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화
“적어도 율기에게 가져갈 선물은 있어야겠지?”
허진은 찌릿한 살기가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소화산 끝자락에서 넓은 들판처럼 보이는 터를 내려다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깔아놓은 판에서 굳이 놀 필요가 없지. 국충.”
“예, 부교주님.”
“판은 우리가 깐다. 말머리를 돌려라.”
허진은 귀갑철마대를 이끌고 소화산 인근 숲 속으로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 * *
“옵니다!”
소화산 끝자락에서부터 이어진 넓은 터 주변으로는 울창한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었다.
불취개는 개방 제자의 전언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갈묘의 동생이자 며칠 전 비공식으로 제갈세가의 가주 자리에 오른 제갈휘에게 눈을 돌렸다.
“그들이 이곳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온다면 이 싸움은 우리의 승리요.”
제갈휘는 속삭이듯 낮게 말했지만 거기에는 상당한 자신감이 들어차 있었다.
그 말이 당연하다는 듯 불취개는 신뢰가 담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개방과 제갈세가,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합류시킨 화산파가 에워싸고 있는 터에는 제갈세가가 모든 역량을 동원해 만든 하나의 기문진이 설치돼 있었다.
그 기문진은 바로 제갈세가가 몇 대에 걸쳐 비밀리에 완성한 무극연환미혼진(無極連環迷魂陣)이었다.
천하제일인이라 해도 이 무극연환미혼진에 빠지면 환영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심력이 고갈되어 서서히 죽어나가게 되는 무서운 진이다.
거기에 외부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으며 오히려 진 안에 갇힌 적을 공격까지 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두루 갖췄다.
무극연환미혼진이 뛰어난 진임에는 틀림없으나 제갈세가가 이제껏 외부로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다. 진을 설치하기에 너무나도 오랜 시일이 걸린다는 점 때문이었다.
불취개는 제갈휘가 들고 있는 하나의 작은 깃발을 내려다봤다.
저 깃발이 꽂히는 순간 무극연환미혼진이 발동한다. 불취개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다가 반걸음 뒤쪽에 몸을 숨기고 있는 화산파 중향각주 독소명 장로와 눈이 마주쳤다.
‘쳇!’
불취개의 눈가에 언짢은 감정이 주름으로 나타났다.
제갈세가와 개방이 이 좋은 상황을 독식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게 독식만 한다면 범이 날개를 단 것처럼 단숨에 다른 오파일방과 육대세가를 누르고 올라설 수 있다.
헌데 허진의 뜬금없는 행동으로 인해 화산파가 끼어들게 되었다.
그것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들을 내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독기가 가득한 눈빛들로 보아 화산파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해 이제껏 실추된 문파의 명예를 예전처럼 다시 올리려는 듯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개방과 제갈세가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 스스로 자위하며 불취개는 다시 무극연환미혼진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불취개의 눈이 부릅떠졌다.
허진과 귀갑철마대가 몇 걸음만 내딛으면 진 안으로 들어오는데,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다시 소화산 인근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린 탓이다. 그것에 가장 당황한 이는 제갈휘였다.
불취개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어대다가 화산파의 독소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불취개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계획이 번개처럼 번쩍 떠올랐다.
이윽고 불취개가 독소명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독 장로, 화산파가 수고를 좀 해주어야겠소.』
독소명의 낯이 살짝 일그러졌다.
화산파 제자들을 움직여 허진과 귀갑철마대를 무극연환미혼진 안으로 몰아넣으라는 불취개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 보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명을 독소명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콱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취개는 독기 어린 독소명의 눈빛을 외면하며 개방 제자들에게도 화산파를 도우라는 명을 내렸다.
‘재주는 곰이 구르고, 돈은 엄한 놈이 가져간다고 했던가?’
곰은 화산파고, 엄한 놈은 개방과 제갈세가다.
‘물론 상처의 고통을 잊게 하는 달콤한 꿀이 보상으로 주어지겠지만…….’
불취개는 뒤로 멀리 돌아가기 위해 움직이는 화산파 제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 * *
푸핫!
소화산 끝자락과 이어지는 자그만 야산 위로 강렬한 빛이 뿜어졌다가 사라졌다. 그 빛 중심에는 마현과 흑풍대가 서 있었다.
7서클에 오르면서 어느 정도 공간에 대한 제약이 사라진 마현은 혹시나 모를 허진의 위험을 생각해 몇 번에 걸쳐 워프 네비게이션을 통해 이곳으로 왔다.
“헉헉, 헉헉헉.”
모습을 드러낸 마현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탈진한 듯 창백한 얼굴로 제대로 서 있기도 힘이 든 것인지 몸이 휘청거렸다.
“주군.”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기 전 왕귀진과 철용이 재빨리 다가와 마현을 부축했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이곳까지 워프 네비게이션 마법을 연속으로 펼친 것으로 인해 마력의 고갈과 함께 탈진 현상이 온 것이었다.
왕귀진은 서둘러 허리에 차고 있던 물주머니를 풀어 마현에게 건넸다. 마현은 바닥에 앉아 왕귀진이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셨다.
“조금이라도 쉬셔야 합니다.”
마현은 왕귀진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써도 모자라지 않을 것 같던 서클 단전의 마력이 연이은 마법 시전으로 완전히 고갈된 상태였다. 마음은 급하지만 지금 움직인다면 오히려 안 움직인 것만 못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한시가 급한 마현은 그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눈을 감았다.
“주위를 에워싸라.”
왕귀진은 얼른 흑풍대에게 명을 내려 마현을 보호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마현의 단전으로 주위의 기운이 빠르게 흡수되었다. 단전 안으로 모여든 기운은 곧 단전을 두르고 있는 7개의 서클로 스며들었다.
우우우웅!
마현의 몸 주위로 거대한 구리종에서나 들려올 법한 소리가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그 울음이 들리는 시점부터 마현의 몸이 허공으로 일 척 가량 떠올랐다.
그렇게 한 시진이 흘렀다.
죽은 사람처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마현이었다. 그런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길고 긴 호흡이 흘러나왔다.
마현이 눈을 떴다.
번쩍!
태양보다 더 강렬한, 하지만 태양처럼 밝은 빛이 아닌 어둠보다 더욱 검은빛이 마현의 눈에서 폭사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대략 한 시진쯤 흘렀습니다.”
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시진이면 양호한 시간이었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도록.”
마현은 플라이 마법을 이용해 허공으로 날아 올라갔다. 허공에 안착한 마현은 투시 마법과 확대 마법을 이용해 걸왕이 알려준 소화산 아래 인근 터를 주시했다.
높은 산 하나가 마현과 소화산 아래 인근 터 사이에 우뚝 솟아나 가로막고 있었지만 마현에게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잠시 후, 마력에 의해 검은 기운이 일렁거리는 마현의 눈가가 서서히 일그러졌다.
“스, 스승님!”
동시에 마현의 몸에서 주체할 수 없는 살기와 마기가 폭사되었다.
* * *
“으아아악!”
“잔악한 마교 놈들! 죽어라!”
고즈넉한 소화산 기슭에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타음과 고통에 찬 비명소리, 독기에 사로잡힌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푸학!
녹음이 푸르른 수풀에 붉은 피가 덧칠해졌다.
그 위로 붉은 피를 뒤집어 쓴 사내들이 하나둘 속절없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쓰러졌다.
“뭣들 하나? 몰아붙여라, 어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독소명의 뺨 위로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뜨거운 햇살에 반사되어 빛나는 귀갑철마대의 갑옷이 만들어낸 은색과 온통 붉은색만이 존재했다. 보이는 것 대부분이 붉은색이니 그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만도 하지만, 독소명은 자신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 보이는 붉은색은 허상이 아니었으니까.
그 붉은색의 주인들은 귀갑철마대의 손에 속절없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화산파 제자들이었으니까.
울분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탓일까?
악에 받쳐 찢어진 북처럼 고래고래 터져 나오던 독소명의 목소리가 어느새 잠긴 모양이다. 그의 입술에서는 공기 빠진 물주머니처럼 씩씩거리는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흰자위에 핏발이 섰다.
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화산파 제자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올 때 불취개가 전음으로 했던 말이 천둥치듯 떠올랐다.
『제갈세가에서 만들어놓은 기문진 안으로 반드시 염라서생을 밀어 넣으시오! 그리한다면 화산파의 무너진 명예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겠소.』
불취개의 전음이 들렸다.
독소명은 번개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불취개의 전음은 곧 자신 보고 죽으라는 소리다. 아니 오십여 명의 화산파 제자들에게 죽음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라는 뜻이기도 했다.
『본 방주의 이름을 걸겠소. 이는 또한 제갈 가주도 동의했소.』
잠시 망설이는 독소명을 다그치듯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독소명은 입술을 깨물었다.
『믿겠소.』
독소명의 입장으로서는 불취개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가 거짓을 말한다고 해도.
“으아아아!”
독소명은 기합성도 아닌 비명처럼 들리는 고함소리를 터트리며 귀갑철마대 속 피에 젖은 검을 휘두르는 허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숲을 뒤흔드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정파의 기치를 세우자!”
귀갑철마대와 부딪히는 화산파 제자들 뒤로 개방 제자들 수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진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화산파 제자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들을 소화산 아래로 밀어 넣으려는 듯한 의도가 역력히 보였기 때문이다.
귀갑철마대가 호위하고 있어 비교적 여유가 있었던 허진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듬성듬성 난 나무들 사이, 멀리 보이는 산기슭 아래 넓은 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허진의 기감에 여전히 그 터를 에워싼 채 매복하고 있는 백여 명 정도의 살기가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단지 그 정도 인원들의 매복을 믿고 화산파 제자 수십 명이 죽기 살기로 덤비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뭔가가 있다.’
허진은 다시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저기에 무엇이 있기에…….’
허진의 깊은 상념이 독소명의 비명과도 같은 광소에 깨어났다.
“으아아아아!”
독소명이 주화입마에 빠진 광인처럼 난폭하게 검을 휘두르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허진 앞에 당도하기 전에 막아서는 귀갑철마대의 언월도에 팔과 다리, 옆구리가 베어졌지만 독소명은 그런 상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허진만을 노려보며 달려들었다. 그렇게 상처투성이로 달려온 독소명이 말을 탄 허진을 노리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허진은 말고삐를 살짝 옆으로 당기며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허공으로 몸을 띄운 독소명을 향해 일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독소명은 허진을 향해 휘두르던 검을 버렸다.
그때 허진은 독소명의 눈빛에서 그가 이미 죽음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푹!
아니나 다를까. 독소명은 허진이 내지른 검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독소명은 허진을 덮친 후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설마 독소명이 이런 행동을 취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허진은 한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독소명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다.
그렇지만 독소명은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짜 허진을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몸을 굴려 허진과 함께 산기슭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