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57화 (157/351)

# 157

7화

“흥!”

허진은 그런 걸왕의 모습에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다시 걸왕을 향해 몸을 튕겼다.

“자, 잠깐!”

걸왕은 허둥지둥 땅바닥에 몸을 구르며 소리쳤다. 하지만 허진은 맹렬히 걸왕의 요혈을 노리며 공격해 들어갔다. 허진의 냉혹한 모습으로 보아 둘 중 한 명이 죽지 않는 이상 손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허진이 지치기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다급해진 걸왕은 몸을 일으키며 눈동자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가 지치기 전에 자신의 목이 날아갈 판이다.

어떻게 해서든 허진의 손을 멈추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 걸왕의 눈에 학성이 들어왔다.

‘옳지!’

걸왕은 재빨리 몸을 날려 학성 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학성의 뒷덜미를 잡아 허진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이놈을 죽이면 마현 그놈과 의절하게 될 걸!”

허진은 파리한 얼굴로 사색이 된 학성을 보며 손을 딱 멈췄다.

걸왕의 입에서 마현이 나온 까닭이다.

“허튼소리면 이 땅에서 거지란 거지는 모조리 도륙당할 것이다.”

“거참, 말 한 번 서늘하게 하네.”

걸왕은 여전히 농을 섞어 말했지만 표정은 전보다 더 굳어졌다. 입이 무거운 만큼 뱉은 말은 반드시 실행하는 허진의 평소 성정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그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로 보아 절대로 허언이 아니었다.

‘어거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군.’

허진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하고 결국 학성을 이용한 꼴이 되어 버렸다.

걸왕은 입맛이 썼지만, 어쨌든 지금의 이 사태는 자신의 선에서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엄청난 피바람이 몰아칠 거라는 예견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크흠!”

걸왕은 애써 헛기침을 내뱉으며 굳어진 표정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자신의 손에 뒷덜미가 잡힌 채 목각인형처럼 굳은 학성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쳤다.

“왜 아직까지 벌벌 떨고 있어? 가서 인사 잘해라. 네놈의 입에 수많은 목숨이 달려 있으니.”

걸왕은 턱으로 귀갑철마대에 둘러싸인 속청검문 무인들을 가리켰다.

허진은 걸왕의 손에 떠밀려 자신 앞으로 다가선 학성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기세에 눌려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허진은 그런 학성을 향해 기세를 집중시켰다.

어지간한 무림인들은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시선을 돌릴 정도인데 학성은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끝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빛 역시 여전히 살아 있었다.

‘흠…….’

허진은 마음속으로 침음성을 삼키며 무당파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무당파라…….’

잊혀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마현의 어릴 적 동무이자 무당파로 떠난 한 아이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이 바로 그것이었다.

“학성이 허 사부님을 뵈옵니다.”

학성은 최대한 예를 갖추며 허리를 숙였다.

“청명진인의 제자더냐?”

“그러하옵니다.”

허진은 고개를 살짝 들어 학성을 내려다보았다.

“과거의 인연은 과거의 것. 그 이유로 나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오, 허 부교주.”

걸왕이 허진과 학성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현, 그놈을 보겠다고 무당파를 무단으로 가출했거든. 낄낄낄.”

허진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지자 걸왕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서둘러라!”

“마교 놈들이다!”

그때 대로 끝에서 신도방의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빨리도 온다, 크흠!”

걸왕은 저 멀리 달려오는 정파 무인들을 보며 마뜩찮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 * *

노을이 지며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초저녁, 설관악과 마현이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술상이 푸짐하게 차려졌지만 좀처럼 어색함이 가시질 않았다.

가까이 마주하고 살펴본 마현의 기도는 생각 이상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마현은 만년설삼의 기운을 모조리 흡수한 듯 보였다.

‘그만큼 그릇이 크다는 뜻인가?’

설관악은 마현에게서 자연스레 피어나는 기운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위치쯤 되면 만년설삼과도 같은 영약을 9할 정도는 완벽하게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위치에서는 굳이 영약을 흡수할 까닭이 없었다. 영약을 먹어봐야 얻어지는 건 좀 더 많은 양의 내력이 전부이니 말이다.

영약에 의존해 한 단계 상승을 꿈꾸는 이들은 설관악의 관점에선 하수였다.

그런 하수들이 최대한 기운을 흡수하기 위해 북해빙궁의 빙옥단이나 소림사의 대환단 같은 영단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영단에 의존하고도 7, 8할 정도 영약의 순수 기운을 흡수하면 성공이라고 할 정도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마현은 만년설삼의 기운을 대부분 흡수한 것 같았다.

감탄이 거듭될수록 설관악의 눈동자에 담긴 못마땅함이 더욱 짙어졌다.

마현 역시 그런 설관악의 시선을 느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자신을 싫어하는 눈빛이 둔한 사람도 알아차릴 정도로 너무 노골적인지라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둘 사이의 분위기는 더욱 서먹해지고 적막감만 짙어질 뿐이었다.

“마침 좋은 술이 있어 사왔습니다.”

그래도 받은 은혜가 있어 마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침 오늘 낮에 북해빙궁 저잣거리에서 산 술이 생각난 것이다.

마현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술병을 보자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설관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크흠. 본인이 차린 술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겐가?”

불편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서인지 목소리도 곱지 않았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시처럼 뾰족하게 돋아나 있었다.

마현은 굳어지는 표정을 애써 풀며 술병을 좀 더 설관악 앞으로 내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받은 은혜가 있어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성의로 봐주십시오.”

“끝까지 본인을 우롱하려는 것인가?”

하나가 미우면 모든 것이 밉게 보이는 법.

설관악의 눈에 마현의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결국 마현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이러자고 저를 보고자 하신 겁니까?”

마현의 얼굴에 불쾌함이 드러났다. 마현의 성격으로 보아 상당히 참았지만 결국 그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당연히 설관악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둘 사이에 냉랭한 눈빛이 서로 맞부딪혔다.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일어나겠습니다.”

마현은 설관악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방을 빠져나가는 마현의 뒷모습에 눈물짓는 설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휴우.”

결국 설관악은 시름 어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게나.”

설관악은 다시 한 번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설관악의 그런 마음이 통했을까.

마현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다시 앉게나.”

마음이 한풀 꺾인 듯 목소리가 전과 달리 가시가 박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씁쓸하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설관악의 변덕에 마현은 잠시 고민하다 탁자로 되돌아와 앉았다. 어찌되었든 받은 것이 그만큼 큰 탓이다.

“좋은 술이라…….”

설관악은 실소를 지으며 마현이 꺼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이왕지사 가져왔으니 함께 마시도록 하세.”

설관악은 밀랍으로 봉인된 술병을 땄다.

뽕 하는 소리와 함께 그윽한 주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 향만으로도 설관악은 마현이 가져온 술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평소라면 명주에 흥이 동할 법도 하건만 마음이 착잡한 설관악에게 그런 여유는 없었다.

“한 잔 받지.”

도대체 설관악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마현은 설관악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묻어난 씁쓸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술잔을 들었다. 설관악은 그런 마현의 잔에 술을 따른 후 자신의 잔도 채웠다.

말없이 술 몇 순배가 돌았다.

술이 독해서인지, 아니면 심란한 마음이 그를 취하게 만든 것인지 설관악의 모습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그래, 몸은 어떤가?”

마현이 가져온 술병이 거의 바닥이 날 때쯤 설관악이 취기가 살짝 오른 목소리로 입을 뗐다.

“과한 선물을 받은 것 같습니다.”

“후후, 과하긴 과했지.”

자조 섞인 실소 뒤에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어투를 보면 마현을 비꼬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묘하게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자네가 취한 것이 어떤 만년설삼인지 아는가?”

설관악은 마현의 얼굴을 직시하며 술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술잔을 내려놓을 때도 마현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현은 설관악의 눈동자와 목소리에서 불안정한 감정의 변화를 느꼈기에 조용히 듣기만 했다.

“북해에 빙옥단이라는 것이 있지. 아는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략적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마현은 일단 설관악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만년설삼은 그걸 만들기 위해 없어선 안 될 주재료였지. 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한……. 그런 만년설삼이 이제 사라졌으니 또 언제 빙옥단이 제조가 될지…….”

설관악은 다시 술을 홀짝거렸다.

“그거야 어찌되든 좋네.”

설관악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마현을 쳐다보았다.

“만년설삼을 자네에게 내주는 조건으로 설린, 그 아이가 소궁주 자리를 내놓기로 했네. 그 사실이 조만간 공표될 걸세.”

마현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래서 나는 자네를 용서할 수 없네.”

설관악은 이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지금도 자네를 어떻게 하면 용서를 해줄 수 있을 지 고민 중이네.”

‘이유가 저것이었나?’

술 취한 얼굴로 앉아서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말들을 내뱉는 그 모습은 북해의 절대자라는 직위에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그런 모습이 인간적이라고 느껴졌다. 그렇기에 마현의 마음은 더욱 불편해졌다.

“마 공자.”

설관악은 흐트러졌던 몸을 다시 바로잡았다.

“우리 린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질문에 마현의 마음이 한순간 흔들렸다. 그로 인해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복수의 길을 걷지도 못한 상황이거늘, 고작 여인으로 흔들린단 말인가?’

“아니 질문을 잘못했군.”

그러는 사이 설관악은 고개를 미약하게 흔들며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곤 다시 한 번 마현의 얼굴을 직시했다.

“린이를 책임지게.”

설관악의 눈동자에서 무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거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압박이었다.

마현의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음을 흔드는 여린 감정을 다시금 냉정하게 칼로 쳐냈다.

“저는…….”

마현은 설관악의 압박 속에서 입을 벌렸다.

“아가씨, 이거.”

한한파파는 음식이 담긴 쟁반을 설린에게 건넨 후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파파…….”

그렇게 설린은 한한파파의 손에 타의 반, 자의 반으로 궁주실 앞까지 오고 말았다. 술상을 살피기 위해 시녀들이 분주하게 다니는 터라 궁주실 문이 열려 있었다.

문 가까이 다가가자 설관악과 마현이 앉아 있는 모습이 살짝 보였다. 그 둘이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설린의 심장이 갑자기 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쟁반을 잡은 손바닥이 금세 땀으로 흥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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