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5화
“생각보다 일이 빨리 마무리가 되어 일찍 출발했습니다.”
제갈묘의 표정을 슬쩍 살피니 다행히도 듣지 못한 듯싶었다. 불취개는 안도의 한숨을 나직하게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군사께서 쓰실 거처는 공사가 마무리되었으니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불취개는 제갈묘를 데리고 한 전각으로 향했다.
그 전각에는 와룡각(臥龍閣)이라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다.
“와룡각이라……. 혹?”
“멋대로 달았는데, 군사의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소.”
“제갈공명 선생의……, 그 와룡각이라…….”
제갈묘의 얼굴에는 어느새 흡족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방주. 감사히 쓰겠습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오.”
제갈묘는 앞으로 자신이 지낼 거처를 둘러보며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 놓인 탁자를 사이에 두고 제갈묘와 불취개가 마주 앉았다.
“생각보다 진전이 빠른 듯 보입니다.”
“워낙 잘 지은 왕부인지라 그다지 크게 손 볼 곳은 없습니다.”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가 오갈 때였다.
“방주님. 사천분타에서 급한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중경 분타주가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사천에서 급한 전서가 날아왔습니다.”
불취개는 빼앗다시피 전서를 가로채고는 급히 전서를 펼쳤다. 전서를 읽어 내려가며 불취개는 긴장감이 물든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전서를 모두 읽은 불취개가 제갈묘에게 전서를 내밀었다.
“후후.”
제갈묘는 전서를 읽으며 불취개와는 달리 옅은 웃음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제가 선견지명이 있나 봅니다.”
제갈묘는 전서를 내려다보며 불취개를 쳐다보았다.
“오시자마자 바쁘게 되었소.”
불취개 역시 의미심장한 미소로 제갈묘의 웃음에 화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제갈세가와 개방에 날개를 다는 일뿐이군요.”
메마른 웃음기가 입가로 번져가는 둘의 시선 끝에는 개방에서 보내온 활짝 펴진 글귀가 매달려 있었다.
마교 부교주 허진, 소화산으로 출발.
* * *
눈부신 햇살로 가득 찬 정오.
허진과 귀갑철마대가 제법 넓은 관도를 따라 섬서성 성도 서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움직임은 당당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대로는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활기로 가득 차 있었고 여유도 있었다. 하지만 허진은 그런 여유 속에 긴박하게 돌아가는 공기의 흐름을 어렴풋이 느꼈다.
대로를 메운 범인들 속에서 당황하며 서두르는 몇몇의 기척을 파악한 까닭이다.
아주 미묘한 흐름이었지만 허진은 이미 예상을 했기에 그런 기운을 놓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허진은 사천총타를 나서며 몸을 숨긴 채 사천성을 벗어났다. 하지만 섬서성에 이르자 보란 듯이 관도를 따라 서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당연히 무림맹으로서는 갑작스러운 자신의 돌출 행위로 인해 당황할 것이다.
“훗!”
허진은 실소를 터트렸다.
이제부터 소화산까지는 당당하게 움직일 것이다. 그렇게 무림맹 내부를 뒤흔들 생각이었다. 그로 인해 그들에게서 허점이 드러난다면 허진은 맹수처럼 달려들어 단번에 찢어발길 작정이었다.
거리를 훑어보는 허진의 눈빛은 얼음장보다 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임을 느낀 것이다.
“국 대주.”
허진은 귀갑철마대주 국충을 불렀다.
“예, 부교주님.”
“서안에서 가장 좋은 객잔을 잡도록 하라.”
“명!”
허진의 명은 국충에게로, 그리고 귀갑철마대원에게로 내려갔다. 얼마 후 서안에서 손꼽히는 객잔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허진은 귀갑철마대를 이끌고 객잔으로 이동하는 도중 제법 거리가 떨어진 곳에 흉흉한 기세를 머금고 있는 한 무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화산파 무인들이었다.
분주한 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그새 화산파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드러내 놓고 자신들을 가로막은 것은 아니었기에 허진은 가는 길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하루 빌려 놓은 객잔으로 가려면 그들이 서 있는 곳을 지나쳐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해도 허진은 그들 앞으로 말을 몰았을 것이다.
투각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철컹거리는 귀갑철마대의 육중한 갑옷 소리는 대로 위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허진은 천천히 대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 십여 명의 화산파 제자들 앞으로 말을 몰았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서 있는 화산파 제자 바로 앞까지 다가서고 나서야 비로소 말을 세웠다.
푸히이잉!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였기에 허진이 탄 말의 뜨거운 콧김이 고스란히 화산파 제자의 얼굴을 뒤덮었다. 말의 입김에 묻어나오는 역한 냄새에 화산파 제자가 얼굴을 잔뜩 구기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에 허진은 일부러 발에 힘을 주어 말의 옆구리를 강하게 압박했다.
쿠히이이잉!
말은 격한 울음을 토해내며 앞발을 번쩍 들어올려 허공에 몇 차례 발길질을 해댔다.
그 말의 바로 앞에 있던 화산파 제자는 위협을 느낀 것인지 다시 뒤로 물러나며 허리에 차고 있는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흉흉한 눈빛만을 유지할 뿐 검을 뽑지는 않았다.
그가 검을 뽑지 않은 것이 아니라 뽑지 못한 것임을 허진은 한눈에 알아차렸다.
‘결국 걸왕의 말이 맞았군.’
허진은 걸왕의 말을 온전히 믿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서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유는 걸왕의 말이 진실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고, 그게 진실이 아니더라도 화산파로 바로 진격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마현으로 인해 화산파의 지위가 바닥에 처박혔음에도 자신들을 향해 검을 뽑지 못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했다.
“가자.”
허진은 발로 말의 배를 툭 치며 무리를 이룬 화산파 무인들 중앙으로 다시 말을 몰았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산파 제자들은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텄다. 스쳐 지나가며 본 그들의 모습은 굴욕감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하고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의 눈빛과 잔뜩 힘이 들어간 손등을 보건데 검을 뽑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다른 화산파 제자가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니 허진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허진은 말을 멈춰 세웠다.
“뽑고 싶나?”
허진은 상체를 살짝 숙여 검을 뽑으려던 화산파 제자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 이익!”
그 화산파 제자는 다시 검을 뽑으려 했지만 다른 화산파 제자 둘이 달려들어 그를 제지했다.
“후후.”
허진은 실소를 내뱉으며 다시 허리를 폈다.
“머지않아 검을 뽑게 될 테니 좀 참는 것도 괜찮겠지. 소화산에서!”
허진은 빈정거리는 듯한 어투로 말을 시작했지만 마지막 말은 차갑게, 그리고 딱딱한 어투로 강조했다.
그러자 몇몇 화산파 제자들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생겨났다.
그때 허진은 제법 떨어진 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골목길 안에서 한 개방 제자가 당황한 듯한 얼굴로 어디론가 뛰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개한 허진의 눈꺼풀 속에 잠긴 눈동자는 다시금 싸늘하게 식어갔다. 허진은 입을 한일자 모양으로 꾹 다물며 다시 말의 배를 찼다.
말은 가벼운 투레질을 터트리며 다시 대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묵묵히 화산파 무리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온 허진은 귀갑철마대와 함께 미리 잡아놓은 객잔에서 짐을 풀었다.
잠시 후 화려한 객잔 가장 상층에 허진과 국충, 그리고 귀갑철마대와 달리 유령대를 이끌고 모습을 감춘 채 은밀히 허진의 뒤를 따라온 유령대의 대주 하강우가 한자리에 모였다.
허진은 그 둘에게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주군.”
공손히 술잔을 받은 하강우가 조심스럽게 허진을 불렀다.
“……?”
허진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다가 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닙니다.”
한동안 허진을 보며 우물쭈물하던 하강우는 곧 입을 닫았다.
“아니긴 뭐가 아닌가? 강우, 네 얼굴에 모든 것이 드러나 있는데.”
허진은 천천히 술을 마신 후 다시 술잔에 술을 채웠다.
“내일부터는 힘든 날들이 될 것이다. 오늘 하루는 편히들 쉬어라.”
허진은 천천히 술을 마시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서안의 야경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 * *
“흐음…….”
제갈묘의 뒤틀린 침음성이 길게 이어졌다.
“염라서생이 섬서성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보란 듯이 객잔을 잡고 쉬고 있단 말이지?”
오랜 침묵 끝에 제갈묘는 개방을 통해 올라온 보고서를 재차 확인했다.
“그렇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는지 그자의 머릿속을 갈라 직접 들여다보고 싶군. 끄응.”
전혀 생각지도 못한 허진의 돌출 행동에 제갈묘는 못마땅함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불만을 토했다.
“정보가 새어나간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었다.
무림맹 수뇌들 중에서도 일부만 극비로 알고 있는 문제가 새어나갈 리 없었다.
허진에 대한 정보는 진필성을 통해 내려와 자신을 거쳐 불취개로 내려간 것이다.
제갈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고개를 들어 불취개를 쳐다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개방 쪽에서 정보가 새어나갈 수 있냐는 물음을 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불취개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모른 척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불취개는 걸왕을 떠올리며 불편한 마음에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걸왕이 허진을 만났다는 건 사실이지만 걸왕을 통해 허진에게 지금의 일이 전해졌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지금은 걸왕이 허진을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번 일에 화산파를 동참시켜야겠습니다.”
제갈묘의 말에 불취개는 그 제안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미래는 개방과 제갈세가의 것이 될 것이니 너무 마음 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취개의 못마땅한 눈빛을 읽었는지 제갈묘는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결과는 한 가지입니다. 지금처럼 준비해 주세요.”
“알겠소, 군사.”
제갈묘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맹주께 가시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슬슬 황제 폐하를 알현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제갈묘가 방을 나가자 불취개는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은 보고서를 읽으며 이빨을 빠드득 갈았다. 그러더니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사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
불취개는 이 일이 끝나는 대로 걸왕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아무리 걸왕이 전대 방주고 자신의 스승이지만 개방이 천하제일방파로 크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된다면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억류시킬 생각이었다.
* * *
서안에서 편하게 하루를 쉬어서 그런지 오랜 객정(客程)을 치른 것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한결 가뿐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과 눈빛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더욱 긴장감과 차가움이 짙어졌다.
허진은 눈을 반쯤 감아 감각을 극에 달할 정도로 예민하게 만든 상태로 말을 몰고 있었다. 그런 그의 기감에 뾰족한 바늘과도 같은 살기가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부교주님. 이제 소화산 끝자락에 거의 다다랐습니다.”
허진은 국충의 말에 그제야 반개했던 눈을 떴다.
이제야 모든 것이 확인되었다.
이제 허진에게 있어 남은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다. 허진의 생각을 아무도 몰랐기에 국충을 비롯한 귀갑철마대와 암중에 숨어 있는 유령대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