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63화 (163/351)

# 163

13화

“비록 관과 무림이 불가침의 영역이라고는 하나 황제 폐하의 소집령이 떨어지면 그 황명에서 다들 자유롭지 못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크흠.”

“험, 허험.”

제갈묘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여기저기서 불편한 음성들이 튀어나왔다.

“결론은 무림이 제아무리 다른 세상을 표방하고 있어도, 황제 폐하의 신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들 황제 폐하 앞으로 우르르 몰려가 무릎이라도 꿇고 황군이라도 되자는 것이오?”

“아닙니다. 어차피 큰 전쟁이 발생한다면 우리 무림이라고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가 먼저 그 제의를 수락한다면 돌아오는 혜택은 상상 이상이라서 그렇습니다.”

설득력이 강한 제갈묘의 말에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다들 어느 정도는 수긍을 하는 듯했다. 그 모습에 제갈묘는 득의에 찬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중평왕부를 무림성으로 사용할 수 있고, 한시적으로 무림맹주 직을 가진 이에게는 천무왕(天武王)이라는 호칭이 내려지며, 무림성에는 천무왕부라는 또 다른 호칭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겠습니까?”

제갈묘의 말에 다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관에서도 앞으로 무림맹을 쉽게 어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중평왕이 그러했듯이 매년 황실에 정해진 세수만 올린다면 중경에서 거둬지는 막대한 세금을 무림맹 운영비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늘 운영비를 걱정해야 했던 무림맹으로서는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얘기였다.

제갈묘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탁자에 손을 얹고 몸을 앞으로 당겼다.

“하지만 더 중한 것이 있습니다.”

몸을 틀었던 혜공대사마저 몸을 반듯이 하고 제갈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는 마교나 새외삼궁을 공격할 수 있지만…….”

제갈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들은 우리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제갈묘가 자리에 앉은 이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눈으로 훑었다.

“대외적으로 무림맹주는 천무왕, 무림성은 천무왕부입니다. 우리가 그런 특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황군이기 때문입니다.”

제갈묘는 느긋하게 탁자 위에서 손을 뗐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 황제 폐하 앞에서 충성 서약을 해야 하거나, 아니면 충성 서약서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오?”

무림의 성격상 관과 거리를 두던 습성이 있어서 그런지 그런 좋은 조건을 듣고도 다들 여전히 께름칙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번거롭지 않습니다. 일이 성사된다면 맹주님과 저, 이렇게 둘만 황성으로 갈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일파의 종주들이 굳이 황제에게 충성서약을 하거나 머리를 굽실거리지 않아도 된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이제 분위기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흘러갔다.

“제갈 군사께서 참으로 대단한 일을 했소이다.”

불취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다른 이들처럼 그다지 놀란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이 놀라고 있을 때 제갈묘를 한층 치켜세워 주었다.

“다행히 조정과 연을 이어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제갈묘의 말에 다들 호기심 어린 눈빛을 띠었다.

“안 그래도 앞으로 무림맹을 이끌어갈 때 많은 도움을 주실 분이라 모셨습니다. 미리 허락을 받지 않아 죄송합니다.”

제갈묘는 여태 오만한 태도를 보였던 그답지 않게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외부 인사가 끼어들었다는 말에 다들 조금씩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한편으로 호기심 어린 모습들도 보였다.

“들어오시지요.”

제갈묘의 말이 끝나자 방문이 열리며 풍채가 좋은 오십대의 장년인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림의 쟁쟁한 영웅들을 보니 절로 몸이 숙여지는구려. 본인은 구금상단의 금대치라고 하외다.”

“구, 구금상단?”

“그, 금대치?”

“중원 상계를 거머쥐고 있다는 그 구금상단의 금 대인이란 말이오?”

좌중은 또 한 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한 반응은 얼마 전 제갈묘가 그랬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 촌부를 이리도 알아봐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허허허.”

몇몇 인물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언제까지 인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 제갈묘가 슬쩍 끼어들며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이번 일에도 많은 도움을 주셨지만 앞으로도 무림맹뿐만 아니라 오파일방과 육대세가에 큰 도움을 주신다기에 이 자리에 초대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금 대인.”

“고맙습니다.”

금대치는 제갈묘의 안내에 따라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평소 무림의 영웅들을 이 금 모가 흠모해 왔지만 그동안 연이 없어 그저 멀리서 동경만 했소이다. 그런 제게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신 맹주님과 군사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금대치는 몸을 돌려 진필성과 제갈묘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도 이 금 모가 장사치라 금전적으로 도움을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그 말에 다들 얼굴에 실망감이 맴돌았다.

“하지만 평소 무가에 필요한 것들이 많을 것으로 아오. 하여 작지만 구금상단을 이용해 주신다면 어떤 물품이든 간에 시가의 7할로 납품해 드리겠소이다.”

그 말에 좌중의 얼굴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실망감이 사라졌다. 아니 좋아서 입이 벌어지려고 하는 것을 애써 참는 기색들이었다. 7할이라면 보통 특혜가 아니다.

한두 냥일 경우 그 차이가 미미하겠지만, 그것이 수천, 수만 냥의 액수일 경우엔 어마어마한 경비를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문파와 세가들이 운영비의 3할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그 3할 만큼의 이익이 새로 생긴다는 것이니 다들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왕지사 무림맹에, 그리고 각 문파에 큰 힘을 주시는 만큼 단순한 명예직이지만 금 대인께 장로의 신분을 드리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금 대인은 금 대인대로 무림맹을 등에 업어서 좋고, 그래서 더욱 상권이 커지면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되고. 다들 어떻습니까?”

물어보나 마나다.

실질적으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직책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름뿐인 명예직이다.

오히려 그 명예직으로 인해 더 많은 것을 받아낼 수도 있었다.

“찬성이오.”

“아미타불.”

“그래서 이 제갈 모가 별호도 하나 준비를 했습니다, 금 대인.”

“별호라……, 이거 한낱 장사치가 너무 과한 것을 받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금대치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금검(金劒)이면 어떨까 싶습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딱!

“그거 참으로 좋은 별호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별호는 없을 것 같소이다, 하하하.”

저마다 조금이라도 금대치에게 잘 보이고자 제갈묘의 말에 박수를 치고, 무릎을 치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화의 주도권은 은연중 제갈묘에게로 흘렀다. 그가 이처럼 뛰어났던 인물인가 의아심이 들 정도로 그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금검이라……, 귀하게 쓰겠소이다. 감사하오.”

금대치는 활짝 웃음을 지으며 과장될 정도로 크게 포권을 취해 좌중의 인물들에게 일일이 허리를 숙였다.

무림성과 금대치의 영입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제갈묘에게로 힘의 저울이 살짝 기울어졌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제갈묘는 그런 흐름을 깨달았다.

흡족함을 넘어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으나 제갈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아, 청하 장문인.”

“……?”

“태극수검과 태극검룡이 이곳으로 왔다구요?”

제갈묘는 오늘 오후 제갈세가를 방문한, 정확히는 청하진인을 찾아온 학방과 학성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렇소이다, 무량수불.”

“무림맹 차원에서 청천대(晴天隊)를 준비 중인 것은 아시지요?”

청천대는 오파일방과 육대세가, 그리고 중소문파 중 실력이 뛰어난 후기지수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무력단체였다.

청하진인은 고심하는 척 고개를 살짝 숙인 후 곁눈질로 맹주 진필성을 살폈다. 그를 향한 청하진인의 눈에 연기가 아닌 진짜 고심 어린 감정이 담겼다.

‘흠…….’

청하진인은 깊은 침음을 삼켰다.

무단가출했던 학방과 학성이 돌아왔다.

걸왕의 서신과 함께. 그리고…….

“무당파의 주춧돌이 될 아이들이니 잘 부탁드리오.”

“아무렴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갈묘의 기꺼워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청하진인은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묵음에 가까운 도호가 그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무량수불…….”

눈을 감은 청하진인은 보지 못했다.

아니 청하진인뿐만 아니라 다들 눈뜬장님인지도 모른다.

희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진필성. 우검 호법과 금대치의 눈이 마주한 것과 그 둘의 눈동자에서 황금빛 기운이 감돌다 사라진 것, 그리고 둘 사이에 오간 희미한 웃음을.

* * *

어수룩한 밤, 마현은 내일 이른 아침 북해빙궁을 떠나겠다는 뜻을 설관악에게 전하고 궁주실에서 나왔다.

궁주실 앞에는 설린이 서 있었다.

“내일…… 떠나신다고요?”

그냥 지나치기엔 설린의 목소리가 너무나 처량했다.

“그렇소.”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기에 말을 받아주었지만 그 마음을 외면했기에 목소리는 따뜻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몰차게 설린을 두고 그냥 지나칠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그녀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북해빙궁 소궁주 자리를 버린 것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설린에게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였으리라.

“좀 걷지 않겠소?”

“이왕이면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요.”

조금 전 해가 졌다.

“알았소. 그리합시다.”

한밤이 되려면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에 마현은 그녀의 뜻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색하게 내딛은 발걸음이 궁 밖 번화가까지 이르도록 둘 사이에는 간단한 대화마저도 없었다.

그렇게 번화가에 들어선 둘은 발걸음을 멈췄다.

사실 마현이 걸음을 멈췄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번화가로 들어서게 되었지만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이 거리를 산보하듯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발걸음을 돌리려니 마땅히 갈 만한 곳을 알지도 못했다.

“어디 조용한 주루라도 혹 알고 있소?”

마현의 질문에 설린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평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궁 안에서 무공 수련에만 전념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괜찮은 주루를 알 리가 만무했다.

“그럼 저기로 가는 것은 어떻소?”

마현은 근처의 건물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을 가리켰다.

“좋을 대로 하세요.”

조금 전까지는 설린이 반걸음쯤 앞서 걸었지만 이번엔 마현이 앞서 걸음을 내딛었다.

“아이고, 사람 죽네, 사람 죽어!”

주루에 가까이 다가가자 시끌벅적한 소란이 일었다.

“아이고, 아이고. 이 늙은 몸, 그저 살자고 음식 잔반이나 달라고 했거늘……, 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

사람들에 둘러싸여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주루 앞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을 보며 주루로 들어가는 계단 위에 서서 몇몇 인물들이 오만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언뜻 보아 주루에 관련된 사람들 같았다.

“그래, 굶어 죽나 얼어 죽나 매한가지다, 이놈들아. 차라리 얼어 죽으마.”

둘러싼 사람들 머리 위로 꾀죄죄한 넝마 같은 옷이 훌훌 날아올랐다.

하지만 이상한 것이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호기심에 모였지만 구걸하는 거지를 향해 동정의 눈빛을 보내는 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경멸하는 눈빛을 가진 이들도 종종 보였다.

“야박하다, 야박해. 북해의 인심이 설풍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구나. 아이고! 아이고!”

“이상한가요?”

설린이 마현의 반응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뭐 조금은…….”

“북해는 아주 추운 지방이죠. 여기서 살려면 누구든 일을 해야 해요.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특히 북해는 살기 위해 일을 했어요. 그렇다 보니 거지가 없죠. 추운 곳에서 가만히 있으면 곧 죽음으로 이어지니까요.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그것이 북해에서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그 뒤로 몇몇 설명이 이어졌지만 마현은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고, 많은 방식이 있다. 그걸 굳이 자신의 기준에서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가요.”

마현은 다른 주루를 찾기 위해 설린과 함께 번화가 안쪽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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