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25화
“주군은, 주군은 사실 수 있는 겁니까?”
철용이 그런 구엽을 보며 다급히 물었다.
“내가 할 만큼은 다 했소이다. 나머지는 하늘의 뜻이오.”
구엽은 주위에 널브러진 목함과 침구통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갑시다. 여기 있어봐야 환자에게 방해만 될 뿐 도움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구엽의 말에 철용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나왔다. 그가 나오고 구엽이 뒤따라 나오며 마차의 문을 닫았다.
“어, 어떻게 되었나요?”
설린이었다.
조금 전 철용의 질문과 별반 다름없었지만, 소궁주의 질문인지라 싫은 내색 없이 다시 대답해 주었다.
모든 것이 하늘에 달렸다는 구엽의 말에 설린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아가씨.”
북해빙궁에서 나올 때 함께 온 한한파파가 설린을 조용히, 그리고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파파.”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한한파파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안고 있는 설린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분명 숨죽여 울고 있는 듯했다. 한한파파는 그런 설린의 등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이 순간만은 유모가 아닌 어머니의 마음으로.
어찌되었든 꺼져가던 생명의 불꽃이 연장되었음을 안 흑풍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엽의 제자에게서 치료를 받고 있는 왕귀진에게로 모여들었다.
“어떻소?”
왕귀진이 쓰려졌을 때도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던 철용이 가장 먼저 달려가 물었다.
“혈맥이 조금 꼬인 상태에서 너무 무리를 해 잠시 기절한 것이오. 한동안 편히 요양하면 괜찮아질 것이오.”
구엽의 제자는 왕귀진의 몸에 박혀 있던 침을 뽑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용은 다른 흑풍대원의 손길을 뿌리치며 왕귀진을 말없이 등에 업었다.
‘고지식한 놈.’
상사이지만 그 전에 왕귀진은 자신의 친구였다.
밑바닥부터 함께 동고동락해 온 형제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북해.
북해의 밤바람은 살마저 베어 버릴 정도로 차가웠다.
하지만 궁주실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활짝 열려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설관악의 몸을 매섭게 할퀴었지만 여전히 그는 답답해했다.
답답한 마음을 북해의 밤바람이 조금이라도 식혀줄까 싶어 창문을 활짝 열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답답함이 몸이 아닌 마음의 답답함이었느니 당연한 일이었다.
쪼르르르.
설관악은 작은 술병을 들어 술잔을 채웠다.
향이 퍼지기도 전에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휘이잉― 폭!
거센 바람에 촛불마저 꺼졌다.
어둑해진 방 안이었지만 설관악은 창문을 닫지도 않았고, 촛불을 다시 켜지도 않았다.
그저 어두운 방 안에서 술잔을 들 뿐이었다.
탁자 위에 차려진 안주는 이미 차가운 정도가 아니라 마치 얼음처럼 꽁꽁 얼어 있었다.
“휴우…….”
설관악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위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주향 찌꺼기를 코로 내뱉었다.
쪼르르르.
설관악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다.
자태가 단아한 한 여인의 모습이 흔들리며 술잔에 떠올랐다.
일찌감치 자신을 두고 저세상으로 떠난 부인, 한난령이었다.
“한 매…….”
문득 설관악은 사무치도록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린이는 나보다는 당신을 닮았나 보오.”
설관악은 술잔을 내려다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웃지 마시오. 무정한 사람.”
설관악은 손을 뻗어 술잔이 아닌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나를 닮아 마음이 차가운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그 차가움이, 차가움이 아니더이다.”
설관악은 요 며칠 설린의 모습을 떠올리며 씁쓸히 웃음을 지었다.
“열정이었소, 당신을 꼭 닮은 열정.”
설관악은 부부의 연을 맺기 전의 한난령을 떠올렸다.
그녀는 북해의 여인답지 않게 뜨거운 성정을 가진 여자였다. 여인답지 않게 정열적이었고, 그게 무엇이든 마음에 들면 앞뒤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손을 내밀었던 그런 따듯한 여자였다.
그런 여인답게 둘의 사랑도 지극했고 뜨거웠다.
“선인들의 말에 여자아이는 자라면서 엄마를 닮는다는데, 그 말이 하나 틀린 것이 없더이다.”
‘호호호호.’
그의 귀에 한난령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부인, 그리 웃지 마시오.”
설관악은 눈을 흘기며 술병을 다시 잡고는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다 컸소, 우리 린이가……. 이제는 다 컸더이다.”
어느새 술병은 비어 있었다.
찡그리듯 눈을 감은 그의 눈 끝에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궁주님?”
그때 궁주실 문이 열리고 한한파파가 안으로 들어왔다.
설관악은 서둘러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어냈다.
“휴…….”
한한파파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총총걸음으로 방 안을 돌아다니며 활짝 열린 창문을 모두 닫았다.
“감기 드십니다.”
“답답해서 그러니 도로 여시오.”
“안 됩니다. 죽어서 난령이에게 시달림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한난령의 이름을 듣자 설관악은 입을 꾹 닫았다.
한한파파는 창문을 모두 닦은 후에 탁자로 다가와 양초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어두컴컴했던 방 안이 다시 밝아졌다.
“앉으시오.”
설관악의 말에 한한파파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린이는 어쩌고 있소?”
마현을 태운 마차는 북해빙궁의 한복판이랄 수 있는 대연무장 중앙에 있었다. 그리고 설린은 그 마차 주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밤새도록 마차 옆을 지킬 것 같은 설린의 모습이 떠오르자 설관악은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달래서 아가씨 방으로 모셨어요. 한참을 울다가 방금 잠들었습니다.”
“그렇소?”
설관악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들었다. 하지만 술병은 이미 비어 있었다. 설관악은 바닥을 둘러보더니 다른 술병을 들어 마개를 땄다.
“한 잔 하시겠소?”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한한파파는 설관악에게서 술병을 받아들었다.
설관악은 술이 든 술잔을 그대로 둔 채 탁자 위 한쪽에 밀어놨던 찻잔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한파파는 왜 그 술잔을 마시지 못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담담히 웃으며 찻잔에 술을 따랐다.
“난령이는 좋겠어요. 여전히 사랑을 주시는 궁주님이 계시니까요.”
한한파파의 말에 설관악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 부질없는 일이오. 부질없는…….”
설관악은 의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술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 * *
북해빙궁 대연무장에 거대한 팔두마차가 찬바람을 맞으며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서른 명의 흑풍대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몇 사람이 누워 뒹굴어도 넉넉할 정도로 넓은 마차 안에는 마현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그의 벗은 몸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검고 파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몸 중심 부위에서는 두 색깔이 충돌하고 있었는데, 그 경계가 미묘하게 조금씩 엎치락뒤치락하며 변하고 있었다.
그런 마현의 몸에 수백 개의 침이 빽빽하게 꽂혀 있으니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정을 지날 무렵, 마현의 몸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이 갑자기 활처럼 휘어졌다.
팅!
단전에 위치한 기해혈에 꽂혔던 침이 뽑히며 암기처럼 날아가 마차 지붕 위에 꽂혔다.
얼마나 강하게 날아가 꽂혔는지, 꽂힌 흔적만 있을 뿐 침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팅 팅 팅 팅 팅!
마현의 임맥을 따라 꽂혀 있던 침들이 차례대로 뽑히며 튕겨지더니 마차 지붕에 꽂혔다.
임맥의 모든 침들이 뽑히자 다음은 기경팔맥의 다른 혈맥들의 침이 뽑혔다.
그 다음은 세맥들에 꽂힌 침들이 차례로 뽑혔다.
수백의 침이 뽑혔지만 마차 바닥에 떨어진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만일 누군가가 좀 더 세세히 마차 안을 살핀다면 좁쌀보다 작은 미세한 구멍들 수백 개가 나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침들이 뽑히자 마현의 몸에서는 나직한 공명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마현의 몸은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침이 꽂혀 있던 자리에서는 유형의 기운들이 흘러나왔다. 검은 피부 쪽에서는 새카만 흑무가, 새파란 피부 쪽에서는 새파란 청무가 흘러나와 그의 몸을 누에고치처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두 색은 섞이지 않았다.
그때 마현의 눈이 번쩍 떠졌다.
하얀 눈자위가 없는 온통 검은색이었다.
그 검은 눈에서 묵빛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입도 벌어졌다.
입에서도 묵빛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묵빛 강기는 사방으로 흩어지는가 싶더니 마현과 그를 둘러싼 두 색의 운무를 에워쌌다.
그 정체모를 묵빛 강기는 흑무와 청무를 빠른 속도로 집어삼켜나갔다.
묵빛 강기는 결국 흑무와 청무 모두를 집어삼킨 후 마현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두 색으로 갈라져 있던 마현의 몸은 어느새 정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안개처럼 짙게 드리워진 검은 빛도 완전히 스며들어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감겨져 있던 마현의 눈이 다시 떠졌다.
몸으로 스며들었던 검은빛이 마현의 눈을 통해 다시 폭사되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마차를 경계하던 흑풍대원들의 몸이 점혈이라도 당한 것처럼 굳어졌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흑풍대원들의 가슴이 앞으로 튕기듯 내밀어졌다. 그리고 두 눈에서 흰자위가 사라지며 검게 변했다.
번쩍!
이윽고 흑풍대원들의 눈에서도 마현과 같은 검은빛이 폭사되었다.
“크으으으!”
고통에 찬 신음인지, 아니면 희열에 찬 신음인지 모를 음성들이 흑풍대원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쿵!
가슴이 다시 한 번 튕기듯 앞으로 내밀어졌다.
푸학!
그 어떤 무형의 힘에 흑풍대원들의 옷자락 앞섶이 터지며 가루가 되었다.
문신으로 가득한 맨살 중앙에 박혀 있는 마정석에서도 눈과 같은 검은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르륵, 푸학!
마정석에서 검은빛이 뿜어져 나오자 흑풍대원들의 주위로 스켈레톤들이 땅을 헤집으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켈레톤들 역시 괴로운 듯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잔뜩 웅크린 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콰과광!
그때 마현이 타고 있던 마차가 폭발하듯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사방으로 비산하는 나뭇조각들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마차가 서 있던 자리에는 마현이 홀로 허공에 떠 있었다.
우우우웅!
마현의 몸을 뒤덮고 있던 검은빛이 하나의 선으로 길게 늘어났다. 그것은 곧 두 개가 되고, 다시 세 개로 늘어났다.
그렇게 늘어나던 선은 일곱 개가 되어서야 멈췄다. 그리고 일곱 개의 선은 저마다 고리가 되어 다시 마현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번쩍!
마현의 몸이 허공으로 한 번 튕겨지며 검은 마기가 파장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으아아아아!”
“우어어어!”
마기로 이루어진 원형의 파장이 흑풍대원들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자 그들의 입에서 일제히 마기가 담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
-끼아아아아!
흑풍대원들을 꿰뚫은 마기의 파장은 스켈레톤들 역시 덮쳤다.
그러자 스켈레톤들이 괴로운 듯 온몸을 비틀어댔다. 그리고 스켈레톤들의 새하얀 뼈가 서서히 검은색으로 변했다. 어둠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새카만 색이었다.
단지 색깔만 변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이지만 스켈레톤들의 몸집이 커졌다.
-키키키키!
-캬캬캬캬!
귀음을 터트리는 스켈레톤들의 동공에서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흉흉한 마기가 분출되었다.
그렇게 대연무장이 귀기와 마기로 뒤덮이자 마현의 몸이 서서히 땅으로 내려왔다.
몸이 완전히 바닥에 내려앉자 마현의 눈에서 폭사되던 검은빛이 사라졌다.
마현은 길고 달콤했던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상쾌함을 느꼈다.
“후후후후…….”
마현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흘러나오는 웃음에는 진득한 마기가 담겨 있었다.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웃던 마현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현은 느끼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자신이 과거의 힘을 온전히 되찾았음을.
하지만 마현에게 이유야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힘을 모두 찾았다는 사실이었다.
“수고했다, 흑사신.”
마기가 담긴 마현의 목소리에 그를 중심으로 한 네 곳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났다. 그 연기는 저마다 하나씩 유형화되며 실체를 갖춰갔다.
바로 흑사신들이었다.
“흑사신.”
마현은 자신들의 달라진 몸을 느끼며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흑사신들을 불렀다.
“너희의 운명을 쥔 나, 카칸이 너희에게 새로운 권능을 부여하노라. 너희는 이제 군단장의 이름으로 어둠의 종족인 듀라한과 좀비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7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