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6화
“저자는 누구냐?”
허진은 그런 정용휘를 아래로 굽어보며 호태악에게 물었다.
“속청검문주 정용휘와 그의 문도들입니다.”
“쓸 만한 정보를 알 수 있겠군. 귀갑철마대주.”
조용히 중얼거리던 허진은 냉랭한 목소리로 다시 귀갑철마대주를 불렀다.
“하명하시옵소서.”
“문주를 제외하고 모두 죽여라.”
“명!”
그 즉시 귀갑철마대가 언월도를 들었다.
쾅!
동시에 말발굽 소리가 터졌다. 폭음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을 때 이미 귀갑철마대는 근 오십여 명의 속청검문 무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서, 설마 염라서생 허진? 귀, 귀갑철마대?”
그제야 정용휘는 상대를 알아봤다. 그저 마인이라고만 생각하였는데 마교 부교주라니.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신, 신호탄을 쏘거라, 어서!”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은 정용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유엽강은 품에서 서둘러 작은 죽통을 꺼내들었다.
죽통 아래 늘어진 가는 줄을 잡아당기려 할 때였다.
새하얀 빛이 반원의 궤적을 그리며 유엽강의 오른손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툭!
신호탄을 쥐고 있는 그의 오른손이 잘려 바닥에 툭 떨어졌다.
“으아악!”
유엽강은 왼손으로 피가 솟구치는 오른팔을 부여잡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정용휘는 그런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신호탄을 서둘러 집어 들었다.
“놔둬라.”
정용휘를 향해 다시 언월도를 치켜든 귀갑철마대주는 허진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정용휘는 그 틈을 타 재빨리 신호탄을 터트렸다.
슈우웅―
푸른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며 ‘펑!’ 터졌다.
신호탄을 보고 곧 지원군이 온다는 사실 때문인지, 정용휘는 전보다는 조금 안정된 모습이었다. 거기에 없는 힘까지 생겼는지 허진을 향해 검을 들며 소리쳤다.
“이곳은 엄연히 정마 합의에 의한 불가침지역이거늘, 어찌 본문의 제자들을 죽인 것이냐? 네놈들이 원하는 것이 정마대전이냐?”
정용휘의 일갈은 객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허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리고 허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정용휘가 느낄 때였다. 말에 앉아 있던 허진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허진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정용휘와 한 걸음이 채 떨어지지 않은 바로 코앞이었다.
허진은 손을 뻗어 정용휘의 목줄기를 틀어잡았다.
“컥!”
정용휘는 허진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한 채 그의 손아귀에 잡혀 숨통이 틀어 막혔다.
“내 제자를 죽이기 위해 이곳에서 길목을 가로막고 서 있었던 것이 아닌가?”
허진의 눈동자에서 진득한 살기가 담긴 마기가 폭사되었다.
“크으으, 커헉!”
정용휘의 목줄기를 잡은 허진의 손등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숨이 막힌 정용휘는 고통에 찬 신음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눈의 검은자위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아, 아버지!”
쐐애애액!
정용휘의 위급함을 안 정호영이 허진의 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허진은 정용휘의 목줄기를 여전히 움켜쥔 채 몸을 반쯤 틀었다. 그리고 새하얗게 변한 왼손을 들어 정호영의 검날 중앙을 움켜잡았다.
키긱!
정호영의 검과 허진의 손 사이에서 쇠와 쇠가 갈리는 듯한 소리가 만들어졌다.
“네 눈으로 보라, 내 제자를 노린 대가를!”
허진의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정호영의 검이 그의 손안에서 부서졌다.
와장창창창!
허진은 반 토막이 나 땅으로 떨어지는 검날을 맨손으로 잡아 그대로 정호영의 미간 사이에 내리꽂았다.
콰득!
정호영의 미간 사이에 부러진 검날이 깊게 박혔다.
눈동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떠진 정호영은 비명조차 질러보지 못하고 썩은 고목나무처럼 뒤로 넘어갔다.
그 모습에 화등잔처럼 떠진 정용휘의 눈동자에 핏발이 서며 파르르 떨렸다. 애타게 정호영을 부르려는 듯 기를 쓰고 입을 벌렸지만 바람 빠진 공처럼 ‘쌔액쌔액’ 하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무, 문주님!”
속청검문 무인들이 정용휘만이라도 살리고자 몸을 날리려 했지만 이미 그 사이를 귀갑철마대가 가로막고 서 있었다.
“이익!”
귀갑철마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세에 짓눌린 속청검문 무인 하나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앞에 서 있는 귀갑철마대원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 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캉!
검은 마갑에 부딪혀 그대로 튕기고 말았다.
귀갑철마대원은 그 속청검문 제자를 향해 언월도를 번쩍 들어올렸다가 내려찍었다.
쑤아아악!
“히익!”
속청검문 제자는 자신을 베어오는 언월도에 사색이 된 채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체념할 때 그는 자신 앞에 내려서는 그림자를 보았다.
쾅!
바로 걸왕이었다.
“이이이!”
귀갑철마대원은 다시 언월도를 들어올리기 위해 힘을 썼다. 하지만 걸왕의 손에 잡힌 언월도는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이놈아, 서둘러라!”
걸왕은 언월도를 움켜잡은 채 내력을 담아 소리쳤다. 그런 걸왕 곁으로 비호같은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그 그림자의 주인은 학성이었다.
학성은 걸왕의 손에 걸려 꼼짝달싹 움직이지 못하는 귀갑철마대원의 어깨를 밟으며 허진과 정용휘 사이로 뛰어올랐다.
스르릉― 쐐애액!
그리고 허진의 팔을 향해 검을 내려찍었다.
* * *
시간이 정오에 접어들 무렵 걸왕과 학방, 그리고 학성은 사천성 성도로 들어섰다.
“짭짭짭.”
걸왕은 여전히 육포를 씹고 있었다.
꼬르륵.
그런 걸왕의 배에서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요놈은 여하튼 주책이 없어.”
걸왕은 배를 한 번 툭 치며 어색한 듯 웃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 먹을 때가 되었나?”
중천에 기우뚱하게 걸린 해를 올려다보며 걸왕은 벌써부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슈우웅―
그때 태양 옆으로 녹색 빛줄기가 솟아오르더니 펑하고 터졌다.
‘저건?’
익살스럽던 걸왕의 얼굴이 순간 달라졌다.
그것이 무림맹 차원에서 사용하는 긴급신호탄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놈들아, 급한 일 터진 것 같다. 서두르자.”
학성과 학방 역시 신호탄을 본 후라 어렵지 않게 걸왕과 엇비슷하게 바닥을 박차며 몸을 튕겼다.
하지만 제아무리 학성과 학방이 무당파의 미래를 짊어진 후기지수라고 해도 걸왕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일.
신호탄이 터진 곳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걸왕이었다.
그의 눈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속청검문의 무인들이 보였고, 그들을 휘몰아치는 한 무리의 인마 떼를 발견했다.
‘귀갑철마대?’
언월도를 휘두르는 귀갑철마대를 보고 걸왕은 일단 몸을 날렸다. 그들의 손에 속청검문의 무인이 목숨을 잃는 것을 마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걸왕은 시야를 가린 귀갑철마대의 틈에서 한 중년인의 손아귀에서 목숨을 잃어가는 속청검문주 정용휘를 발견했다.
“이놈아, 서둘러라!”
급한 마음에 학성과 학방을 불렀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을 쫓아왔던 학성이 걸왕의 말에 귀갑철마대원의 어깨를 밟으며 그 중년인과 정용휘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학성의 등장으로 인해 귀갑철마대원들의 간격이 좀 더 벌어지자, 걸왕은 그제야 중년인의 얼굴을 온전히 볼 수 있었다.
‘아차!’
그리고 그 중년인이 마교 부교주 염라서생 허진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늦어 버렸다.
쐐애애액!
학성이 허진의 손목을 향해 검을 내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검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를 때 학성의 손목이 살짝 틀어졌다. 학성은 의도적으로 검날이 아닌 검면으로 허진의 손목을 공격해 들어간 것이었다.
학성은 이 공격으로 충분히 허진과 정용휘를 떼어놓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면 학성은 결코 그런 여유를 부리지 못했을 것이다.
허진은 학성의 검면을 손등으로 후려갈겼다.
깡!
쇳소리가 울리며 검이 활대처럼 크게 구부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차장―
“큭!”
그 충격으로 학성의 몸이 다시 허공으로 튕겨져 올라갔다. 하지만 학성의 실력 역시 여느 후기지수들에 비해 월등이 높은 터라 재빨리 신형을 틀어 안정적으로 내려섰다.
하지만 부르르 떨리는 검신으로 인해 시큰거리는 손목의 고통을 참느라 학성의 한쪽 뺨이 씰룩씰룩 일그러졌다.
허진은 학성이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매만질 때 소매 끝에 난 태극 수실을 보며 눈을 빛냈다.
‘무당파 제자인가?’
그때서야 허진은 자신을 공격해 온 젊은 도인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강우야.”
허진은 여전히 자신의 손아귀에서 숨이 막혀 캑캑거리는 정용휘를 뒤로 내밀었다.
“예, 주군.”
휘청거리며 주저앉으려는 정용휘 앞으로 흐릿한 그림자가 언뜻 비치더니 하얀색 피풍의를 온몸에 두른 한 장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교에서도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유령대의 총대주 하강우였다.
하강우는 정용휘의 수혈을 짚으며 품에 안아들었다.
허진은 손이 자유로워지자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학성 앞으로 천천히, 하지만 무겁게 걸어 나갔다.
허진이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학성의 얼굴은 조금씩 굳어졌다. 전신을 압박해 들어오는 엄청난 기세에 학성의 몸은 뻣뻣해지며 긴장으로 온 신경이 곤두섰다.
“학성아.”
그때 학방이 학성 곁으로 내려서며 허진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학방 역시 학성처럼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알량한 자비를 바라지 마라.”
허진의 몸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기세는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목을 조여 왔다. 허진의 살기에 학방과 학성은 인지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 바람에 손위 쥔 검까지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마구 흔들렸다.
“으으으으.”
허진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공기가 사라진 듯 숨이 턱턱 막혔다. 뜨거운 사막에라도 서 있는 것처럼 등줄기에서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두 사람이 마지막을 각오하며 눈을 부릅뜬 순간, 온몸을 죄여오던 무형의 기운이 갑자기 사라졌다.
“헉헉, 헉헉헉.”
그로 인해 학성과 학방은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랜만일세, 허 부교주.”
그런 둘 앞에 어느새 나타났는지 걸왕이 홀연히 서 있었다.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걸왕의 얼굴이 아니었다. 허진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죽을 자리를 찾아왔군.”
허진은 걸왕의 등장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렇다고 기세까지 누그러뜨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걸음을 멈춘 것뿐이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하……, 헙!”
분명 농이 깃든 말이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걸왕은 말도 채 끝맺지도 못하고 공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허진이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걸왕의 목을 노린 것이다.
걸왕은 아찔함을 느끼며 서둘러 일장을 내질렀다.
퍼벙!
허진의 수도와 걸왕의 장(掌) 사이에서 공기가 폭죽처럼 터졌다.
찌지지직―
서둘러 허진의 공격을 맞받아쳤지만 역부족이었는지, 그 힘에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걸왕이 서 있던 바닥에는 허름한 신발 밑창이 갈리며 두 줄기의 긴 선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