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14화
그렇게 주루 앞을 지나치는데 둘러싼 인파들 틈에서 추운 바닥에 홀딱 벗고 드러누워 있는 거지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거참.’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그 거지는 걸왕이었던 것이다.
마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몇 발자국을 채 딛지도 못하고 걸음을 멈춰야 했다.
“봉 봤다! 낄낄낄. 마현, 이놈아!”
그 짧은 순간 걸왕 역시 마현을 알아본 모양인지 사방으로 내던진 넝마쪼가리 같은 옷을 재빨리 챙겨 들고는 자신을 둘러싼 인파들을 훌쩍 뛰어올라 마현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온 것이다.
“인정머리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에잉, 쯧쯧쯧.”
걸왕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오랜만입니다.”
마현은 걸왕을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그가 자신을 발견하고 이렇게 앞에 떡하니 서 있으니 더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으으으, 춥다. 인사는 어디 들어가서 하자.”
걸왕은 고개를 젖혀 조금 전 그가 난동(?)을 피운 그 주루를 쳐다보았다.
“가자.”
그리곤 마현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아직 사람들이 모여 있는 주루로 걸어갔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의 어깨까지 두드려 주며 말이다.
“아시는 분인가요?”
설린은 그런 걸왕의 모습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저 안면만 조금 있을 뿐이오. 갑시다.”
마현은 걸왕을 무시하고 설린과 함께 다시 번화가 대로를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지금은 걸왕을 만나 느긋하게 식사하고 술 한 잔 곁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몇 발자국 다시 내딛었을 때였다.
“에라이, 이 똥물에 튀겨도 시원찮을 놈아!”
걸왕의 걸걸한 목소리가 다시금 터져 나왔다.
“기껏 네놈 스승 일로 이 추운 곳까지 왔건만…….”
걸왕의 말을 무시하고 걷고 있던 마현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마현이 걸왕을 향해 획 몸을 돌려세웠다.
“낄낄낄.”
걸왕은 마현을 향해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런 걸왕을 한참이나 주시하던 마현은 결국 설린에게 다시 말했다.
“잠시 합석을 해야 할 듯싶소. 괜찮겠소?”
설린으로서는 둘이 있고 싶었지만 이미 마현의 마음이 처음 보는 거지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마현은 설린과 함께 걸왕이 서 있는 주루로 향했다.
그냥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싶었지만 걸왕이 가장 상층의 귀빈층이 조용하고 한적하다며 떼를 써 결국 귀빈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걸왕은 설린과 소개도 하기 전에 대뜸 점소이를 시켜 주루에서 가장 비싼 음식들과 북해에서만 만들고, 또 그 값이 비싸 아무나 먹을 수 없다는 설화주까지 시켰다.
그 안하무인의 모습에 설린은 가볍게 낯을 찌푸렸다.
“네가 빙화라는 아이냐?”
걸왕은 점소이를 재촉해서 음식도 나오기 전에 먼저 나온 설화주를 개봉하며 설린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가요?”
걸왕은 술주둥이에 코를 가져다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크으……, 주향 좋고.”
걸왕은 설린의 물음을 가볍게 무시하며 술잔에 설화주를 따랐다. 그리곤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마시기 시작했다.
“캬! 좋다!”
감탄사를 터트리며 걸왕이 다시 술잔에 설화주를 채웠다. 그런 걸왕의 눈은 설린을 향해 있었고 잠시 후엔 힐끔 마현을 보았다.
“좋아하냐?”
“네?”
당황한 것인지 설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현, 저놈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재차 묻는 걸왕의 질문에 설린의 표정은 급격히 차가워졌다.
“상당히 무례하군요.”
“낄낄낄.”
걸왕은 짓궂은 웃음기를 머금으며 다시 술잔을 들었다. 그 웃음기에 발끈한 설린은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걸왕을 압박했다.
“에잉, 어찌된 게 이곳은 어른을 공경할 줄 몰라.”
걸왕은 투덜거리며 마현을 쳐다보았다.
“네놈 앞도 캄캄하다. 아니 끼리끼리 만났으니 천생연분인가?”
걸왕은 마치 귀찮은 파리를 쫓듯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걸왕을 에워싼 설린의 기운이 봄날 볕에 녹는 눈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더욱 차가워진 설린은 걸왕을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존함이 어찌되시나요?”
말을 높였지만 결코 사근사근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 걸왕.”
설린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선배님, 농이 지나치십니다.”
마현의 목소리도 좋을 리 없었다.
“이것 봐, 딱 천생연분 맞구먼. 낄낄낄.”
“선. 배. 님!”
마현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게 깔렸다.
“알았다, 이놈아! 어째 네 스승과 하나도 다르지 않냐?”
“이제 농은 그만하시고, 스승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아, 맞다! 이놈의 정신머리하고는.”
마현의 말에 걸왕은 이마를 탁 쳤다.
“이곳에 오기 전에 사천성에서 네놈 스승을 만났다. 너 구한다고 마교에서 나왔다고 하더구나.”
마현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그런데 말이다……, 네놈 스승이 하는 말이…….”
걸왕은 조금 전과 달리 심각해진 얼굴과 목소리로 허진이 율기의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화산으로 향했다는 말을 전했다. 더불어 신비문파 검림과 율기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자신이 추론한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파삭!
걸왕의 말이 끝날 때쯤 마현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부서졌다. 손등에 힘줄이 돋아난 것도 모자라 그의 손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반면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입술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잔잔해 보이는 눈동자에서는 이미 살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거기에 반해 외부로 드러나는 마현의 모습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먼저 일어나겠소.”
왜 이곳에 설린과 함께 나왔는지에 대한 일은 이미 마현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설린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마현을 잡을 수가 없었다.
* * *
동이 틀 무렵 여전히 사위가 어두운 새벽.
횃불을 켜기도 애매한 시간, 어둠 속에서 검은 복장으로 일통한 흑풍대가 오와 열을 맞추고 북해빙궁 대연무장에 서 있었다.
그들 앞에 마현과 회회혈마가 서 있었다.
“회회혈마.”
“예, 주군.”
“그대는 먼저 본교로 돌아가라. 가서 가 당주를 만나 무영대를 통해 율기에 대한 정보를 얻으라. 그 후 율기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알겠습니다, 주군.”
회회혈마는 곧장 북해빙궁에서 내어준 백마 위에 올라탔다.
“회회혈마.”
“……?”
“그대는 내 사람이다. 본인보다 먼저 죽는 수하는 필요 없다.”
“그 말씀 뼛속까지 깊게 새겨두겠습니다, 주군.”
회회혈마는 말고삐를 당겨 북해빙궁을 벗어났다.
“풍!”
마현은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는 다크 스티드 풍을 깨웠다.
푸히이이잉!
바닥이 갈라지고 한 마리 흑마가 어둠 속에 뛰쳐나왔다. 마현은 즉시 풍에게 올라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흑풍대원들이 서 있는 땅 옆에서 다크 스티드들이 튀어나왔다.
북해빙궁을 떠날 준비가 끝나자 마현은 몸을 돌려 대연무장을 내려다보는 하나의 커다란 전각을 올려다보았다. 그 2층에는 북해빙궁주 설관악을 비롯해, 설린, 냉하상, 냉천휘가 서 있었다.
마현은 그들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거기에 맞춰 답례를 하는 설관악을 보며 마현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 옆에 서 있는 설린에게로 향했다.
착찹하고 미안한, 그리고 애틋한 시선으로 잠시 설린을 쳐다보던 마현은 애써 감정을 잘라버리고 고개를 돌려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푸히이잉!
풍의 흉맹스러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자!”
“명!”
“명!”
마현을 선두로 서른한 기의 검은 인마들이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만 대연무장에 남겨두고 북해빙궁을 빠져나갔다.
* * *
아마 자금성을 보지 못한 촌부라면 이게 바로 자금성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웅장한 규모를 가진 중경 대로 북쪽에 위치한 장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원을 상징하던 편액이 지금은 부서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인적 또한 없어 오히려 그 큰 규모는 장원을 더욱 더 을씨년스런 흉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곳은 중원 서쪽의 또 다른 황제가 산다고 세인들에게 알려진 바로 그 중평왕부였다.
역모에 몰려 피에 뒤덮였던 중평왕부에 피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
놀랍게도 그 주인은 무림맹 맹주.
그리고 중평왕부는 그로 인해 무림성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편액이 바뀌었다.
더욱 놀랄 일은 앞으로 대략 달포 후면, 무림맹주에게는 천무왕이란 직책이 내려지고, 그로 인해 무림성은 천무왕부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림성이 된 장원은 개방 제자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의해 을씨년스럽던 흉물을 벗어 버리고 다시 웅장한 장원으로 태어났다.
워낙 잘 지어진 왕부였기에 대대적으로 손을 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왕부라는 이름을 이어가지만 무림맹의 성이었기에 무림인들에 맞춰 세부적인 부분은 손 볼 곳이 제법 있었다.
무림성의 보수공사는 개방이 전담했다. 그 말은 곧 불취개가 책임을 지고 일을 진행시킨다는 의미였다.
무림성 내부 공사를 총괄하는 불취개에게 총타에서 정보를 관리하는 한 장로가 보내온 보고서가 전해졌다.
보고서를 보더니 불취개의 얼굴이 우락부락 일그러졌다. 그 보고서에는 얼마 전 사천성에서 개방의 태상방주인 걸왕과 마교 부교주 허진이 만났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사실이 맹에도 전해졌느냐?”
“아닙니다. 개 장로께서 이 건은 맹에는 알리지 말고 비밀에 부치라 엄명을 내려놓은 상태입니다.”
“다른 곳에 전해진 것은 없고?”
“그곳에 있던 속청검문 문주는 죽고, 소문주는 반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속청검문 제자들을 모두 회유하여 함구하도록 시켜놓았습니다.”
“다행이군. 알았다, 가 보거라.”
개방 제자가 돌아가고 불취개는 불만에 가득 찬 눈으로 어금니를 박박 갈았다.
‘이 노친네는 이런 민감한 시절에 왜 마교의 부교주를 만나고 지랄이야.’
혹 망령에라도 든 게 아닌가 생각해 봤지만 그건 아닐 듯했다. 불취개가 아는 걸왕은 벽에 똥칠할 때까지 맨 정신으로 세상을 누빌 위인이었다.
‘하필 이 시기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림맹으로 통하는 모든 정보를 개방이 움켜쥐었다는 것이다.
불취개는 총타로 돌아가려는 개방 제자를 다시 불렀다.
“전 개방도에게 전문을 보내라 전하거라. 태상방주를 보면 이 제자가 제발 좀 보자고 하더라고.”
“알겠습니다, 방주님.”
불취개는 보고서를 찢어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어댔다.
“무엇을 그리 맛있게 드십니까?”
그때 갑작스럽게 들려온 제갈묘의 목소리에 불취개는 화들짝 놀라 사레라도 든 것처럼 콜록거렸다.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드신 겁니까?”
제갈묘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가와 불취개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었다.
“아, 아니오.”
불취개는 잘 넘어가지도 않는 종이를 애써 목구멍으로 집어삼켰다.
“쿨럭, 쿨럭.”
그렇게 서너 번 더 기침을 하고 나서야 불취개는 텁텁한 입맛을 모두 날릴 수 있었다.
“군사께서 갑자기 어인 일로 이렇게 빨리 오셨소?”
원래 제갈묘는 이틀 후에 무림성으로 오기로 되어 있었다. 불취개는 혹시나 개방 제자와 나눈 이야기를 들었나 싶어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