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45화 (145/351)

# 145

20화

“아직 승리를 자축할 때가 아니라고 이 진 모는 생각하오. 무림맹의 검이 무서워 기이한 사술로 도망친 마교를 찾아 반드시 정의의 이름으로 단죄를 해야 합니다. 필시 사술로 이목을 속여 도망간 것일 테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오. 그러니 서둘러 그들을 찾아 다시는 이 땅에서 사악한 마인들이 활개 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무림맹의 영웅들이여, 아니 그렇소이까?”

진필성은 무림맹 무인들의 감정이 고조되고 있음을 느꼈다. 이때 더 불을 질러야 그들의 기억 속에 자신과 검림이 뿌리 깊게 각인되리라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챙!

진필성은 검을 뽑아들며 호소력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촌부이지만, 그 일에 이 진 모가 앞장서겠소이다!”

“와아아아!

“멸마광검 만세!”

“검림 만세, 검림 만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필성이 기대하던 반응이 터져 나왔다. 그 함성에 진필성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말려 올라갔다.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이 기회를 이용해 중원 무림에 나를 각인시키고 이들을 이용해 마교 대공자 놈을 반드시 죽여야겠어.’

계획이 틀어졌다고 낙담할 일만은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은 최악의 상황도 아니었고, 어찌 보면 오히려 호기일 수도 있었다.

무림맹 수뇌들이 있었지만 자신의 지휘로 마교 대공자를 찾아 죽이게 되면 자연스레 이름과 지휘능력까지 만천하에 알리게 되지 않겠는가.

‘크크크, 그리 되면 무림맹을 손 안에 둘 수 있게 되겠지.’

진필성은 몸을 돌리며 재빨리 무림맹 수뇌들의 얼굴을 면면히 살폈다.

앞장서서 걷는 진필성의 입술은 묘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 * *

소화산에서 약 25리 정도 떨어진 어느 이름 없는 야산.

고요하던 대기에 급격한 파장이 만들어졌다. 그 느닷없는 이변에 산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또한 근처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던 동물들 역시 놀라 펄쩍펄쩍 뛰며 달아났다.

파장의 중심에서 검은 기운이 번쩍였다.

파밧!

대기의 파장이 절정으로 치닫자 거센 돌풍이 그 일대를 한순간 휘몰아쳤다.

쏴아아아―

돌풍은 숲의 나무를 일제히 뒤흔들었고, 바닥에 뒹굴던 돌멩이들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 여파로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돌풍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도 툭툭 떨어졌다.

그들은 현기증을 느끼는지 다들 비틀거렸다.

하지만 현기증을 제대로 느낄 겨를도 없이 모두들 완전히 달라진 주변 환경에 놀라 눈을 부릅뜨며 입을 쩍 벌렸다.

그곳은 비릿한 피냄새도 없었고, 전장을 가득 채우던 살기도 없었다. 또한 자신들을 둘러쌌던 적들도 없었다.

냉천휘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허상이 아니었다.

“컥!”

그때 무리의 중심에 서 있던 마현이 한 바가지나 될 듯한 검은 피를 토해내며 허물어졌다.

“마, 마 공자!”

설린은 갑자기 바뀐 주위 환경을 돌아볼 틈도 없이 쓰러지는 마현을 감싸 안았다.

품에 안긴 마현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오한 때문인지 쉴 새 없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설린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마현을 바닥에 뉘였다.

“컥, 컥!”

마현은 몸을 들썩거리며 피를 다시금 게워냈다. 그리고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마 공자! 마 공자!”

설린은 안절부절못했지만 쉽사리 마현의 몸에 손을 대지는 못했다.

“설 사저,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전장에서는 멀어진 듯 보였지만 이곳이 어딘지를 모르니 아직 안전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냉천휘는 쓰러진 마현 앞에 쪼그려 앉은 설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설린은 냉천휘가 염려하는 바를 곧 알아들었다.

그녀 역시 여기가 어디인지, 또 전장과는 얼마나 떨어졌는지, 그리고 과연 안전한지 현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근처에 물길이 있는 듯싶습니다.”

“물길?”

주변을 급히 정찰하고 돌아온 설영대주의 말에 냉천휘는 내력을 끌어올려 청력을 높였다. 그러자 희미하지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냉천휘는 고개를 돌려 설영대원들을 쳐다보았다.

누구 하나 성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모두들 피에 절어 있었다.

흔적과 피 냄새를 제거하기에 물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설영대주도 그런 보고를 올렸을 것이다.

“제가 업지요.”

설린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 냉천휘가 마현을 조심스럽게 등에 업었다. 냉천휘로서는 아무리 무림인들이라지만 남녀가 유별한데다, 북해빙궁의 소궁주에게 마현을 업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사태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든 마현은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었다.

냉천휘는 마현을 업은 채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이동했다.

얼마 가지 않아 제법 물살이 거센 계곡이 나타났다. 다행이 물이 그리 깊지는 않았다.

냉천휘는 설린과 설영대를 이끌고 물로 들어가 흔적을 지운 후 물길을 따라 계곡 하류로 이동했다.

척후조로 먼저 길을 떠났던 설영대원 둘이 돌아와 보고했다.

“한 일각 정도 떨어진 하류에 제법 넓은 동굴이 있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아 한동안 은신하기 좋을 듯싶습니다.”

일행은 다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제법 큰 천연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고를 올렸던 설영대원의 말처럼 동굴은 계곡에 들어와서 보지 않는 한 좀처럼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고, 제법 넓고 깊어 한동안 일행이 은신하기에 적당해 보였다. 더욱이 바람이 안으로 들어와 사라지는 걸로 봐서 불을 지펴도 연기가 동굴 밖으로 새어나갈 걱정도 없었다.

설린은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평평한 곳을 찾았다. 거기에 자신이 입고 있던 두툼한 외투를 벗어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는 냉천휘가 업고 있던 마현을 조심스럽게 받아 눕혔다.

이동하는 사이 마현의 상태는 더 나빠진 듯했다. 그의 숨결이 점점 미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설린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설린은 조심스럽게 마현의 완맥에 손을 얹고 맥을 짚었다. 맥은 약하게 뛰고 있었고 그 간격도 매우 불규칙했다.

임시방편으로 손을 쓰기 위해 설린은 마현의 가슴 앞섶을 풀어 헤쳤다.

“헙!”

그 순간 설린은 너무 놀라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마현의 하복부를 기준으로 오른쪽은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왼쪽은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문제는 대립되는 그 두 색이 미세하지만 조금씩 몸 전체로 번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린은 마현의 몸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검은색으로 물든 곳은 뜨거웠고, 푸르스름하게 변한 곳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현의 단전을 중심으로 두 기운이 서로 부딪히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마현 본인의 마기일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설린 자신과 냉천휘의 냉기임이 분명했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설린은 절망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뛰어난 영약으로 두 기운을 다스려 하나로 다시 취합하는 것인데 영약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냉천휘 역시 그런 마현의 모습에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북해빙궁으로 간다면 어쩌면 방법을 강구할 수도 있겠지만, 쫓기는 지금 처지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마른 장작을 좀 준비해 줘.”

설린은 눈물이 어른거리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명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지 그뿐이란 생각에 설린은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마현의 마기가 몸에 침투한 이질적인 냉기를 다스릴 수 있게, 일단 불을 지펴 냉기에 점점 잠식당하고 있는 부분만이라도 따뜻하게 해줘야 했다.

* * *

아직은 어둠이 온전히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서탁 위에 놓인 초 하나가 부족한 빛을 채워주고 있었다.

화직!

율기는 문사다운 부드러운 손으로 서탁 위에 올려놓은 종이를 구기며 움켜쥐었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던지 율기는 손바닥 안에서 종이를 몇 번 더 구겼다.

‘그만큼 떡밥을 뿌려줬는데도 놓쳐?’

무림맹과 남해태양궁, 그리고 검림까지 합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현을 놓쳤다는 보고에 노기가 치밀어 오른 것이었다. 섬뜩한 귀기가 흘러나오는 율기의 눈동자가 찰나지만 황금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사라졌다.

율기는 양손을 들어 미간과 콧잔등을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미간에 굵게 패인 주름은 그가 얼마나 깊은 고심에 빠져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의 여명이 밝아 오며 창밖이 환해졌을 때 율기의 미간에 잡혔던 주름도 말끔히 사라졌다.

“마주전으로 가볼까?”

평소의 담담하던 얼굴로 돌아온 율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콰당!

율기가 막 나서려는 순간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도종극이 안으로 들어왔다.

“율 군사!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것인가?”

도종극은 노기가 가득 찬 목소리로 율기를 채근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율기는 눈을 돌려 활짝 열린 문밖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자신의 심복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율기가 심복들을 향해 손을 까딱거리자 활짝 열렸던 문이 다시 닫혔다.

“크흠.”

율기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도종극은 무안한 얼굴로 낮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안 그래도 찾아뵈려 했었습니다.”

율기는 여전히 불만에 가득 찬 도종극을 이끌고 탁자로 향했다.

“일을 어떻게 처리를 했기에 그놈이 버젓이 살아서 도망을 쳤단 말인가?”

도종극은 조금 전 일이 있어서인지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율기를 질책하는 모습은 여전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소림주.”

율기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설마 검림이 그렇게 허무할 정도로 쉽게 놓칠 줄 몰랐습니다.”

도종극 역시 율기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기에 그저 못마땅한 표정만 지을 뿐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대계에 차질이 생겼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그래서 계획을 좀 달리할 생각입니다.”

“뾰족한 수라도 있는 것인가?”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습니다.”

율기의 눈에서 살심 어린 귀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득의에 찬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도종극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지간해서 율기가 저런 웃음을 짓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좋은 계책이 있는 것인가?”

도종극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며 은밀해졌다. 또한 그 목소리에 은근한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마교 장악 계획을 좀 더 앞당길까 합니다.”

“계획을 앞당겨?”

도종극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현이 죽지 않았기에 오히려 일이 쉬워질 듯합니다.”

“……?”

“또한 본림의 대계를 방해하며 감히 밥숟가락을 올린 검림에게도 한방 날릴 수도 있습니다.”

도종극은 음산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답답하다, 빨리 말해보라.”

율기가 여유를 부리며 말을 돌리고만 있자 도종극은 약간 짜증 어린 목소리로 재촉했다.

“사실 마교 장악에 가장 걸림돌이 부교주입니다.”

도종극은 율기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를 마교 밖으로 내보낼 생각입니다. 그리고 교주를 단숨에 중독시켜 버리면 됩니다.”

“하지만 부교주를 어떻게 밖으로…….”

말을 내뱉던 도종극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율기가 무슨 계책을 세운 것인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마현?”

“그렇습니다.”

도종극의 짐작이 맞았다.

“아마 지금쯤 검림은 무림맹을 차근차근 접수해나가고 있을 겁니다. 그들의 주요 거점에 마현이 잡혀 있다는 거짓 정보를 허진에게 주는 것이지요. 제자의 일이라면 불길에 섶을 지고서라도 뛰어들 위인이니…….”

“그리되면 마교는 무주공산이 되는 것이군.”

도종극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율기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허나, 마교가 무주공산이라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소림주께서 하셔야 합니다.”

“본인이?”

“그렇습니다.”

율기는 도종극의 눈을 직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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