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9화
“제갈 군사와 저는 이제 한 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갈 군사를 대하실 때 저라고 생각하시고 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금대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갈묘를 향해 좀 전과 달리 공손히 예를 갖춰 다시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제갈 군사.”
진필성은 제갈묘를 불렀다.
“예, 맹주.”
“무림성을 새로 짓는 것을 공표할 때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행하실 때 제갈 군사의 이름으로 해주시오.”
“어, 어찌?”
제갈묘는 진필성의 말에 깜짝 놀랐다.
만약 진필성이 직접 움직인다면 무림맹을 단숨에 휘어잡을 수 있을 만큼 금대치는 강력한 패였기 때문이다.
“본 맹주를 믿고 같은 배에 타주신 것에 대한 선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오.”
“매, 맹주.”
진필성의 말에 감동을 받았는지 제갈묘의 음성이 떨렸다.
이전과 달리 불신의 기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금대치의 재력이라면 무림맹에서의 입지는 둘째 치고 제갈세가를 천하제일의 무가로 만들고도 남을 테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리오, 제갈 군사.”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금대치를 따라 허리를 숙이느라 제갈묘는 보지 못했지만 진필성의 눈동자에서 찰나지만 황금빛 기운이 맴돌다가 사라졌다.
* * *
크고 화려한 방이었다. 그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탁자를 중심으로 네 명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바로 허진과 학성, 학방, 그리고 걸왕이었다.
“우적우적 쩝쩝쩝. 우적우적, 후릅―, 꿀꺽!”
탁자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걸왕은 정말로 맛있게 먹고 있었다.
파리한 안색으로 게걸스럽게 음식을 탐하고 있는 걸왕을 보던 학방이 조심스럽게 허진을 향해 눈동자를 돌렸다. 허진은 팔짱을 낀 채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려 걸왕을 보고 있었다.
‘넉살이 좋으신 건지 아니면 얼굴이 두꺼우신 건지…….’
학방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가락까지 쪽쪽 빨며 넉살좋게 먹고 있는 걸왕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곳은 다름 아닌 마교의 사천총타였다.
걸왕의 입장에서 보면 한 마디로 적의 소굴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행동은 마치 자기 집 안방에 있는 듯 거침이 없다.
결국 허진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선을 돌려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학성을 쳐다보았다. 조금 긴장한 듯 경직된 모습이었지만 처음 보았을 때처럼 눈빛은 강직하게 살아 있었다.
“청명진인의 제자라고?”
“그렇습니다.”
“도명이 학성이고?”
“예.”
“출가 전 이름은……?”
“손정이었습니다, 허 사부님.”
학성의 대답에 허진의 눈이 살짝 감겼다. 마치 그 말을 음미하는 듯했다.
“허 사부님이라…….”
다시 눈을 뜬 허진은 한참 동안 학성의 눈을 직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때 자연스레 그 옆에 앉아 있는 학방과 눈이 마주쳤다.
“하, 학방입니다.”
당황하며 대답하는 학방을 보며 허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예, 예?”
허진의 말에 학방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본좌가 너의 이름을 물었나?”
“…….”
“본좌가 묻기 전에 먼저 대답하지 마라.”
탁!
그때 걸왕이 물잔을 탁자 위로 제법 거칠게 내려놓았다.
“거참, 팍팍하게 굴기는.”
허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꺼억!”
걸왕은 우렁찬 트림을 내뱉고는 능글맞게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거어 참, 자알 먹었다.”
허진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왕은 까맣게 때가 낀 새끼손톱으로 아빨 사이를 쑤셨다.
“걸왕. 더 이상 본좌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시오. 그대는 본좌의 선배가 아니오.”
“마현 그놈의 팍팍한 성격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바로 허 부교주를 빼다 박았군. 그 스승의 그 제자야, 낄낄낄.”
허진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고, 걸왕의 능글맞은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그 둘로 인해 탁자 위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걸왕님, 그리고 허 사부님.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학성이 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낄낄낄, 꽤 당돌하지 않소?”
허진은 여전히 걸왕의 목소리가 거슬리는지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학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본좌를 찾아왔지?”
“허 사부님을 만나려고 했던 것은…….”
‘허 사부’라는 호칭이 다시 나오자 허진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눈매 또한 가늘어졌다.
“허 사부님이라고 제가 부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 모습에 학성은 하던 말을 잠시 끊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진은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학성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마현과 성정은 다르지만 분명 강한 아이였다.
‘무당파 제자의 사부라…….’
어색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허(許) 한다.”
이 방으로 오기 전 호태악을 통해 학성에 대한 것을 조금 알아봤다. 그리고 현재 정파 무림, 즉 무림맹에서 학성은 무당파에 감금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제자 마현을 위해 모든 것을 뿌리치고 나온 아이다 보니 정파라는 것만 빼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감사합니다, 허 사부님.”
학성의 입가에 소중한 것을 얻은 아이처럼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얼씨구.”
그 모습에 걸왕이 괜한 심술을 부렸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뼛속까지 정파인인 걸왕의 눈에 그 둘의 모습이 곱게 보일 리 만무한 까닭이다.
“그래 본좌를 찾아온 연유가 무엇이지?”
“현이를 만나고자 합니다.”
공손하게 대답하는 학성의 말에 허진의 눈빛이 반짝였다. 허진은 재빨리 걸왕을 쳐다보았다.
“현이를 만나기 위해 본좌를 찾아왔다?”
“허 사부님을 만나 뵈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다만 사천에서 현이 소식을 알아본 후 정 안 되면 마교로 갈 생각이었습니다.”
“흠…….”
허진은 나직한 침음성을 삼켰다.
율 군사의 말과 달랐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했다.
학성과 학방이야 그렇다고 쳐도 걸왕은 개방의 전대 방주다. 그와 동행하여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리는 결국 마현이 어디에 있는지 개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곧 무림맹 역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헌데 율기의 보고에 따르면 마현이 소화산 인근에 갇혀 고군분투(孤軍奮鬪)하고 있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처에 몸을 숨겨 아직까지 특별한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마현의 위치를 알아내는 즉시 사천 총타로 연락을 취하겠다는 것이 율기의 전언이었다.
‘그렇다면 율 군사의 정보가 잘못된 것인가?’
허진은 한층 깊어진 눈으로 학성을 바라보았다.
“무림맹에서 있었던 일은 좀 더 세세히 말해줄 수 있나?”
“그건 저보다 걸왕님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좋을 듯싶습니다.”
학성은 일이 터진 직후 무당파 수련동에 갇혀 있었기에 사실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물론 이곳으로 오며 마현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모두가 제삼자를 통해 들은 것뿐이다.
“말해 주시오.”
허진은 즉시 걸왕에게 요구했다.
지금은 뒷전으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걸왕은 한평생 무림에서 온갖 풍파를 겪은 노장이었다. 허진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반짝이는 그 무엇을 분명 보았다.
“낄낄낄.”
걸왕은 조금 전과 별반 다름없이 헤픈 웃음을 내뱉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자못 심각했다.
“허 부교주, 나랑 독대 좀 할 수 있겠소?”
걸왕은 학성과 학방을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나를 따라오시오.”
허진 역시 걸왕의 표정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음을 간파했다. 허진은 걸왕을 데리고 방에 붙어 있는 밀실로 향했다.
자그만 밀실에 그 둘이 마주하고 앉자 더욱 어색했다.
“이거 살다 보니 마교 부교주와 이런 고민을 나눌 줄 몰랐군. 에잉, 빌어먹을 말코도사 놈.”
걸왕은 현도상인이 떠오르자 허공에다 대고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허진은 그런 걸왕을 조용히 쳐다볼 뿐이었다.
“낄낄낄.”
걸왕은 그런 허진을 보며 다시 농이 짙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웃고 있지 않았다.
눈꺼풀 사이로 살짝 드러난 걸왕의 눈동자에서 갈등 어린 감정이 맴돌았다.
“현이 놈의 스승이니 믿을 만하다 여기지만, 내 한 번 물어보리다. 허 부교주, 내 그대를 믿어도 되겠소이까?”
좀처럼 볼 수 없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허진은 실소를 터트렸다.
“걸왕은 본좌를 믿을 수 있소?”
허진은 걸왕의 질문을 고스란히 되돌려주며 반문했다.
“낄낄낄.”
걸왕은 언뜻 보이는 허진의 차가운 미소를 보며 그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렇게 둘은 한참을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 * *
“후후후.”
진필성은 우검 호법이 내민 작은 전서를 내려다보며 크게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었다.
“허진이 소화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렇습니다, 맹주님.”
우검 호법의 대답을 들으며 진필성은 다시 전서로 눈을 돌렸다.
“발칙한 놈이군.”
진필성의 시선 끝에는 ‘율기’라는 이름이 걸려 있었다.
“차려준 밥상이니 안 먹을 수는 없지.”
그가 손에 들린 전서를 삼매진화로 태웠다.
“우검 호법. 상림(商林)의 금 림주와 이야기가 끝나는 즉시 제갈 군사를 만나게.”
“제갈 군사를요?”
“지금 전서로 온 내용을 그에게 알려주게. 아! 내 믿는다는 말도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우검 호법은 허리를 깊숙이 숙인 후 몸을 돌렸다.
‘흠…….’
방을 나가는 우검 호법의 등을 보며 검림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개방주 불취개를 쳐다보는 제갈묘의 얼굴과 몸에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당당함과 위엄이 서려 있었다. 한껏 웃음기를 머금은 제갈묘의 입술을 보며 불취개는 내심 침음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더니 제갈묘가 지금 딱 그 꼴이었다.
“어떻소?”
제갈묘의 질문에 불취개는 미간을 뒤틀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림맹이 달라졌소. 그러니 가져야 할 것과 누려야 할 것을 새로이 배분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오.”
“제갈 가주, 아니 군사.”
제갈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자신을 직시하는 불취개를 향해 여유가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군사와 손을 잡으면 얻어지는 것이 무엇이오?”
“천하의 정보를 주겠소.”
“천하의 정보?”
불취개의 반문에 제갈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정보는 개방의 것이 아니오?”
불취개는 불편한 음성을 토해냈다.
“방주의 말씀처럼 정보하면 개방을 따라올 곳이 없지요. 하지만 천하의 정보가 모두 개방의 것은 아니지요.”
“…….”
“앞으로 무림맹 내에서는 어떤 문파도 정보를 사사로이 다루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즉, 모든 정보가 개방에 의해서만 취급되도록 할 생각입니다. 천하의 정보 일통. 정보는 오로지 개방의 것이 될 것이오.”
제갈묘의 목소리에 불취개의 눈썹이 다시금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