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2화
“일단 화산파 장로의 이야기를 들은 후 판단하지.”
“아!”
그동안 너무 급박하게 지낸 터라 그만 그를 까먹고 있었다.
마현의 손짓에 흑사신과 왕귀진, 철용, 그리고 회회혈마는 뒤로 물러나 공간을 만들었다.
공간이 생기자 마현의 몸에서 순수한 사기로 이루어진 흑무가 피어올랐다. 그 흑무는 마현의 손에 이끌려 땅으로 흡수되었다.
“소울 서먼즈!”
흑무가 흡수된 땅은 먹물이 흙바닥에 스며들듯 검게 물들었다.
검게 물든 땅 한가운데서 푹 하고 푸르스름이 더해진 새하얀 손이 솟아났다. 죽은 자의 손아래, 그가 생전에 입고 있던 옷의 소맷자락 끝에는 분홍색 화사한 매화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바로 화산파에서 자결한 장로 허담이었다.
밖으로 드러난 허담의 시신 위에 다시 뿌연 연기가 솟아오르며 또 하나의 허담, 바로 그의 혼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히익!
땅바닥을 뚫고 올라온 허담의 혼백은 마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공포에 질린 듯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했던지 다시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혼백의 손은 흙 한 줌 들어올리지 못하고 헛된 몸부림을 칠뿐이었다.
마현의 눈에서 검은 기운이 폭사되어 허담의 혼백을 휘감았다.
마치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허담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혼백의 목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마현을 향해 돌아갔다.
―몰라, 나는 아무것도 몰라!
허담은 마현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했지만 그의 혼백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너는 누구지?”
―나, 나는 화산파의 자, 장로다!
“갈! 혼백이 되고서도 거짓을 늘어놓는 것인가?”
사기가 가득 담긴 그 일갈에 혼백의 몸이 한순간 흩어졌다가 다시 제 모습을 갖추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정신이 나간 모습이었다.
“혼백이 지워져 영원히 소멸되고 싶은 것이냐?”
마현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기에 살기가 더해졌다.
그러자 허담의 혼백은 몸을 웅크리며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말하라, 너는 누구냐?”
―나는, 나는…… 부, 분명 화산파의 자, 장로다.
거짓이 아니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인가?”
―리, 림……. 그들이 내 노부모를…….
허담은 장황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림? 검림인가?”
마현은 검림주 진필성을 떠올리며 싸늘하게 물었다.
―모, 모른다. 그저 림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이다.
허담은 고개를 젓다가 갑자기 번쩍 눈을 떴다.
―들었다, 우연히……. 한 인물의 이름을…….
“그게 누군가?”
―유, 율기…….
쿵!
쇠뭉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그 순간 마현은 충격에 빠졌다.
“유, 율기?”
마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 혼란스러움은 재빨리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율기라는 단어와 금마공이 연결되었다.
“주, 주군.”
회회혈마는 파리해진 안색으로 말을 더듬으며 마현을 불렀다.
마현은 차가운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허담의 혼백이 사라지며 그의 시신이 땅속으로 다시 파묻혔다.
‘군사, 네놈이 왜 나를 향해 칼날을 내밀었는지 모르나…….’
마현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그 이유를 밝혀야 할 것이다.’
마현은 몸을 돌렸다.
“본교로 돌아간다!”
“충!”
“명!”
* * *
뽀드득 뽀드득.
하얀 눈밭에 발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너덜너덜하지만 꽤나 두꺼운 짐승 가죽을 모포처럼 온몸에 두르고 한 거지가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걷고 있었다.
바로 걸왕이었다.
“엣취!”
코를 연신 훌쩍이던 걸왕은 결국 기침을 내뱉었다.
“으으으으, 춥다!”
걸왕은 코 밑으로 삐져나온 콧물을 소매로 훔치며 품에서 호로병 하나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호로병에 담긴 술을 두어 모금 들이켠 걸왕은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술에서 느껴지는 짜릿함 때문인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말년에 이 무슨 고생이냐.”
푸념을 늘어놓으며 걸왕은 가죽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놈아, 너 젊을 때 그렇게 탱자탱자 놀면 늙어서 손발이 고생한다.”
30년 전에 돌아가신 스승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쩝쩝.”
걸왕은 괜한 입맛을 다시며 손가락으로 귀를 박박 긁었다.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걸왕은 제자인 불취개를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불취개만 똑바로 현실을 직시하면 사실 자신이 이렇게 노구를 움직여 뛰어다닐 일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불취개는 개방이 거지들의 방파라는 것을 잊은 듯 대문파의 방주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개방을 잘 이끌었고, 또 자신이 이래라저래라 하기도 귀찮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결국 그 업보가 돌고 돌아 지금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셈이니 누굴 원망할 것도 못되었다.
“에효, 이 박복한 삶. 누구를 탓하리요.”
거기에 죽기 전에 엄청난 크기의 짐을 휙 던져놓고 가버린 친우 현도상인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렇게 시발점을 찾다보니 결국 문제의 시작은 마현이었다.
“에라이, 우라질 놈.”
하긴, 마현을 찾아 이 추운 북해까지 왔으니 절로 욕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걸왕은 이내 끄응 앓는 소리를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결국 자신이 사천으로 갔으니 그를 만났고, 호기심에 쫓아다녔으니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자신 탓이었던 것이다.
“마현 그놈, 북해에 없으면 안 되는데.”
허진과 헤어지고 나서 걸왕은 방향을 북해로 잡았다. 마현이 있을 확률이 가장 큰 곳이 바로 북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는 길에 어렵사리 마현이 북해로 향한 듯한 흔적도 찾을 수 있었다.
“그 두 놈은 잘 하고 있으려나?”
그렇게 투덜거리며 길을 걷는 걸왕의 눈에 진득한 장난기가 어렸다.
* * *
제갈세가 내원 깊숙한 곳에는 유서 깊은 아담한 별채가 있다. 가주실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그 별채 앞에는 황혼당(黃昏堂)이란 현판에 걸려 있었다.
황혼당은 바로 제갈세가의 원로들이 무림에서 은퇴한 후 마지막 여생을 보내는 곳이었다. 하지만 현재 제갈세가에 원로가 없어 비어 있던 곳을 제갈묘가 약간 손을 봐 임시로 무림맹주 진필성의 거처로 만들어주었다.
황혼당 내 큰 거실.
긴 탁자와 십여 개의 의자를 놓아 회의실로 바꾼 곳에 오파일방 장문인들과 육대세가 가주들이 진필성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본 맹주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소집을 해 다들 경황이 없을 것이오. 그 점은 미안하나 중대한 사안이 있어 그런 것이니 다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진필성의 말에 대부분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는 이들도 없었다.
“제갈 군사.”
“예, 맹주님.”
“어차피 군사가 큰일을 한 것이니 내 입을 비는 것보다야 군사가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소?”
“그리 말씀을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갈묘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오파일방 장문인들과 육대세가 가주들을 향해 몸을 틀었다.
약간 고개를 들고 시선을 깔자 마치 그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자세가 신경을 곤두세우면 오만해 보이고, 무심하다면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미묘했다.
“험험.”
제갈묘는 헛기침을 시작으로 입을 열었다.
“이 제갈 모가 여러분을 급작스럽게 모시게 된 이유는 바로 무림성 때문입니다.”
진필성이 무림성을 짓겠다고 공언했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달포 전쯤 일어났던 중경(重慶) 중평왕부(重平王府) 왕야의 역모를 혹 다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오만?”
종남파 장문인 곡상천이 무림성의 일과 중평왕의 역모가 무슨 상관이 있냐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비록 관과 거리를 둔 무심한 무림인들이라고는 하지만 역모 사건은 다르다.
천하를 떠들썩하게 뒤흔든 사건이기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단순한 역모가 아니라 역모의 주모자인 중평왕은 작금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인지라, 어느 때보다 황제의 노여움이 컸었다. 그러니 불똥이 엄하게 튀지 않을까 민초들은 물론 그 인근 지방의 무림인들까지 한동안 바싹 허리를 숙였었다.
다행히 역모가 일어나기 전 발각된 터라 천하가 피로 물들지는 않았다.
“그 역모 사건으로 인해 현재 중경에 위치한 중평왕부의 주인이 없습니다.”
“제갈 군사, 그 정도는 다 아는 이야기요.”
곡상천은 뻔히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왜 하냐며 짜증스런 목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그 말에 맞장구를 친 사람들은 은근히 제갈묘가 견제하기 시작한 장문인들과 가주들이었다.
“다 이유가 있으니 그러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그냥 참고 들어봅시다.”
이미 제갈묘와 손을 잡은 불취개가 나서 제갈묘의 편을 들어주었다.
“사실상 무림성을 짓는 데 있어서 부지를 정하고 터를 만들어 짓는다면 족히 삼 년은 걸릴 것입니다. 또한 그리 되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제갈 군사께서 말하려는 요지가 도대체 무엇이오?”
화산파 장문인 담기량을 대신해 이 자리에 참석한 화산파 중향각주 독소명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비어 있는 중평왕부를 무림성으로 쓰고자 합니다.”
제갈묘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다들 얼마나 놀랐는지 개미 새끼 한 마리 기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실내가 조용해졌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요.”
독소명이었다.
진필성과 불취개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 하나같이 독소명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비어 있어도 왕부는 왕부다.
한 마디로 관이라는 소리다.
그런 곳을 무림성으로 쓰자고 하다니, 애초에 말이 안 되었다. 아니 설렁 쓰겠다고 내부적으로 결론이 났다고 치자. 관에서, 아니 그보다 황실에서 결코 용납하지 않을 일이다.
“제갈 군사,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이 되는구려.”
남궁세가 가주 남궁백공이었다.
노골적인 불만과 조롱이 담긴 시선에도 제갈묘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갈묘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황실에서 허락했습니다.”
쿵!
공기가 천근만근 무겁게 실내를 찍어 눌렀다.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지만 귀에서 큰 종이 울린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미, 믿을 수 없소이다.”
곡상천이 불신의 얼굴로 소리쳤다.
곡상천뿐만 아니라 다들 비슷한 표정들이었다.
“허락하는 대신 조건이 있으며, 받아들이면 그에 따른 혜택이 있습니다.”
제갈묘는 사람들의 그런 표정을 무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중평왕부를 무림성으로 쓰는 대신 무림맹은 황실에, 정확히 표현하자면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해야 하며 그에 따라 큰 전쟁이 발생할 시 황군으로 참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무림맹이 황군이 된다는 뜻이나 다름없지 않소이까? 불가하오, 불가!”
소림사 방장 혜공대사는 벌게진 얼굴로 소리치고는 몸을 홱 돌렸다. 더 이상 제갈묘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뜻이다.
“혜공대사.”
“아미타불!”
제갈묘가 불렀지만 혜공대사는 눈을 꾹 감으며 불호만 읊어댔다.
“매년 상당한 액수의 황실의 돈이 기부 형식으로 소림사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건 무당파도 매한가지지요?”
“아미타불.”
“무량수불.”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혜공대사와 청하진인은 불호와 도호를 읊었다. 제갈묘는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