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52화 (152/351)

# 152

2화

‘만약 광인이 되었다면…….’

설관악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의 눈빛에서 은은한 살기가 일렁거렸다.

‘무고한 북해인들이 죽기 전에 먼저 죽여야 한다! 비록 그가 마교의 대공자라고 해도!’

설관악은 내력을 끌어올리며 더욱 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대연무장을 둘러싼 담벼락이 보였다. 급한 마음에 설관악은 허공으로 도약하여 담벼락을 발로 밟으며 대연무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설관악이 대연무장에 발을 디디는 순간, 사방을 뒤덮고 있던 마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라졌다기보다 멀리 퍼져나갔던 마기가 다시 대연무장 안으로 거둬졌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대연무장 중앙에 오연하게 서 있는 한 인물, 마현에게 흡수가 된 것이었다.

설관악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마기였다.

그 마기를 마현이 온전히 거둬들인 것이다.

설관악은 대연무장 중앙에서 양팔을 편하게 벌린 채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마현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가벼운 음성을 토해내며 고개를 돌리는 마현의 얼굴에는 흡족함이 담겨 있었다. 마치 마기를 음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폭주가 아니었던가?’

설관악은 나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그가 얼굴을 굳힐 때 대연무장으로 북해빙궁 무인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들 역시 마현이 내뿜은 마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스승님.”

설관악 곁으로 냉천휘와 부궁주인 냉하상이 다가왔다.

“왔느냐?”

냉천휘는 설관악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설관악은 냉천휘와 냉하상의 인사를 받으며 그 뒤로 시선을 돌렸다.

냉천휘의 얼굴에도 보이는 안도감이 설영대주를 비롯한 설영대원들의 얼굴에도 나타나 있었다. 그들 역시 설관악과 마찬가지로 마기의 폭주를 염려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설관악의 표정을 더욱 굳게 만든 것은 안도감을 내비치는 그들의 표정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들 눈 속에 떠오른 경외감 때문이었다.

설관악은 잔뜩 굳어진 얼굴로 여전히 대연무장 중앙에서 느긋하게 서 있는 마현을 보았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의 마음을 훔쳤는가?’

설린도, 냉천휘도, 그리고 설영대도…….

모두가 마현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설관악의 머릿속에는 ‘왜?’라는 물음표가 사라지지 않았다.

기분 좋게 자신의 몸을 관조하던 마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연무장으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드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 기분을 잃지 않고 싶었던 마현은 짜증이 밀려왔다.

마현은 양팔을 내리고 몸을 곧추세우며 눈을 떴다.

‘음?’

마현의 눈에 한 장년인이 크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한기를 느낀 것이다.

“북해빙궁주입니다, 주군.”

재빨리 철용이 다가와 마현의 시선 끝에 머물고 있는 이가 설관악임을 알려주었다.

“그래?”

“주군을 살리기 위해 만년설삼을 내주었습니다. 물론 설 소궁주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지만 쉽지 않은 선택을 하였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설관악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마현을 향해 철용이 급히 몇 마디를 덧붙였다.

“만년설삼?”

마현은 철용의 말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습니다, 주군.”

“흠…….”

마현은 한층 깊어진 눈으로 고개를 살짝 주억거렸다.

‘만년설삼이라…….’

이제야 자신의 몸이 이해가 되었다.

피폐해진 내부가 치유되는 것을 넘어 과거의 힘을 찾게 된 연유를 알게 되었다.

‘남에게 도움을 받은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큰 은혜를 입었군.’

마현은 입맛을 쓰게 다시며 설관악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입니다, 대공자.”

설관악 앞으로 마현이 막 다가서려 할 때 냉천휘가 한 걸음 다가오며 포권을 취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냉천휘는 설린과 만년설삼으로 인해 복잡해진 머리를 지금 만큼은 모두 털어버리고 목소리에 진심을 담았다.

“아닙니다. 오히려 본인 때문에 고초를 겪게 해서 이 마 모가 죄송할 따름입니다.”

마현은 냉천휘에게 포권을 취한 후 설관악을 향해 다시 포권을 취했다.

“귀한 것을 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험, 험험. 아닐세.”

설관악은 미묘한 감정이 담긴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에 상응하는 보답은 반드시 하겠습니다.”

비록 감사의 뜻이 담겨 있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직설적인 인사였다. 가뜩이나 마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설관악은 그 말에 불편한 심기를 언뜻 드러냈다.

“상응하는 보답이…….”

마땅찮은 목소리로 대답하던 설관악의 목소리가 중간에 딱 잘렸다.

“마 공자님.”

바로 설린의 목소리가 들린 까닭이었다.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설린의 목소리였지만 설관악의 말 사이를 미묘하게 끊어버린 것이다. 설관악은 눈가를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쾌차하셔서 다행입니다.”

한한파파와 함께 마현 곁으로 다가온 설린은 그사이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마현은 설린을 보자 복잡한 마음이 먼저 생겨났다. 또한 그녀로 인해 북해빙궁이 자신에게 만년설삼을 내주었다는 철용의 말이 더 한층 마현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현은 그런 복잡한 마음을 차갑게 잘라 버렸다.

자신이 가야 할 길에 설린은 없었다. 그리고 동행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설린을 향해 마음이 살짝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새삼 다시 느끼는 것이지만 그런 마음은 마현에게 있어서 사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덕분에…….”

설린의 말에 화답하는 마현의 모습은 무척 예의를 차리는 듯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딱딱하고 차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 소궁주의 은혜는 내 반드시 갚겠소. 약조하오.”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듯한 마현의 음성과 표정에 설린의 눈동자가 잠시지만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설린은 강한 여인이었다.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다행이네요. 이 소녀는 그것만으로 족합니다.”

그녀는 희미하지만 마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관악의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동안 설린의 행동을 지켜보며 그래도 둘이 좋아하는 마음이 있겠지 싶었다. 헌데 지금 보니 설린 혼자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안 그래도 마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설관악이다.

자신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딸아이의 마음을 흔든 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짝사랑이라니?

홀로 짝사랑하는 설린의 모습은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가슴 속에서 천불이 일어났다.

그런 감정은 고스란히 눈에 투영되었다.

‘감히 네놈이 무엇이기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노기를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런 차가운 모습에도 기뻐하는 설린의 모습이 설관악의 눈에 훤하게 보이는 까닭이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홀로 삼키며 설관악은 애써 노기를 가라앉혔다.

어느 아비가 딸의 웃음을 지울 수 있겠는가 말이다.

“상응하는 보답이라고 했던가?”

“말씀하시지요.”

자신이 말을 걸자 쌀쌀맞을 정도로 설린에게서 몸을 홱 돌려버리는 마현의 모습에서 설관악은 애써 꾹 눌렀던 노기가 다시 터지려 했다. 하지만 그것에 언뜻 실망하는 듯한 설린의 표정을 보고는 노기를 꾹 눌러 참았다.

“당장……, 아니 오늘 저녁에…….”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를 찾아오게. 크흠.”

“……?”

“그럼 그때 내게 보답해 줄 것을 말하지.”

애써 노기를 억눌렀다지만 설관악의 목소리는 그다지 곱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느닷없는 소리였지만 마현은 설관악의 말을 받아들였다.

“크흠!”

설관악은 잠시 안쓰러운 눈으로 설린을 바라보다 마현을 노려본 후 몸을 돌려 대연무장을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휴우.”

대연무장을 나서자마자 설관악은 깊디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못난 녀석……, 도대체 이 아비의 마음을 얼마나 더 썩이려고…….’

하지만 설관악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것이 딸을 가진 아비의 업이자 마음이었으니까.

* * *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화려한 마차를 육십여 명의 무인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그 마차 지붕 위로 황금색 바탕에 선명하게 붉은 태양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바로 남해로 돌아가는 양곽원의 마차였다.

와장창창!

최고급 장인이 만든 마차라서 그런지 산길을 달리는 와중에도 내부는 안락함을 느낄 정도로 큰 요동이 없었다. 그 안에서 술을 마시던 양곽원이 신경질적으로 술잔을 마차 벽에 집어던졌다.

술잔이 부서져 파편과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벽면에 난 자국으로 보아 그렇게 술잔을 던진 것이 처음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씩씩거리며 거친 호흡을 내뱉던 양곽원은 술잔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던지 술병과 간단한 안주거리가 담긴 쟁반을 들어 다시 벽에 집어던졌다.

술기운에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입술을 자근자근 씹어댔다.

“감히……, 감히……!”

결국 양곽원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찢어죽일 마현 놈과 북해도 어찌하지 못한 놈들이……, 감히, 감히 남해를 능멸해?”

양곽원은 살기 어린 눈동자로 어금니를 박박 갈았다.

무림맹에서 은근히 무시를 당하며 축객령을 받고 쫓겨나듯 떠나야 했다. 어느새 무림맹의 중심이 된 검림주의 입김이 그리 만든 것이다.

“흥, 멍청한 무림맹 놈들. 결국 안에서 아옹다옹하더니 듣도 보도 못한 검림주에게 무림맹을 갖다 바치다니 말이야.”

어느새 조롱이 담긴 비웃음이 양곽원의 입가에 맺혔다.

“모습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북해가 어쩌고, 마교가 저쩌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아니면 지금쯤 설린, 그년과 함께 이 마차에서 뜨거운 운우지락을 나누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살기가 짙던 눈동자에 어느새 음탕한 욕정이 대신 들어찼다.

와직!

양곽원은 발밑에서 뒹굴던 사기 파편을 발로 밟아 으깼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욕정과 살기가 뒤엉켰다.

“남해로 돌아가는 즉시…….”

그때 갑자기 덜커덕거리며 마차가 멈췄다.

“무슨 일이냐?”

양곽원은 마차의 창문을 열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산적들이 길을 막았습니다.”

열풍대주의 말에 양곽원은 못마땅한 눈빛을 띠며 혀를 찼다.

“무능해도 어찌 이리 무능한지……. 에잉.”

양곽원은 한 팔을 잃고 펄럭이는 열풍대주의 빈 소매를 보며 낯을 찌푸렸다.

“미리 길을 뚫었어야 하지 않나.”

“죄, 죄송합니다. 주군.”

“에잉, 쯧쯧쯧.”

양곽원은 허리를 숙이는 열풍대주를 보며 연신 혀를 찼다.

쾅!

그리고는 거칠게 창문을 닫아 버렸다.

“휴우.”

열풍대주는 양곽원의 모습에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적양대주가 다가왔다.

“쉬고 있으시오. 적양대가 뚫을 테니.”

제때 상처를 치료하지 못했고, 또 휴식마저 제대로 취하지 못해 안색이 창백한 열풍대주 앞으로 적양대주가 나섰다.

“태양의 길을 막은 놈들은 아무도 살려주지 마라.”

“명!”

“명!”

적양대주의 명에 적양대원들은 일제히 앞길을 가로막은 산적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으아아악!”

한적한 산길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 순간 적양대주의 눈은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떠졌다.

산적들에게서 터져 나와야 할 비명이 적양대원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까닭이었다.

‘펴, 평범한 산적들이 아니다.’

그제야 적양대주는 산적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 같은 예기가 산적들로 위장한 이들의 눈동자에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적양대주의 눈 끝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자신들을 에워싸는 엄청난 양의 살기가 느껴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발 틀리기를 바랐건만 어느 순간 백여 명의 정체모를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열풍대주 역시 어색하게 검을 뽑아들었다.

“방진(方陣)을 구축하라, 어서!”

파리한 안색에 상당히 지친 몸인데도 불구하고 열풍대주는 기개에 찬 목소리로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 명에 열풍대원들은 재빨리 마차를 둘러싸며 보호했다.

쾅!

그때 마차 문이 우악스럽게 열리며 거칠고 짜증이 잔뜩 묻은 양곽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직까지 길을 내지 않고 뭐하…….”

진한 피비린내와 함께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낀 양곽원은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마차 밖으로 나와서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백여 명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을 발견했다.

양곽원은 내력을 끌어올려 취기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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