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14화
『다크스티드를 소환하라, 그들을 타고 길을 뚫는다!』
마현은 어느새 백팔나한진을 거의 다 완성해가는 소림사 무승들을 보며 서둘러 명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재빨리 마력을 땅속으로 흘려보냈다.
푸학!
땅거죽이 불쑥 솟아오르며 헤집어지더니 검은 말 한 마리가 그 속에서 튀어나왔다.
마현의 다크스티드인 풍이었다.
푸히이잉!
검은 기운을 뿜어내는 풍이 주위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설 소궁주와 냉 소협, 타시오. 어서!』
마현의 매직마우스가 설린과 냉천휘에게 들려올 때 백팔나한진 안 곳곳에서 땅거죽이 뒤집어지며 말들이 튀어나왔다.
흑풍대는 저마다 자신의 다크시티드에 올라타며 각자 등 뒤에 한 명씩의 설영대원을 태웠다.
『이장로, 그대는 수고스럽겠지만 발로 뛰어야겠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군. 몸은 이래도 제법 잘 달립니다.』
회회혈마는 헉헉대며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길은 본인이 뚫겠다!』
마현은 마력을 끌어올리며 양손을 바닥으로 내려붙였다.
“어둠의 마나로 대지의 근원을 흔든다, 필드 쇼크, 리터레이트!”
마현의 손에서 뻗어나간 마력은 바닥을 뒤흔들며 무무가 있는 곳으로 뻗어나갔다.
콰콱 콰콰콱!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갈라지고, 뒤집어졌다.
땅이 요동치니 당연히 그 땅을 디디고 서 있는 이들 역시 몸의 중심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건 무무도 비켜갈 수 없었다. 다만 다른 이들보다 몸의 균형을 빨리 잡았다는 게 조금 다를 뿐이었다.
무무는 뒤틀리고 갈라지는 땅 한가운데에 그냥 서 있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튀어 오르는 흙 조각들을 밟고 마현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붙들리고 말았다. 아니 단지 붙들린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균형을 잃고 쓰러지며 코를 바닥에 처박았다.
그런 무무의 발목을 하얀 뼈로 이루어진 손이 잡고 있었다.
『주군, 저희도 돕겠습니다.』
왕귀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림사 무승들과 종남파 무인들이 갈라진 땅속으로 무릎까지 푹푹 빠져 들어갔다.
그렇게 백팔나한진과 그 외부를 둘러싸던 종남파 제자들의 신형이 일제히 무너지자 다크시티드들이 야수와도 같은 울음소리를 터트리며 앞발을 번쩍 들어올렸다.
쿵!
지축이 울릴 정도로 땅을 내찬 다크시티드들은 앞으로 튀어나갔다. 다크스티드의 거대한 앞발은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가차 없이 짓뭉개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그로 인해 피어오른 흙먼지 뒤로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다크스티드 위에 올라탄 설영대원과 설린, 그리고 냉천휘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벌써 반 시진이 흐르며 투명화 마법이 풀린 것이다.
마현은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무무를 잠시 노려보다 다시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플라이 마법으로 허공에 오른 마현은 흑풍대가 달려 나가는 곳으로 순간이동하며 그들을 따라잡았다.
하지만 소화산을 벗어난 지 일각이 채 되지 않아 마현은 다시 달리기를 멈춰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 앞으로 수백의 종남파 제자들이 길목을 막아선 까닭이다.
어쩐지 조금 전 길목에서 종남파 제자들이 힘을 쓰지 못한다 싶었다. 알고 보니 종남파의 고수들은 그 뒤 상당히 넓은 평원에서 삼진(三陣)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무무가 터트린 폭죽은 저 멀리 떨어진 무림맹 수뇌들과 천라지망을 펼친 일진에게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바로 후미에서 대기하고 있던 삼진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마현이 흑풍대와 설영대를 가로막은 삼진을 향해 마력을 끌어올릴 때였다.
쑤아아앙!
한 줄기 날카로운 파음이 허공에 떠 있는 마현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곧이어 서늘한 예기가 파고들자 마현은 허리를 젖혀 몸을 웅크렸다.
사각!
한 자루의 검이 날아와 마현의 소매 끝을 잘랐다.
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그곳에는 무무가 서 있었다. 시퍼런 안광을 내뿜으며 마현을 노려보는 무무 뒤로 흙먼지를 뒤집어쓴 소림사 무승들과 종남파 제자들이 어느새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후방에서 삼진을 구축하고 있던 종남파 제자들과 합세해 흑풍대와 설영대를 완전히 에워싸 버린 후였다.
“결국 이곳으로 올 줄 알았다.”
삼진을 이루는 종남파 무리 구석에서 한 장년인이 걸어 나왔다.
바로 곡상천이었다.
종남파 장문인인 그가 무림맹 수뇌들과 함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곡상천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품에서 폭죽을 꺼내 하늘을 향해 터트렸다. 그러자 조금 전과는 다른 푸른 불꽃이 하늘로 치솟으며 밤하늘을 환히 밝혔다.
잠시 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림맹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마현과 흑풍대, 그리고 북해빙궁과 설린, 냉천휘를 철통같이 가둬 버렸다.
“역시 제갈 가주의 혜안은 대단하오.”
곡상천은 무림맹 무인들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무림맹 수뇌들 중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묘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 보니 신기수사(神機秀士)란 별호가 오히려 부족한 듯하오.”
“하하하하.”
“푸하하하하.”
무림맹 수뇌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담기량만은 잔뜩 굳어진 얼굴로 마현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화산파와 무림맹의 치욕을 그대의 목숨으로 받을 생각이다.”
담기량의 냉랭한 목소리에 거의 이천 명에 달하는 무림맹 무인들의 몸에서 일제히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 살기는 흑풍대와 설영대를 넘어 하늘까지 뒤덮었다.
* * *
탁자에 앉아 서책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코로 새하얀 콧김이 규칙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사내가 연초를 피워서가 아니다. 운기조식에 의해 유형화된 내력이 내비친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그리 만들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추워서 앉아 있기에도 힘들 듯한데 사내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한 표정으로 서책을 읽고 있었다.
근 한 시진이나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꼬박 책을 읽고 있던 사내는 결국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장시간 고개를 숙이고 책을 봐서인지 사내는 뻐근해진 목을 툭툭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리를 살짝 옆으로 비틀어 가볍게 몸을 푼 후 창문으로 다가가 활짝 열었다.
휘이이잉―
매서운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사내의 얼굴을 마구 할퀴었다.
그 바람에 몸이 움츠러들 법도 하건만 사내는 눈을 반개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날이 많이 풀렸군.”
중원의 한겨울 바람보다 더 혹독한 영하의 바람인데도 푸근함을 느낀다고?
사내가 그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이 바로 한여름에도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는 북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북해의 제왕인 북해빙궁주 설관악이었다.
3층 창문 너머 드넓은 눈밭을 바라보는 설관악의 눈에 뜰을 걷고 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한한파파였다.
설관악은 한한파파를 보며 무림맹이 있는 화산파로 떠난 설린을 떠올렸다.
‘한한파파를 함께 보냈어야 했나?’
설관악은 한한파파를 보자 홀로 무림맹으로 떠나보낸 설린이 걱정되었다. 물론 냉천휘와 설영대가 함께 갔다지만 그건 다른 문제였다.
어릴 적부터 설린은 한한파파와 거의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둘을 함께 내보내려 했다. 하지만 한한파파가 어느 날 찾아와 설린을 홀로 보내고 싶다고 간곡히 청했다.
그 이유는 언제까지 자신이 설린을 돌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설린이 마현에게서 특별한 감정을 느낀 때부터라고 했다.
그것을 알게 되자 한한파파에게 있어 설린은 이제 더는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어느새 사랑을 아는 성숙한 여인이 되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한파파는 설관악에게 설린을 떠나보낼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간곡하게 말했다.
그것은 설관악에게 조금, 아니 상당히 뜻밖의 이야기였지만 솔직히 아버지인 자신보다 한한파파가 설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다.
설관악은 왠지 처량한 모습으로 홀로 뜰을 걷고 있는 한한파파를 보자 문득 후회가 들었다.
설린을 중원에 보내지 말 것을, 보내더라도 한한파파와 함께 보낼 것을. 그런 후회를 떨쳐버릴 수 없는 건 설관악에게 있어 설린은 여전히 어린 딸인 까닭이었다.
‘마교 대공자의 이름이 마현이라고 했던가?’
설관악은 창문을 닫으며 탁자로 돌아가 앉았다.
단지 이름뿐이었다. 얼굴도 성정도 그저 한한파파를 통해 간략하게만 들었을 뿐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냉천휘, 그 녀석이 와보면 알게 되겠지.’
설관악은 무림맹으로 떠나면서 냉천휘에게 은밀히 두 가지 명을 내렸다.
하나는 설린을 잘 보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현이 어떤 인물인지 좀 더 주위 깊게 살펴보란 것이었다.
“궁주님.”
휘휘 머리를 흔들며 설관악이 다시 책을 펴들려고 할 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부궁주인가?”
“그렇습니다.”
“들어오게.”
설관악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용으로 쓰이는 원형탁자로 걸어갔다.
부궁주 냉하상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급히 설관악 앞으로 다가왔다.
아직 의자에 앉기도 전인지라 설관악은 의아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겐가?”
“정체 모를 서한이 날아왔습니다.”
“정체 모를 서한? 어디서 보낸 거라는 것은 없고?”
“그저 림(林)이라고만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서한의 내용이…….”
냉하상은 말끝을 흐리며 서한을 내밀었다.
북해빙궁주 전(前).
마교와 무림맹 사이의 충돌을 이용해 남해태양궁 양곽원 소궁주가 양위도 궁주의 묵인 하에 북해빙궁 설린 소궁주를 향해 음심을 드러냄.
차후 설린 소궁주를 납치, 강제 결혼을 통해 북해를 노릴 것으로 판단됨.
림(林) 배상(拜上).
서한을 읽어 내려가는 설관악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평소 얼음조각처럼 희고 투명하던 그의 얼굴은 서서히 붉어졌고, 이윽고 양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꽈직.
설관악은 서한을 양손으로 구겼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석상처럼 굳은 채 몸만 떨어댔다.
“이 서한이 사실인가?”
“현재 진위를 파악 중입니다.”
냉하상은 그저 허리만 숙일 뿐이었다.
사실 북해빙궁은 북해 밖의 일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새외삼궁 중 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중원에 대한 정보수집 능력은 어지간한 중소문파보다 못했다. 아니 못한 것이라기보다 애초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부궁주님.”
은은한 노기와 살기가 감도는 궁주실 안으로 한 중년인이 뛰어 들어왔다.
“어찌 되었나?”
냉하상 역시 아들인 냉천휘가 설린과 함께 무림에 나가 있었기에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다급히 물었다.
“현재 남해태양궁이 무림맹과 함께 마교의 대공자와 본궁을 뒤쫓고 있다고 합니다.”
쾅!
그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설관악이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콰직, 우당탕탕탕!
단단한 회양목으로 만들어진 탁자가 반으로 쪼개졌다.
“남해태양궁의 오만이 도를 지나치는구나! 감히 북해에 도전을 한단 말인가?”
설관악의 눈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이 폭사되었다.
“자칫 무림맹과 마교의 충돌 사이에서 소궁주가 화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궁주님.”
그 말에 설관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궁주.”
“하명하십시오.”
“지금 당장 한풍대와 설빙대를 준비시키라.”
깊게 허리를 숙이는 냉하상을 향해 설관악이 굳은 의지가 담긴 냉엄한 목소리로 다시 명을 내렸다.
“그리고 천종백랑(天從白狼)을 데리고 본좌가 직접 중원으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