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8화
“아가씨.”
머뭇거리는 설린 뒤로 한한파파가 다가와 속삭이듯 불렀다. 부드럽게 살짝 웃음을 머금은 한한파파의 얼굴이 보였다. 오늘따라 설린은 그런 한한파파의 웃음기가 밉기도 하고, 약도 올랐다.
한한파파는 설린의 어깨를 손으로 잠시 감싸더니 다시 궁주실 안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그렇게 궁주실 안으로 들어온 설린은 잠시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후 설관악과 마현이 마주한 탁자로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채 두 걸음도 내딛기 전에 흠칫 몸이 굳었다.
다름 아닌 설관악의 목소리가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만든 것이다.
“우리 린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니 질문을 잘못했군. 린이를 책임지게.”
가까스로 진정시킨 심장이 다시 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저는…….”
그리고 얼마 후, 마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쿵쿵거리던 심장이 쿵쾅쿵쾅 더욱 거세졌다.
그 심장 소리가 커질수록 설린은 두려웠다.
‘마 공자가 만약…… 나를 거부하면 어쩌지?’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여자는 여자 특유의 직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마현의 입에서 자신이 싫다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설린은 자신의 감정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그런 직감 때문일까. 설린은 급한 마음에 서둘러 설관악을 불렀다. 그렇다 보니 제법 목소리가 차갑고 컸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 때문인지 설관악과 마현, 둘 다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린은 눈에 띄지 않게 숨을 길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스린 후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다소곳하면서도 경쾌한 손놀림으로 들고 온 쟁반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쟁반에 담긴 접시들을 탁자 위로 옮기며 설린은 자연스레 마현과 눈이 마주쳤다. 잔잔한 수면 위로 던져진 돌멩이가 파장을 일으키듯 그녀의 마음이 순간 찰랑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외면의 모습보다 내면이 더 강했다. 보통의 여인이라면 평정심을 잃고 당황하련만, 지금 그녀는 충분히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다.
“아버지.”
설린은 쟁반을 들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다시 설관악을 불렀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설관악에게 그 의지가 분명히 전달됐다.
“린아…….”
“소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딸이에요.”
설린은 설관악의 대답을 듣지 않고 마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아, 아니오.”
“그럼 즐거운 시간 나누세요.”
설린은 가볍게 마현에게 인사를 건넨 후 궁주실을 빠져나갔다.
내내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던 설린은 궁주실을 빠져나가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렸다. 밖에서 그 모든 것을 훔쳐보았던 한한파파가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아가씨.”
“파파, 나 잘한 것일까?”
자신의 품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설린을 보자 한한파파는 마음이 측은해졌다.
“그냥 차라리 듣는 게 좋았을까?”
한한파파는 대답 대신 따뜻한 손으로 등을 문질러 주었다.
“일단 쉬어요.”
“그래…….”
힘없이 대답하며 설린은 한한파파의 품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었다.
북해의 밤바람은 취기마저 그대로 날려 버릴 정도로 차갑고 매서웠다. 마현은 궁주실에서 나와 자신에게 내어준 별채로 향하던 중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담과 전각 사이, 그 너머로 보이는 한 건물 때문이었다.
그곳은 백화소궁(白花小宮), 바로 설린의 거처였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 서 있는 전각, 창을 통해 희미하지만 불빛이 새어나왔다. 마현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방쯤으로 짐작되는 창문을 향해 몇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한참을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그곳을 바라보았다. 불이 꺼진 다음에도……, 마현은 오랜 시간 그 전각을 올려다보았다.
* * *
제갈묘의 주도로 무림맹 내 개편이 시작되었다.
그로 인해 검림주 진필성이 무림맹주에 추대되었고, 제갈묘는 맹주에 의해 곧 무림맹 군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검림의 좌검, 우검 호법은 무림맹 양대 호법으로, 그리고 백여 명의 검림 소속 무인들은 검림단으로 한 단계 격하되는 대신 무림맹주의 직속 무력단체로 편입되었다.
비록 제갈묘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오파일방과 육대세가 모두가 뜻을 숨긴 채 겉으로는 바라는 일이었기에, 일사천리로 마무리가 되었다.
탁.
제갈묘는 품에서 무림맹주를 상징하는 창천패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맹주.”
진필성은 맹주라는 호칭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창천패를 얼굴 위로 집어 들었다. 이것으로 진필성은 재임기한이 정해지지 않아 반영구적이라 할 수 있는 맹주 자리에 오른 것이다.
“감축 드립니다.”
진필성은 엄지손가락으로 창천패를 매만지다가 품에 넣었다.
“이게 다 제갈 군사의 도움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여…….”
제갈묘는 살짝 뜸을 들였다.
“그렇게 망설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기수사께서는 이 무림맹의 군사이시며, 저의 든든한 후원자가 아니십니까?”
진필성은 제갈묘를 한껏 띄워 주었다.
비록 서로의 이익이 맞물려 공생하는 관계로 둘의 만남이 시작되었지만, 이처럼 신뢰 어린 말을 건네니 제갈묘는 기분이 좋아졌다. 의례적인 말일지라도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이제 무림맹은 과거 무림맹과 다릅니다. 그러니 언제까지 화산파에서 머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안 그래도 본인 역시 그 점을 생각하고 있었소.”
“혹 생각해 두신 바가 있습니까?”
“군사, 이 기회에 무림성을 짓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진필성의 말에 제갈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수긍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냐하면 제갈묘 역시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진필성과 처음 손을 잡는 날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진필성의 말처럼 무림성을 짓는 것이 최고이기는 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간도 문제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돈이었다.
그동안 맹주는 각 문파에서 선출했기에 맹주의 거주처가 그리 문제가 되진 않았었다. 하지만 진필성은 다르다.
비록 검림이라는 문파에 적을 두고 있다지만, 정파를 대표하는 단체의 수장이 그런 작은 문파에 머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한 성을 짓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다.
그걸 충당할 방법이 사실상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필성이 오파일방이나 육대세가 중 어느 한 곳에 머무는 것 역시 좋은 일이 아니었다.
진필성은 그런 제갈묘의 고민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아니 진작부터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무림성을 짓는 것도 그렇고, 이제 달라진 무림맹을 운영하려면 돈이 많이 부족하지요?”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제갈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정 상태는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부분이기에 제갈묘의 웃음이 더욱 쓴지도 몰랐다.
“그래서 본 맹주가 군사께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데…….”
은근한 진필성의 목소리에 제갈묘의 눈빛이 반짝였다.
앞으로 무림맹을 이끌려면 자금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진필성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기에 기대감과 의심이 뒤섞인 그런 눈빛이었다.
“일단 제가 소개해 주는 분을 만나본 후에 판단하셔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제갈묘가 받아들이자 진필성은 바로 우검 호법을 향해 말했다.
“드시라 하게.”
잠시 후 한 중년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간 너무 격조하셨습니다. 이십여 년 동안 은공을 뵙기 위해 그리 발품을 팔았거늘 이제야 연락을 주시다니요. 이 금 모, 정말 서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연신 말을 쏟아냈다.
“허허허.”
그런 중년인의 수다를 진필성은 부드러운 웃음으로 묵묵히 들어줄 뿐이었다.
“먼발치에서나마 금 대인이 하시는 일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진필성의 말에 중년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렇게 자신의 소식을 듣고 있었으면서 왜 찾지 않았느냐는 원망의 눈초리였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활짝 펴며 웃었다.
“그래도 이 금 모가 죽기 전에 은공의 은혜를 갚을 수 있어 정말로 다행입니다.”
“제가 이번에 무림맹 맹주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그 소식을 듣고 제가 얼마나 놀라고 기뻐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제가 이렇게 금 대인을 모신 이유는 한 분을 소개시켜 드리고자 함입니다.”
진필성은 제갈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갈묘를 쳐다보던 중년인의 눈빛이 상당히 깐깐하게 변했다. 조금 전 진필성을 호들갑스럽게 대할 때하곤 사뭇 다르게 진중한 표정이었다.
“구금상단(九金商團)의 금대치이외다.”
신비문의 주인인 진필성이 아는 자가 누굴까 연신 궁금해 하던 제갈묘는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헛바람을 크게 터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대치는 제갈묘가 이처럼 놀랄 만한 인물이었다.
중원에서 구금상단이 가진 힘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중원을 오가는 돈의 절반이 그 상단을 통해 유통된다고 할 정도이니, 구금상단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였다.
금대치는 이제껏 이름만 알려지고 모든 것이 장막에 가려진 바로 그 구금상단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제갈세가의 제갈묘요.”
“신기수사? 이 금 모가 무림과 인연이 없어 이제껏 제갈 가주의 쟁쟁한 위명만 들었는데 오늘 개안했습니다, 그려. 하하하하.”
“……과찬이시오.”
제갈묘의 대답은 멋쩍은 듯 자연스럽지 못했다.
누구라도 무림인 앞이라면 몸을 움츠릴 법도 하건만 금대치는 당당했다. 제갈묘는 어찌된 일인지 자신이 금대치 앞에서 움츠러드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과연 천하의 돈을 움켜잡은 이는 역시 뭔가 다른 모양이었다. 제갈묘는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창피함을 넘어 참담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과거의 작은 도움을 앞세워 이 진 모가 금 대인께 손을 조금 내밀어볼까 하고 염치불구 모셨습니다.”
“작은 도움이라니요……, 이 금 모가 오늘날 이만큼 성공할 수 있게 된 것이 다 맹주 때문입니다.”
“허허, 그 말씀은 너무 과합니다.”
“아닙니다. 이 질긴 목숨을 다 부지할 수 있는 것도 다 맹주 덕분입니다.”
제갈묘는 둘의 대화에서 대략적으로 그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손을 내밀겠습니다.”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해도 이 금 모는 기뻐하며 기꺼이 내드리겠습니다.”
금대치의 말에 진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에 엎드리려 했다.
“아이구, 은공.”
그러자 금대치가 당황하며 황급히 진필성의 몸을 붙잡았다. 금대치는 억지로 진필성을 일으켜 다시 자리에 앉혔다.
“이 금 모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진필성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으며 제갈묘를 쳐다봤다.
“모든 것은 여기 계신 제갈 군사와 논의를 하시면 됩니다.”
“제갈 군사와요?”
“……?”
그 말에 금대치도 놀랐지만 그보다 더 놀란 것은 제갈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