”

능자필은 자신을 따라 웃는 도종극의 목줄기를 단숨에 틀어쥐고는 얼굴 앞으로 바싹 당겼다.

“웃는 것은 네 마음이다만…….”

능자필은 혀를 날름거리며 길어진 회색 손톱으로 도종극의 뺨을 쓰다듬었다.

“염라서생의 몸뚱이를 가져오지 못하면 네가 대신해야 할 것이야. 알겠느냐, 사랑스러운 나의 제자야?”

“컥컥! 아, 알겠습니다.”

도종극은 공포에 찌들어 일그러진 표정 위에 애써 어색한 웃음을 덮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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