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19화
신형을 유지하던 개방의 고수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스켈레톤을 향해 달려들며 저항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스켈레톤을 부숴 버리는 것도 전처럼 쉽지 않았고, 어렵게 부숴 버려도 전보다 더 빨리 제 모습을 갖추었다.
거기에 그 수만 해도 삼백이다. 개방 제자들의 수와 비등하니 타구진을 유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자 약한 자들부터 얼굴만 빼놓고 차츰 땅 속에 파묻히는 이들의 숫자가 늘어갔다.
“도, 도망쳐라.”
그 모습에 기가 질리다 못해 공포심에 젖은 화산파와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걸음 도망치지도 못하고 다시금 공포에 떨어야 했다.
“피는 피로써 갚는 것이 마교의 율법이다. 윌 오브 파이어!”
마현은 그들보다 먼저 플라이 마법을 이용해 소화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막아섰다.
그리고 등 뒤로 불로 이루어진 장막을 쳤다. 마현은 기껏 예닐곱 명 정도만 살아남은 제갈세가를 향해 살기를 일으켰다.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마현의 모습은 아수라처럼 보였다.
“검림의 술수에 넘어가 본교 군사와 내통하여 내 스승을 죽이려 했던 네놈들은 여기서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
“네, 네가 어찌 그것을……. 헙!”
제갈휘는 마현의 말에 충격을 받아 그만 저도 모르게 진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그, 그게 사실이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화산파의 살아남은 무인들은 제갈휘를 향해 불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거, 거짓이오. 저 마인의 간악한 술수요, 속지 마시오.”
제갈휘는 말까지 더듬으며 변명했지만 화산파 무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제갈세가의 제자들은 뭣들 하는 것이냐? 저놈을 당장 죽이지 않고.”
결국 마현을 죽여야만이 지금 드러난 사실을 덮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 제갈휘는 검을 뽑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명령을 내렸다.
챙 챙 챙 챙!
마현만 죽이면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를 벗어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여긴 탓인지 제갈세가 무인들은 망설임 없이 단숨에 검을 뽑아들었다.
“이야압!”
“흐압!”
제갈휘를 필두로 제갈세가 무인들은 일제히 마현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현은 그런 그들을 보며 냉혹한 웃음을 싸늘하게 지었다.
“윈드 커터, 리터레이트!”
쑤아아악!
수십 줄기의 날카로운 바람이 마현의 몸에서 쏘아져나갔다. 그 바람의 칼날은 여지없이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뒤덮었고, 그들의 몸을 피로 물들였다.
“죽어라!”
살을 내주고 뼈를 깎는다는 심정으로 마현의 공격을 몸으로 견디며 악착같이 다가온 제갈휘가 독기 어린 목소리를 터트리며 검을 휘둘렀다.
부우웅!
하지만 마현의 신형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부터 네놈들은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마현을 향해 돌진하던 제갈세가 무인들의 후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제갈휘는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잽싸게 마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원래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서 마현은 어느새 검은 마기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Blood detonation!”
마현은 상처 악화 마법에서 한 단계 발전한 혈폭 마법을 제갈휘에게 시전했다.
쾅!
그러자 제갈휘의 허벅지에 난 상처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그의 상처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폭발한 것이었다.
“크악!”
허벅지 반이 그 폭발에 날아갔다.
피가 터지고 살점이 뜯겨나간 제갈휘는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휘청거리더니 결국 바닥으로 주저앉듯 쓰러졌다.
쾅 쾅 쾅!
쓰러진 제갈휘의 몸은 몇 차례나 더 폭발했고, 그럴 때마다 지독한 고통에 휩싸여 비명과 함께 제갈휘의 몸이 용수철처럼 위로 튕겨져 올라갔다.
“으으으으.”
간신히 목숨만 붙은 채 넝마처럼 변한 제갈휘는 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리며 신음 소리만 간간히 낼 뿐이었다.
챙그랑.
그 참혹한 모습에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검을 버리더니 하나 둘씩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미 늦었다! 블러드 데터네이션, 리터레이트!”
마현의 손짓에 따라 마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쾅 쾅 쾅 쾅 쾅!
“크아아악!”
“사, 사람 살려!”
도망치던 십여 명의 제갈세가 무인들은 그 자리에서 피를 터트리며 단숨에 즉사했다. 마현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겨우 숨줄만 잡고 있는 제갈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헤비 그래버티(Heavy gravity)!”
제갈휘가 쓰러져 있는 공간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파직!
제갈휘의 몸은 몇 만 근의 쇳덩이에 짓눌린 것처럼 온몸이 눌려 시신의 형체마저 완전히 뭉개지며 핏물로 변해갔다.
마현은 손을 거두며 구석에서 떨리는 손으로 검을 들고 있는 화산파 무인들을 쳐다봤다.
“너희들은 가도 좋다.”
마현이 손을 휘젓자 그들의 후미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던 화벽(火壁)이 사라졌다.
“어차피 너희들 역시 피해자이니…….”
“저, 정말 우리를 살려서 보내 주시는 게요?”
살아남은 화산파 제자 중 가장 배분이 높아 보이는 한 중년인이 더듬더듬 어렵게 질문했다. 그 눈빛을 보니 마현의 말이 믿기지 않은 모양이다.
“반각이다. 그때까지 내 눈앞에 서 있다면 모두…… 죽인다!”
마현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마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스켈레톤들에게 둘러싸여 홀로 고군분투하는 불취개가 있었다.
망설이던 그 화산파 제자는 조용히 마현을 향해 포권을 취하고는 이내 동료들을 이끌고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마현이 일말의 측은함이 생겨 그들을 살려준 것은 아니었다.
율기에 관한 일이 마무리되는 즉시, 검림과 제갈세가를 이 땅에서 지울 생각이었다.
그때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적이 줄어드는 것이 좋았다. 제아무리 거리낌이 없는 마현이지만 정파 모두를 상대하기에는 조금 거북한 까닭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화산파로 인해 무림맹 내부에 분열을 유도할 마음도 있었다.
화산파 무인들이 자리를 떠나고 마현은 불취개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마현이 보여준 무위는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하던 허진의 눈마저 화등잔처럼 크게 만들었다.
이제 다 커서 자신의 품을 벗어나겠구나 싶었는데, 그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다 큰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인 중의 마인이 되어 있었다.
마교를 떠난 지 대략 넉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사이 기연을 얻은 것인지, 아니면 깨달음이 있었는지 마현은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의 그늘은 마현에게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아니 자신의 그늘은 오히려 마현이 하늘로 비상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생각하자 쓴맛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한편으로 흐뭇했고 천하를 향해 ‘마현이 내 제자다’라고 외치고 싶은 욕구 또한 생겨났다.
이게 성년이 된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마음이 아닐까 싶었다.
‘허어…….’
허진은 꾸역꾸역 밀려오는 탄식을 애써 속으로 삭히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하늘이었다.
“스승님.”
허진은 마현의 부름에 고개를 내렸다.
“무슨 일이냐?”
“개방 방주 말입니다.”
“……?”
“걸왕 선배도 있으니 제가 임의대로 처리하고 싶습니다.”
“네가 해결했으니 마음대로 하거라.”
“죄송합니다, 스승님.”
자신을 향해 죄스러운 얼굴로 깊게 허리를 숙이는 마현을 보며 허진은 잡다하고 복잡한 생각을 모두 털어 버리고 그저 대견한 마음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허리를 편 마현은 다시 불취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마현이 다가가자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던 스켈레톤들이 물러나며 길을 터주었다.
마현은 그 사이를 걷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미간을 살짝 좁히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놈! 죽이려면 어서 죽여라.”
그 웃음을 불취기는 자신을 향한 조롱이라고 느낀 것인지 울분이 가득 찬 목소리를 터트렸다. 하지만 마현은 그런 불취개를 향해 나직하게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감히 본 방주를 농락하는 것이냐?”
마현은 그 목소리에 인상을 찡그리며 한 곳을 주시했다.
“그렇게도 걱정이 되는 겁니까?”
“…….”
마현이 바라보는 울창한 거목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걸왕이냐?”
허진 역시 인기척을 느낀 모양이었다.
“스, 스승님? 믿을 수 없다. 스승님이 간악한 마인들과 한통속일 리 없다!”
불취개는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에라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못난 놈아!”
불취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고목 위에서 잎사귀가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걸왕이 아래로 툭 뛰어내렸다.
노기로 가득 찬 걸왕이 씩씩거리며 스켈레톤들을 강제로 밀치고 불취개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가 들고 있던 타구봉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앞뒤 가리지 않고 타구봉을 휘둘렀다.
퍽 퍽 퍽.
걸왕은 씩씩거리며 불취개를 한참이나 마구 때렸다.
불취개는 시뻘게진 눈동자로 걸왕을 노려보며 그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한 차례도 피하지 않았다. 몽둥이게 살이 터지고 머리가 깨졌지만 불취개는 석상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이, 이놈이…….”
더욱 화가 치민 걸왕은 수염을 부들부들 떨다가 타구봉을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사부! 내가 뭐 그리 잘못했다고 그러십니까?”
그 모습에 불취개는 발악하듯 울분을 토해냈다.
“정말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단 말이냐?”
“모릅니다!”
“이, 이 녀석이 매를 버는구나!”
“그래, 때리십시오, 아니 차라리 제자를 죽이십시오.”
걸왕은 바닥에 떨어진 타구봉을 다시 집어 들었지만 다시 휘두르지는 못했다.
“거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바닥의 인생을 사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의 우두머리가 권력에 눈이 멀어 하는 짓이 고작…….”
“왜요? 왜요? 그게 뭐 잘못되었습니까?”
“이, 이 녀석이……. 알고 보니 헛똑똑이도 이런 헛똑똑이가 따로 없구나. 내가 너를 잘못 보았구나, 잘못 보았어.”
“제자에게 언제 그런 거 가르쳐준 적이나 있으십니까?”
발악하는 불취개의 목소리에는 아픔이 묻어 있었다.
그 아픔이 걸왕에게 이어진 것일까?
탈그락, 탁탁탁.
손에 힘이 풀린 것인지 걸왕이 손에 쥐고 있던 타구봉을 놓쳤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이제 와 내가 네게 무슨 말을 할까?”
힘없이 돌아서는 걸왕의 등이 문득 왜소하게 보였다.
“또 그리 가시는 겁니까?”
사연이 담긴 둘의 대화에 마현은 조용히 왕귀진을 불렀다.
“개방 제자들을 풀어줘라.”
그리 명하고는 마현은 조용히 허진에게로 다가갔다. 그사이 지혈을 하고 금창약을 발랐는지 허진의 창백하던 안색에 약간이나마 혈색이 돌고 있었다.
허진의 상처는 중상이 아니었다.
깊지 않은 가벼운 검상들이었지만 그 수가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로 인해 피를 조금 과하게 흘린 것뿐이었다. 허진에게 있어서 이 정도 상처들은 언제라도 기꺼워하는 전장의 훈장과도 같았다.
하지만 마현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현은 처음으로 흑마법사가 된 것을 후회했다.
백마법사의 길을 걸었다면 치료 마법을 통해 허진의 상처를 단숨에 말끔히 고쳐줄 수 있으니 말이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고얀 녀석, 아직 네가 이 스승을 걱정하기는 이르다.”
허진은 마현의 마음을 느끼자 코가 찡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승 노릇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새 많이 달라졌구나.”
허진이 마현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북해에서 생각지도 못한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북해에서?”
“예.”
“그렇구나……. 나중에 시간이 되면 그에 상응한 보답을 해야겠지.”
허진은 북해빙궁주 설관악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