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21화
“무언가?”
“사공찬!”
율기의 말에 도종극이 히죽 웃으며 입가를 실룩였다.
“그렇다면 마교는 표면적으로 소림주의 것이 됩니다.”
자신감에 찬 웃음을 보이고 있는 도종극에게 율기가 말을 조금 더 덧붙였다.
도종극은 사공찬을 떠올리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계획을 앞당기는 것 만큼 지원군이 필요하겠군. 사부님께는 본인이 서찰을 올리지.”
“알겠습니다, 소림주.”
도종극은 들어올 때와는 달리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만 잘 된다면 그대의 노고를 내 잊지 않지.”
“어차피 소림주와 저는 마교로 오며 이미 한 몸이나 매한가지였습니다. 허나 장차 돌아올 모든 영광은 소림주의 것이겠지요.”
도종극을 따라 일어선 율기가 그를 향해 몸을 숙였다.
“이래서 내가 그대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
도종극의 치하에 율기는 반쯤 숙였던 허리를 더욱 깊게 숙였다.
“그럼 수고하게.”
도종극은 더욱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율기는 숙였던 허리를 다시 폈다.
“후후후.”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멀어져 가는 도종극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율기의 눈동자에서 황금색 귀기가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 * *
화산파 객당 귀빈실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검림주 진필성이 방 중앙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아직인가?”
그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림주님.”
진필성의 앞에 시립에 있는 우검 호법과 좌검 호법 역시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마공을 보였다고 하지만, 인간인 이상 하늘로 솟아오르거나 땅 아래로 꺼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대를 뒤지고 또 뒤졌지만 감쪽같이 사라진 마현 일행을 며칠이 지났는데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크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두 호법을 본 진필성은 마땅찮은 듯 헛기침을 토해내며 근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래서야 어디 무림맹을 집어삼킬 수 있을지 모르겠군.”
진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림주님.”
우검 호법이 조심스럽게 진필성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먼저 제갈세가를 포섭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진필성은 고개를 들어 우검 호법을 올려다보았다.
“제갈세가를?”
“지금 무림맹 내에서 오파일방과 육대세가의 반목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꺼내자 진필성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필시 지금쯤 오파일방에서는 육대세가에게 패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머리를 짜낸다고 해도 그다지 뾰족한 묘수는 없을 것입니다.”
“묘수가 없다?”
“단 한 가지만 빼고요.”
“……?”
“바로 림주님이십니다.”
우검 호법의 말뜻을 진필성은 금세 알아차렸다.
“그들이 나를 꼭두각시로 삼으려 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림주님.”
진필성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자 우검 호법 역시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비록 정예지만 그들의 눈에는 본림이 고작 백여 명밖에 안 되는 작은 조직으로 보일 테니까요.”
“그러니까 오파일방은 우리를 꼭두각시로 삼으려 할 것이고, 당연히 육대세가는 반대를 한다. 하지만 제갈세가가 본림에 붙는다면 달라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애초의 계획은 마교 대공자를 죽여 큰 위명을 얻고, 그 위명으로 무림맹 맹주가 되는 것이었지만, 어차피 림주님께서는 이미 큰 위명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마교 대공자를 찾지 못한 것은 검림이 아니라 무림맹에서 찾지 못한 것입니다. 어차피 이쯤 되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본림으로서는 모로 가나 바로 가나 목적지에만 가면 그만인 것 아닙니까.”
우검 호법은 말을 마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일리가 있어. 좋은 묘수야.”
“감사합니다, 림주님.”
진필성은 눈을 빛냈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지만 찜찜해.”
진필성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그의 염려를 짐작한 우검 호법이 넌지시 말했다.
“어차피 그들은 마교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럼 자연스레 귀림의 손에 의해 사라지겠지요.”
“일단 그래도 수색은 계속하도록.”
“알겠습니다, 림주님.”
그들이 그렇게 말을 막 마친 때였다.
콰당!
밖이 조금 소란스럽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바로 양곽원을 위시한 남해태양궁 무인들이었다.
진필성은 그 무례한 행동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저어 방문을 닫게 했다. 문이 닫히자 진필성은 얼굴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 일이시오, 양 소궁주.”
“흥, 얼굴조차 보이지 않으며 잘난 척이라는 잘난 척은 다하더니 고작 계집 하나 잡지 못하는 것이오?”
양곽원은 진필성을 향해 비아냥거리더니 그가 앉아 있는 탁자 맞은편 의자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무례한…….”
좌검 호법이 그 모습에 발끈했지만 진필성이 손을 슬쩍 들어 그를 말렸다. 좌검 호법은 양곽원에게 눈을 부라리며 뒤로 물러났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소이다, 양 소궁주.”
진필성은 담담하게 사과했다.
“하지만 내 약조대로 북해빙궁 소궁주를 잡아다가 양 소궁주에게 바치겠소.”
“그닥 믿음은 안 가나, 내 한 번 더 진 림주를 믿어보겠소.”
양곽원의 거들먹거리는 목소리에 진필성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어찌되었든 앞으로 검림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 아버지, 아니 궁주님께는 잘 말씀을 드리겠소.”
양곽원은 제 할 말만 다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배웅은 안 하겠습니다.”
비록 괘씸했지만 양곽원을 향해 진필성은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 진필성을 향해 양곽원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방을 휙 나가 버렸다.
진필성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좌검 호법.”
하지만 냉랭한 얼굴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나직했다.
“예, 림주님.”
“검살단을 준비시키라.”
“검살단을 말씀이십니까?”
“마침 북해빙궁주가 북해를 떠났다니…… 저 어린놈의 목은 북해빙궁주가 취할 것이다.”
살심 어린 진필성의 목소리에 좌검 호법 역시 화를 삼키는 듯 입술을 비틀며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림주님.”
“그리고 우검 호법은 지금 남들 이목에 띄지 않게 제갈묘에게 기별을 넣으라.”
“예.”
그렇게 좌검 호법과 우검 호법이 방을 나가자 진필성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탁자로 걸어가 앉았다.
‘안 그래도 남해태양궁과 북해빙궁의 일로 골머리를 썩었는데 잘 되었군.’
진필성은 붓을 들고 어디론가 보낼 서찰을 적어 내려갔다.
* * *
화산파 장문인실에 오파일방의 장문인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특히나 맹주이자 화산파 장문인 담기량의 얼굴은 더욱 어두웠다.
화산파는 이번 사태로 많은 것을 잃은 셈이었다. 게다가 오파일방은 맹주 자리까지 내놓게 되었다.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하고 말이다.
그러니 담기량을 바라보는 오파일방 장문인들의 표정이 밝을 리 없었다. 더욱이 이럴 때 일수록 담기량을 거들어줘야 하건만 종남파 장문인 곡상천과 청성파 장문인 청허자는 뒤로 쏙 빠져 버린 것이다.
“여기도 검림, 저기도 검림. 이거 아예 밥을 지어 바친 꼴이 되었으니, 이잉…….”
그리 말한 청허자는 그래도 찔리는 것이 있었던지 드러내놓고 담기량에게 불편한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던 청허자의 눈이 담담히 눈을 감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무당파 장문인 청하진인에게서 멈췄다.
“그러고 보니 무당파는 지금껏 당최 무얼 했었는지 궁금하외다.”
천라지망으로 마현을 쫓았을 때 무당파가 한 것은 사실 아주 미미했다. 무당파에서는 무당 제일검이라는 청명진인도, 태극수검 학방도, 그리고 태극검룡 학성 등 무당파 주요 무인들이 모두 빠진 채 마지못해 끌려오는 인상이 강했다.
“듣자하니 무당의 태극검룡이 마교 대공자와 친우 사이라지요? 그래서 그런 것이오?”
청허자는 비아냥거리며 청하진인을 추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하진인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담담한 표정을 흩트리지 않았다.
“어허, 청허 장문인. 해서 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소이다.”
말이 조금은 과하다고 느낀 것인지 개방 방주 불취개가 청허자의 독설을 가로막았다.
“흥, 빈도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오?”
청허자는 불취개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그런 뜻이 아니지 않소이까!”
“자자, 다들 그만 하시지요. 지금 서로 누가 맞다 틀리다 반목할 때가 아니지 않소이까.”
소림사 방장 혜공대사가 조금씩 억양이 높아지는 둘을 말렸다.
“지금 우리들끼리 이래봤자 육대세가에게 도움을 주는 꼴밖에 안 되지 않소이까.”
혜공대사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청허자와 불취개는 입을 꾹 닫았다.
“차라리 이리된 거…… 이 방법은 어떻겠소?”
곡상천이었다.
“무슨 방법 말이오?”
“검림주에게 맹주 자리를 주는 것이오.”
“어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불취개가 곡상천을 타박했다.
“아니오, 아니외다. 그리 생각할 것만이 아닌 듯싶소.”
그 말을 들은 혜공대사가 불취개의 반박에 고개를 저었다.
“역시 혜공대사와는 말이 통하는구려.”
혜공대사가 맞장구를 쳐주자 곡상천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어 말을 이어갔다.
“자, 다들 생각해 보시오.”
그렇게 곡상천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본인 역시 검림의 존재가 놀라웠고, 그 검림의 제자들의 무위가 하나같이 높아 경계했던 건 사실이외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이 있소. 그들은 고작 백여 명이 다라는 것을.”
곡상천의 말에 장문인들이 모두 눈을 빛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 해도 될 명분은 이미 생긴 셈이오. 그리고…… 크흠, 화산파 장문인실만 나가면 온통 검림과 검림주의 이야기밖에 없소이다. 우리가 육대세가에게 힘을 주고 난 뒤 고생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맹주직을 그에게 주면 더 낫지 않겠소? 우리가 밀어준다면 그 역시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고, 적절하게 당근과 채찍질을 한다면 우리에게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될 것은 없다고 보오.”
곡상천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장문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또 꼭 그를 맹주 자리에 앉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소.”
곡상천의 말에 다시 한 번 그에게로 시선이 모아졌다.
“삭초제근(朔草除根).”
곡상천은 상체를 살짝 숙이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삭초제근?”
“이대로 검림을 놔두면 어찌될 것 같소? 보나마나 지금의 명성을 이용해 단숨에 우리를 위협하는 대문파가 될 것이오. 차라리 무림맹에 가둬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오.”
“하지만 무림맹 맹주 자리를 이용해 힘을 기를 수도 있지 않겠소?”
“검림을 오로지 무림맹 소속 단체로 편입시키고, 주요 요직을 우리가 쥐고 있으면 그들이 세력을 확장시키고 싶어도 확장하지 못할 것이오.”
곡상천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각 장문인들은 곡상천의 말을 되씹으며 타당성을 검토하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소. 하지만 육대세가의 반발 역시 무시하지 못할 것 같소만?”
“하지만 명분이 우리에게 있지 않소이까?”
“명분?”
이미 곡상천은 그 부분도 생각한 바가 있는지 막힘없이 말을 술술 풀어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분명 중소문파들은 오파일방과 육대세가에 모든 힘이 집중되었다고 불만을 성토하고 있소. 그러니 우리가 앞장서서 이제는 멸마광검이라 불리는 검림주 진필성을 맹주로 추대한다면 중소문파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 분명하며, 그리되면 육대세가들 역시 어찌하지 못할 것이오.”
“중소문파들을 이용한다?”
“그렇소. 오히려 그들의 신뢰까지 얻을 수 있으니 지금보다 더 그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는 뜻도 되오.”
곡상천은 모든 말을 마치고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식은 차를 들어 마른 입술을 적셨다.
“아미타불, 곡 장문인의 의견에 이 소승은 찬성하는 바이오.”
“나도 찬성하오, 무량수불.”
모두들 곡상천의 의견에 찬성했다.
“찬성하오.”
그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아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던 담기량이 끝으로 곡상천의 말에 찬성했다.
“그럼 이 곡 모와 혜공대사가 함께 검림주를 찾아뵙지요.”
“그러는 것이 좋을 듯하오.”
“아미타불.”
그렇게 오파일방 장문인들의 회의가 끝이 났다.
곡상천과 혜공대사는 검림주 진필성을 만나기 위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둘이 일어나자 불취개와 청허자 역시 자리를 뜨고, 담기량과 청하진인 둘만이 남았다.
잠시 후 달리 할 말도 없어 어색해진 자리가 불편한지 청하진인마저 자리를 떴다.
모두가 나가고 홀로 방 안에 담기량만 적적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침울하게 바뀌었다.
오늘 담기량이 한 말이라곤 ‘찬성하오’, 그 한 마디가 다였다.
무림맹 맹주인 자신이 오파일방의 회의에서 이런 처량한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휴우.”
깊은 나락과도 같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담기량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진필성과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묘가 마주앉아 있었다.
“어쩐 일로 이 제갈 모를 초대한 것인지요?”
제갈묘는 내심 모종의 의심을 품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