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10화
“왜 개방이오?”
“방주라면 나와 뜻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판단했소.”
“……?”
“무력이 약하다 하여 천대받았던 둘이, 천대하는 이들을 부려먹는 날이 왔으니까.”
제갈묘의 말에 불취개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불취개의 눈빛을 제갈묘는 놓치지 않았다.
제갈세가와 개방.
그 두 세력이 당당히 천하에 이름을 올린 것은 무(武)가 아니었다.
지략의 제갈세가, 정보의 개방.
무림에서 무가 아닌 지략과 정보로 이름을 세운 두 곳이었다. 하지만 무림은 오로지 힘으로 군림한다고 여겨지는 곳. 그렇다 보니 제갈세가와 개방은 알게 모르게 업신여김을 당해왔었다.
“개방의 정보와 제갈세가의 지략이 만나면 그 어떤 무력보다 강력한 힘이 될 것이오.”
“흠……, 일리 있는 말이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는 법.”
“푸하하하하!”
제갈묘의 의미심장한 말에 불취개는 우렁찬 웃음을 터트렸다. 제갈묘를 쳐다보는 불취개의 눈동자는 뜨겁게 이글거렸고, 제갈묘의 눈동자는 차가울 정도로 냉정하게 식어갔다.
어쩌면 동상이몽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뜻이 하나로 모인 것이다.
“우리가 처음 합작할 일은…….”
“일은?”
“염라서생 허진을 잡는 것이오.”
* * *
촛불이 일렁일 때마다 사방 벽면에서 다섯 개의 그림자가 춤을 추었다. 그 촛불에 비춰진 네 흑사신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보기 좋군.”
마현은 그들의 몸에서 은은하게 풍겨나는 더욱 짙어진 어둠의 향기에 흡족한 듯 미소를 살짝 지었다. 마현의 손에 다시 소환된 네 흑사신은 과거의 힘에 한층 다가선 자신들의 마력을 마음껏 음미하고 있었다.
다들 들떠 있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침작한 얼굴을 하고 있는 흑권을 보며 마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흑사신의 수장이라는 건가?”
마현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세 흑사신은 흑권과 마현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있음을 알았다. 둘 사이의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흑사신은 들뜬 감정을 수습했다.
“수장, 왜 그래?”
흑도가 흑권의 옆구리를 툭 쳤다.
하지만 흑권은 마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연스레 흑권을 제외한 세 흑사신은 의아한 눈으로 마현을 쳐다보았다.
“어떤 말을 듣고 싶나?”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높낮이가 없는 나직한 어조였다.
마현은 팔짱을 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흑권을 바라보던 마현이 팔짱을 풀며 말문을 열었다.
“본인의 성장은 그대들의 성장과 이어지지. 그건 그대들의 생존과 힘의 바탕이 어둠이 아닌 본인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마현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나는 이곳 중원의 사람이 아니다. 하르센 대륙이라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왔지. 그곳에는 마법사라는 별종들이 산다. 나는 그 마법사가 걸어야 할 두 갈래 길 중 어둠인 흑마법사의 길을 걸었다. 그곳에서 나는 중원의 표현대로 부르자면 천하제일인이었다. 그리고 현재 본인은 그때의 힘을 되찾았다.”
흑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현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이해한 까닭이다.
마현에게 전이된 지식으로 인해 하르센 대륙과 마법사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
비록 경험이 아닌 지식을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천하제일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세상에서 마법이라는 길로, 그 길을 걷는 마법사들의 정점을 찍었다는 의미일 터.
마현의 달라진 기도가 지금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단지 6서클에서 7서클로 한 단계 상승한 것뿐이지만 자신들에게 이어진 힘의 상승과 더불어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아마도 마현의 적수를 따진다면 천하에 몇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찌되었든 마현은 올라갈 수 있는 최대한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뜻이다. 그것은 결국 흑도 자신을 비롯한 흑사신이 과거의 힘을 완전히는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흑권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뒤엉켰다.
흑권은 그것을 마현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지금의 자신이 무엇 때문에 고민을 하는 것인지.
그렇다.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마현을 주군으로 섬길 것인지……, 아니면 다시 깊은 어둠으로 돌아가야 할지를.
물론 지금처럼 주종의 관계도 아닌, 딱히 뭐라 꼬집을 수 없는 애매한 관계로 계속 지낼 수도 있다. 득도 실도 없는, 그저 서로의 필요에 따라 맺어진 계약 관계로.
하지만 흑권은 그리 살기 싫었다.
고민의 골은 깊어졌지만 가야 할 길을 향해 내딛을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마도의 길 끝에 마도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본교 사조이신 천마만이 밟으셨던 마신지경(魔神之境)이라는 경지가 있다지?”
마현의 잔잔하지만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흑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치 심연을 잡아당기는 듯한 힘이 느껴지는 마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마신지경이 허무맹랑하게 들린다면……, 탈마지경(脫魔之境)은 어떤가?”
담담하게 시작된 마현의 목소리에는 강렬한 그 무엇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흑권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마현의 집념을 보았다.
“백마법사나 흑마법사나 그 끝은 9서클이다. 단지 마신지경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직까지 인간의 힘으로 9서클에 오른 이가 없다는 것 뿐. 사실 8서클도 없긴 매한가지지만…….”
모호하게 말끝을 흐렸지만 그런 마현을 바라보는 흑권의 눈빛은 더욱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그 뜻은?”
“흑권, 그대답지 않군.”
마현의 말처럼 지금의 물음은 그답지 않았다. 그만큼 고민하고 있음이리라.
마현이 한 글자 한 글자 찍어내듯 강하게 내뱉었다.
“올라야지! 아니! 거기까지 기필코! 오르고 말 것이다!”
드르륵.
흑권은 의자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현에게서 눈을 떼고 세 흑사신을 일일이 쳐다보았다.
“이잉? 수장, 왜 그래? 오늘따라 이상하다.”
드르륵.
흑도가 흑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때 흑검과 흑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 다들 왜 그래?”
이유는 모르지만 흑도 역시 그들을 따라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권을 필두로 흑검과 흑창이 탁자 앞으로 나란히 서는 모습에 흑도의 인상이 구겨졌다.
분명 저 셋이 함께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뭔가가 있는 듯한데 자신은 도통 눈치를 챌 수 없다. 그렇다 보니 꼭 혼자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나빴다.
“흑도.”
흑검이 경건한 표정을 지으며 흑도를 향해 눈동자로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 어조가 마치 자신을 꾸짖는 듯해 흑도는 더욱 기분이 상했다.
“뭐?”
그런 흑검의 강압적인 태도에 흑도는 삐딱하게 서서 눈동자를 아래로 깔며 턱을 바싹 치켜 올렸다.
“좋은 말 할 때 옆으로 와라.”
마치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에 흑도의 눈썹이 역팔자 모양으로 그려졌다.
“흥!”
흑도는 입꼬리를 틀며 코로 거센 콧바람을 보란 듯이 팽 내품었다.
“너, 이 새끼…….”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흑검이 얼굴 가득 노기를 드러냈다.
“이 새끼 뭐? 그래, 어쩐지 한동안 뜸하다고 했지. 한판 붙을까? 앙?”
흑도는 흑검 앞으로 성큼 다가가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흑도.”
흑권이 나직하게 흑도를 부르며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리고, 흑검. 자네도 그만하게.”
흑권의 말에 둘은 입을 꾹 닫았지만 여전히 눈빛으로 으르렁거렸다.
흑권은 입술을 살짝 벌려 숨을 길게 들이마신 후 마현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는 앉아 있는 마현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끼익.
그때 방문이 열리며 왕귀진과 철용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방 안의 분위기가 무겁다는 것을 느끼자 조용히 방문을 닫고 구석자리로 걸어가 조용히 섰다.
흑권은 그들이 안으로 들어왔지만 전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여전히 마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뗐다.
“주군.”
작은 목소리였지만 무거운 적막에 휩싸인 방 안이라 구석에 서 있던 왕귀진과 철용의 귀에도 또렷하게 들렸다.
‘주, 주군?’
왕귀진과 철용은 고개를 번쩍 들어 흑권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의혹의 시선을 교환하면서도 좀처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군인 마현과 흑사신 사이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 엥?”
흑권의 난데없는 말에 놀란 것은 그들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흑도가 퉁방울 같은 눈을 한껏 부릅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죽은 몸에도 노환이 오나?”
흑도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벅벅 후벼 파며 흑권 곁으로 바싹 다가가 붙었다. 그리고는 흑권의 이마 위에 손을 얹었다.
“흠……, 열은 없고. 생각보다 수장의 이마는 차갑군.”
흑도는 흑권의 이마에 얹었던 손을 밑으로 내려 콧구멍 앞에 가져다댔다.
“하하하, 이거 본좌가 깜빡했군. 우린 숨을 안 쉬지.”
흑도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팔짱을 끼며 다리를 삐딱하게 만들어 짝다리를 짚었다.
“결국 노인네 노망이 드셨나?”
흑도는 턱을 쓰다듬으며 짐짓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빡!
손바닥 하나가 날아와 그런 흑도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악!”
그 충격에 흑도가 쪼그려 앉으며 양손으로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언놈이야?”
충격이 조금 가셨는지 눈을 시퍼렇게 부릅뜨며 흑도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런 그의 앞에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흑검이 보였다.
“너, 너!”
흑도는 손가락으로 흑검을 가리키며 눈을 부라렸다.
“그래, 안 그래도 질질 끈다 싶었다. 오늘 너 죽고, 본좌만 살자!”
흑도의 몸에서 은은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챙!
기다렸다는 듯이 흑검이 검을 뽑았다.
“갈!”
그런 둘 사이에 흑권의 노기 어린 마성이 터졌다.
좀처럼 흑권이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흑도는 움찔거렸고, 흑검은 검을 재빨리 집어넣고는 아무것도 모른 척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흑도도 흑도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흑검도 흑도에게 물이 드는 것인지 점점 능글맞게 굴 때가 많아졌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결국 다시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모습을 보이자 흑권은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휴우.”
흑권이 한숨을 푹 내쉬는 와중에도 흑도와 흑검은 흑권의 눈을 피해 눈동자를 사납게 굴리며 집요하게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흑권은 마현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었고, 마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피식 웃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현은 그 어느 때보다 기뻐하고 있었다.
“다들 듣게나. 어차피 새로 얻은 삶,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으니 앞으로 남은 인생 또한 뭔가에 걸어보는 것 역시 나쁘진 않을 거라 본좌는 생각한다네.”
흑권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바닥에 엎드렸다.
“속하, 흑권. 앞으로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과거 그대의 힘을 온전히 돌려줄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속하는 주군을 믿사옵니다.”
흑권은 숙였던 머리를 더욱 깊게 조아렸다.
그 모습에 자못 진중한 모습을 보이던 흑검이 슬쩍 주먹을 말아 쥐더니 흑권 뒤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렸다.
“속하, 흑검. 주군을 뵈옵니다.”
“흑창, 주군을 뵈옵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흑창도 흑검 옆에 엎드렸다.
“뭐야, 이거였어?”
그것을 보고서야 흑도는 괜히 소란을 떨었다는 듯이 혼자 툴툴거리며 터벅터벅 흑검 곁으로 걸어가 바닥에 엎드렸다. 하지만 엎드린 상태에서 고개를 들어 마현을 올려다보며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주인, 잘 부탁해.”
쿵!
옆에 부복하고 있던 흑검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손을 슬쩍 들어 흑도의 뒤통수를 잡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