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언제 왔는지 보지도 못했다. 아니 보는 건 고사하고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다.
냉천휘의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에는 어느새 경외감마저 생겨났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현재 마현의 몸은 과도한 마력의 방출로 지독히 혹사당한 상태였다.
설영대에 투명화 마법을 걸었고, 두어 번 걸친 싸움에서 일행을 숨겨야 했기에 광범위한 지역에 음파차단 마법을 펼쳤었다.
게다가 무림맹에 혼란을 주기 위해 장거리를 순간이동 할 수 있는 텔레포테이션(Teleportation)을 무려 네 번이나 연속적으로 펼쳤다.
순간이동 마법의 종류는 세 가지다. 아니, 이론으로만 가능하다고 알려진 차원이동 마법까지 더한다면 네 가지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력을 토대로 한 마법사들의 이론일 뿐이다.
3서클의 블링크, 6서클의 텔레포테이션, 그리고 7서클의 워프 네비게이션(Warp navigation).
이렇게 세 개가 마현이 알고 있는 순간이동 마법이다.
이 세 마법은 각기 그 쓰임새가 다르다. 블링크는 개인 단거리 순간이동 마법인데 비해 텔레포테이션은 개인 장거리 순간이동 마법이다. 그리고 워프 네비게이션은 단체 중단거리 순간이동 마법이다.
만일 개인이 아닌 단체가 장거리 순간이동을 하려면 워프 게이트(Warp gate) 마법진을 이용해야 한다.
마현이 현재 6서클이었기에 텔레포테이션 마법을 충분히 쓸 수 있었지만 이제껏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한 번도 펼치지 않았었다. 또한 시전하는데 상당량의 마력이 필요했기에 조금 꺼려했던 것도 사실이다.
‘후우…….’
아직 서클 단전의 마력이 고갈된 것은 아니지만 한순간 많은 마력을 사용한 까닭에 마현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하지만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마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어느 정도 호흡이 편해지자 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금부터 속도를 낸다.』
마현의 명에 소화산을 통과하는 일행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한동안 가장 앞서 달려가던 마현의 몸이 갑자기 멈췄다. 그에 맞춰 흑풍대와 북해빙궁의 인물들 역시 걸음을 멈췄다.
마현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마력이 맴돌고 있었다.
투시 마법을 이제껏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라지망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로군.’
일행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마현은 투시 마법을 통해 앞에 진을 치고 있는 무림맹 무인들을 보고 있었다.
‘소림사와 종남파인가?’
쉽지 않을 거라 여겼지만 이처럼 빨리 길목이 막힐 줄은 몰랐다. 결국 마현이 조금 전에 하늘에서 본 천여 명의 무림맹 무인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다.
『무슨 일인가요?』
신중하게 몸을 웅크리고 전방을 주시하는 마현 곁으로 설린이 다가오며 전음으로 물었다.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 같소.』
마현은 소림사와 종남파가 진을 치고 길목을 막아선 것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들을 쳐다보는 마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투명화 마법이 시현된 지 벌써 한식경이 흘렀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소화산을 벗어나기도 전에 투명화 마법이 해체될 것은 자명한 일.’
마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강행 돌파한다!』
안전하게 돌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그럴 경우 오히려 투명화 마법이 풀려 더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더욱이 마현 역시 상당한 마력을 사용한 터라 길게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흑풍대주는 우측, 부대주는 좌측을 맡으라.』
『명!』
마현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음파차단 마법을 광범위하게 펼쳤다.
결국 자신들의 진로가 드러나게 되겠지만 무림맹 수뇌부에게 알려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함이었다.
마현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마력을 끌어올린 후 더욱 강한 위력을 내뿜기 위해 마법을 중첩시켰다.
“윈드 커터, 리터레이트!”
휘이이잉―
마현이 떠 있는 허공 주위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바람은 마현에게 모여들수록 점차 광포한 기세로 돌변하며 그 세력 범위를 넓혀갔다.
* * *
난데없이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자 소림사 무승들과 종남파 무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마현이 떠 있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날이 점점 밝아오며 내비치는 여명뿐이었다. 그런데도 바람은 흉포한 기세로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마현의 서클 단전에서 들끓던 마력이 폭발하듯 분출되었다. 거기에 맞춰 금방 폭발할 듯 팽팽하게 한곳에 모여 있던 바람이 귀곡성을 지르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끼이이익!
마치 해일처럼 삽시간에 쏟아져 나온 바람이 무램맹 무인들에게 휘몰아쳤다.
소림사 무승들을 이끌고 있던 무승각주 무무는 바람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지만, 그저 날씨가 곧 궂어질 모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낯이 하얗게 변했다.
“으아악!”
“크악!”
비명이 들린 직후 그때서야 자신을 훑고 지나간 바람에서 무무는 예기(銳氣)와 살기를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내려다보니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곳에는 여지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쐐애애액!
그리고 또다시 들려온 허공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괴음.
무무는 재빨리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내력을 끌어올려 주먹에 실었다.
콰광!
권강은 그의 주먹에서 일 장도 채 나아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터졌다.
자연의 바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무는 최대한 내력을 끌어올리며 기감을 열어 허공을 주시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있을 거라 여겼다.
그렇게 한참 동안 허공을 주시하던 무무는 예기와 살기를 담은 요상한 바람이 어느 한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무는 입술을 앙다물며 그 지점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쾅!
강한 진각에 무무의 주위로 먼지가 피어올랐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는 권강에 휘말려 허공으로 비산했다.
권강이 허공을 가르자, 사방에서 몰아치던 바람이 뚝 멈췄다. 그리고 희미하게 공간이 일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무의 눈이 반짝였다.
‘있다! 분명 저 허공에,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있다.’
무무는 그것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자신이 뒤쫓고 있는 자, 사술 같은 마공을 보여준 자, 필시 마교 대공자 흑풍마군 마현일 것이다.
‘역시 천하의 소림사란 말인가!’
마현은 기감만으로 자신에게 권강을 날린 무무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오로지 앞만 베며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라!』
그 명에 흑풍대가 먼저 앞으로 튀어나갔다.
마현의 매직마우스가 흑풍대에게만 전해진 것이 아닌 듯 뒤를 따르는 설영대 역시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으악!”
“크아악!”
잠시 그쳤던 비명이 다시 터져 나왔다.
그리고 피가 튀었다.
하지만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하는 곳에는 소림사 무승들과 종남파 제자들밖에 없었다. 무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들어 허공을 잠시 노려보았다.
격하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눌렀다. 부릅뜬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유도 모른 채 턱턱 죽어나가는 소림의 무승들을 보면서도 그는 움직이지 않고 전장을 보고, 또 봤다.
그러자 무무의 눈에 일관된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피를 흘리며 홀로 죽어나가는 무승들의 주검이 한 줄로 길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사술일 것이다!’
무무는 그리 짐작하자마자 흑풍대의 동선을 예상하고는 그 지점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빈 허공으로 최대한 내력을 끌어올려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파방!
강맹한 권강이 그의 주먹에서 폭발하듯 내뿜어졌다.
콰과과광!
권강은 무무의 예상대로 일 장 앞 허공에서 마치 무엇에 가로막힌 듯 터졌다.
무무는 재빨리 시선을 내려 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역시나 바닥에는 권강이 터진 곳에서부터 시작해 뒤로 두 줄기의 흔적이 길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발이 강제로 뒤로 밀리며 만든 흔적이 분명했다.
“마교 놈들이다! 폭죽을 터트려라, 어서 폭죽을 터트려!”
무무는 목소리에 내력을 담아 소리쳤다.
그 목소리를 듣고 후방에 위치한 소림사 무승 몇몇이 품에서 폭죽을 꺼내들었다.
무무가 그처럼 쉽게 흑풍대와 설영대의 길을 막을 줄 마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그로 인해 길이 막혔으니 뚫어야 했다.
마현은 급히 무무를 향해 내려가다가 ‘폭죽을 터트리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며 다시 허공으로 신형을 띄웠다. 그리고 폭죽을 꺼내든 소림사 무승을 본 순간 그들 머리 위로 순간이동하며 윈드 커터를 날렸다.
쐐애액!
서걱!
바람의 칼날은 여지없이 무승들이 들고 있던 폭죽을 잘라 버렸다. 동시에 고통에 찬 비명이 그들 속에서 터져 나왔다.
펑! 퍼엉!
그때 마현의 등 뒤로 폭죽 하나가 터지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마현이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무무가 어느새 폭죽을 터트린 것이다.
‘이런!’
설마 무무가 폭죽을 터트릴 것이라곤 생각지 못한 마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게 마현이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몇 군데서 다시 폭죽이 터졌다.
한순간의 방심이 일을 크게 만들어 버렸다.
가능하면 조용히 일을 처리하기 위해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바람 계열의 마법을 썼건만, 그마저도 무무의 냉철한 판단과 무력, 그리고 폭죽으로 인해 이제는 허사가 되어 버렸다.
마현은 급히 몸을 돌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림맹 무인들이 우르르 이곳으로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소림사 무승각주가 있는 곳에서 터진 폭죽이라 그런지 무인들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안 되겠다.”
마현은 막힌 길을 다시 뚫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파이어 재벌린, 리터레이트!”
마현의 주위로 이글거리는 불덩이들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곧 길게 늘어나더니 붉은 창으로 변했다.
마현은 화창들을 무무를 향해 일제히 날렸다.
무무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긴 불덩이, 화창을 보자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콰광!
무무가 있던 자리에 마치 벽력탄이 터진 것처럼 큰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무무는 연신 뒤로 물러났다.
콰과과광!
그가 뒤로 물러난 자리에는 여지없이 화창이 내리꽂혔고, 폭발과 함께 흙먼지와 부서진 돌 파편이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피할 수 없었던 무무는 합장하며 모든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은은한 황금색 빛이 흘러나왔다.
빛은 그의 몸을 완전히 에워싸며 호신강기로 변했다.
금강부동심법(金剛不動心法)을 펼친 것이다.
황금색으로 둘러싸인 무무에게 대여섯 개의 화창이 내리꽂혔다.
콰과과광!
무무의 몸이 한순간 불길에 휩싸였다.
잠시 후 불길이 사라지고 무무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여전히 합장을 한 모습 그대로였다.
무무는 불길이 사라진 것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떴다. 그에게서 더는 특유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악귀를 때려죽이는 사천왕처럼 무시무시하고 흉맹했다.
기세가 흉흉하게 변한 무무 앞에 여전히 투명화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마현이 나타났다.
하지만 무무는 마현이 서 있는 곳에서 미미하게 공간이 일렁거리는 기척을 감지했다.
무무는 합장을 풀며 목소리를 높였다.
“소림사 무승들은 들으라, 나를 중심으로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을 펼쳐라, 그리고 살계를 허락한다!”
무무의 행동으로 어렴풋이 현 상황을 짐작한 소림사 무승들은 재빨리 무무를 둥글게 에워싸며 백팔나한진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포위망을 뚫지 못한 흑풍대와 설영대 역시 백팔나한진에 갇히고 말았다.
『주군, 흑풍대는 상관없으나 설영대의 투명화 마법이 곧 깨어질 것 같습니다.』
마현의 등 뒤에서 왕귀진의 전음이 들렸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나?’
예상치 못했던 무무의 뛰어난 무공과 소림사 무승들이 눈에 보이지 않은데도 흑풍대의 진로를 가로막는 바람에 어느덧 제법 많은 시간이 흘러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