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37화 (137/351)

# 137

12화

그 흔적 때문일까. 조금 전 잡담을 나누던 수하들의 기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은 추적에 익숙한 듯 역할을 나누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수장의 손짓에 몇몇은 사방을 경계하며 살폈고, 몇몇은 수풀을 벗어나 공터로 들어섰다.

조심스럽게 공터로 들어선 몇몇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재빨리 꺼진 모닥불로 다가갔다.

모닥불은 이미 꺼져 있었지만 여전히 불기가 느껴졌다.

‘이 정도의 열기가 남아 있다면…… 자리를 뜬 지 채 일각이 지나지 않았을 터.’

모닥불을 확인한 무림맹 무인이 수장과 눈을 마주친 후 간단한 수화로 보고했다.

상황을 파악한 수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손을 넣었다. 그가 꺼낸 것은 폭죽이었다.

폭죽을 터트리기 위해 양손을 모을 때였다.

수장은 섬뜩한 파장이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서걱!

살이 갈라지고 뼈가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서 핏줄기가 솟구치는 것도 보였다.

살이 갈라지고 뼈가 잘리는 그 소름끼치는 소리가 다름 아닌 자신의 몸에서 난 것임을 수장이 알았을 때, 피가 그의 얼굴에 튀었다.

툭!

수장의 잘려나간 양팔과 폭죽이 바닥에 떨어졌다.

“크아악!”

뒤늦게 찾아온 지독한 고통에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이 시작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놀란 얼굴로 공터에 서 있던 무림맹 무인들의 몸이 먼저 갈라졌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빗줄기처럼 후드득 떨어지며 마른땅을 적셨다. 한순간 공터는 피에 젖어 비릿한 혈향을 풍겼다.

수풀 속에서 그들을 엄호하던 이들 역시 그 기괴한 광경을 본 순간 고통을 느끼며 쓰러졌다.

“크아아―악!”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비명이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상한 것이 있었다.

바로 산울림, 메아리였다. 분명 비명소리로 만들어진 메아리가 다시 들려와야 하는데, 아무 소리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그 신비한 마력의 파장 때문인가? 그리고 진법?’

설린은 모골이 송연하게 하는 살육의 현장을 주시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알람 마법과 외부에서는 자신들이 보이지 않았던 조금 전의 환영진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진법을 펼칠 시간조차 없었다. 그런데 울리지 않는 메아리라니.

설린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마현을 쳐다보았다.

마현은 무림맹 한 수색조의 수장이 떨어트린 폭죽을 들고 있었다.

‘폭죽이라…….’

폭죽을 살피던 마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수월하게 빠져나갈 수도 있겠군.’

마현은 폭죽을 들고는 공터에서 대기하고 있는 흑풍대와 북해빙궁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 * *

거대한 사람들의 띠가 산 하나를 둥글게 에워싼 후 서서히 좁혀나가는 광경을 후방에서 지켜보던 양곽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무림맹의 힘을 다시 한 번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런 양곽원 옆에는 두 명의 중년사내가 서 있었는데, 바로 왼팔이 잘린 열풍대주와 적양대주였다. 적양대주는 일이 터진 직후 곧바로 합류했다.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오.”

적양대주는 열풍대주의 창백한 모습에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팔이 잘린 후 제대로 쉬지도 못한 열풍대주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괜찮소.”

열풍대주는 비록 안색은 창백했지만 조금도 흔들림 없는 굳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적양대가 선두에 서겠소.”

적양대주는 열풍대주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비록 정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무뚝뚝한 어투였지만, 열풍대주는 그것이 적양대주의 천성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 가까운 관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근 삼십 년을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고맙소.”

그렇게 삼십 년을 보아온 사이답지 않게 적양대주를 대하는 열풍대주의 모습도 그리 친근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청년 시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자주 본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친분을 쌓은 것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남이라고 하기엔 부족하고, 그렇다고 친우라 하기엔 넘치는 그런 모호한 관계였던 것이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오?”

적영대주는 눈을 내려 열풍대주의 왼팔이 잘려나가 헐렁해진 소매를 보며 물었다.

그 시선을 느낀 열풍대주는 이제 간신히 피가 지혈된 왼쪽 어깻죽지를 만지며 어색하고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모르겠소.”

“흠.”

“하지만 다시 시작은 해볼 생각이오.”

“그렇다면?”

적양대주의 말에 열풍대주는 고개를 돌려 잠시 열풍대원들을 둘러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물러날 생각이오.”

열풍대주의 무거운 대답에 적양대주는 입을 열지 못했다. 굳이 보지 않아도 험난한 길이 훤히 보인 까닭이다.

두 사람이 어색한 침묵에 빠져 있을 때, 하늘에서 전서구 한 마리가 적양대주를 향해 쏜살같이 내려왔다. 전서통에서 전서를 빼든 적양대주는 양곽원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궁주께서 보내신 전서입니다.”

“아버지께서?”

양곽원은 적양대주가 내민 전서를 받아든 후 펼쳤다.

너는 남해의 태양이다.

태양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응당 가져야 하는 법.

갖거라.

짧은 서신이었다.

하지만 양곽원에게 있어 이보다 더 반가운 서신은 없을 것이다.

“소궁주.”

막 서신을 삼매진화로 태우고 있는 양곽원 곁으로 이번에는 열풍대주가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림에서도 전서구가 왔습니다.”

“무슨 내용이던가?”

“원하시는 대로 빙화는 무사히 넘기겠다는 뜻을 밝혀 왔습니다.”

양곽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건 자신의 확고한 뜻도 일부 반영 되었겠지만 아마 아버지의 입김이 더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같은 서신을 보낸 것이 틀림없다고 양곽원은 생각했다.

“무례하군. 아직까지 감히 본인 앞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으니 말이야.”

양곽원은 달랑 전서구를 이용해 전서만 보낸 검림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득의양양한 눈웃음을 지었다.

무림맹도, 검림도 빙화를 자신에게 주기로 약조했다.

신비문을 자처하는 검림의 의도를 잘은 모르나 양곽원은, 그리고 남해태양궁은 상관없었다.

무림맹이 지금처럼 중원의 한 축을 지배하든, 검림이 마교와 무림맹의 뒤통수를 치고 중원을 지배하든, 남해태양궁은 그동안 그래왔듯 앞으로도 변함없이 남해를 지배할 테니까. 그리고 설린을 차지하게 될 테니까.

게다가 어느 쪽이 새로이 중원의 패자가 되던 북해의 지배권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양쪽 모두에게 받아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것인가?’

“후후후.”

양곽원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옅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양곽원과 무림맹 수뇌들이 서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붉은 폭죽이 터지며 하늘로 불꽃이 치솟았다.

당연히 양곽원은 고개를 돌려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있는 무림맹 수뇌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 중 제일 먼저 맹주 담기량과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즉시 양곽원은 열풍대주와 적양대주를 불렀다.

“열풍대주, 적양대주.”

“예, 소궁주.”

“하명하시옵소서.”

“남해태양궁은 일단 빙화만 사로잡는다. 그것에 방해되는 것은 모조리 죽여도 좋다.”

“명!”

“명!”

명을 받은 둘은 각자 수하들을 데리고 폭죽이 터진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양곽원도 열풍대와 적양대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하지만 아직 발목이 온전히 낫지 않아서인지 움직임이 기민하지는 못했다.

* * *

폭죽이 터진 직후, 무림맹과 남해태양궁이 일제히 자리를 떴던 그 공터에 새하얀 비단 무복을 입은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소매에는 그들이 속한 곳을 상징하는 수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한 자루 검이었다.

바로 검림이었다.

“천라지망을 저렇게 뒤흔들어 놓다니, 가히 마교 대공자의 무력은 상상을 불허하는군.”

가장 앞에 서 있는 장년인이 윤기가 흐르는 검은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폭죽이 터진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허리에 찬 검과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이 아니었다면 인자한 학사라고 해도 믿을 만큼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우검 호법.”

그 옆으로 그와 비슷한 연배의 장년인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의 얼굴은 우검 호법과 달리 매부리코에 눈꼬리가 약간 치솟아 있어 성정이 상당히 괴팍해 보였다.

또한 마치 쇠를 박박 긁어대는 듯한 음성은 그 인상을 더욱 괴팍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역시 검과 시퍼런 안광이 아니었다면, 꼬장꼬장한 관리나 어느 학당의 훈장이 아닐까 싶을 만큼 한편으론 중후한 품격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오직 뜻을 따를 뿐이네. 헌데 자네는…… 그렇지 않다는 건가, 좌검 호법?”

“어찌 호법으로 림주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단지 호승심이 일어서 그런 게지.”

가늘게 찢어 놓은 듯한 좌검 호법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설령 그렇다 해도 마음속에서 지우게. 대계가 바로 코앞일세.”

“평생 이리 살아온 나일세.”

좌검 호법은 매부리코 아래 도드라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것을 보며 우검 호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알았네. 마교 대공자를 주지.”

“역시 자네는 내 둘도 없는 벗이야.”

좌검 호법은 그때서야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대신 남해태양궁 소궁주는 자네에게 주지.”

좌검 호법은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남해태양궁 무인들의 뒷모습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궁주는 자네가 갖고?”

우검 호법은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좌검 호법을 슬며시 흘겨보았다.

“그게 그렇게 되나?”

“허허허.”

좌검 호법의 뻔뻔함에 우검 호법은 그냥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좌검 호법 역시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지만 이내 지웠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어.”

“뭐가 말인가?”

우검 호법이 좌검 호법의 차가워진 목소리에 웃음을 거두며 반문했다.

“귀림.”

싸늘한 좌검 호법의 목소리에 우검 호법의 표정 역시 잔뜩 굳어졌다.

“결국 본림의 대계가 그놈들에 의해 반쪽짜리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

“마음에 안 들어. 천하 양분이라니…….”

“그 마음 삭이게. 삭이고 또 삭여야만 진정한 검림 천하를 이룰 수 있으니까.”

온화하던 우검 호법의 눈빛도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시퍼런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 * *

폭죽이 터진 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산 능성을 타고 흑풍대와 설영대가 은밀히 북상하고 있었다.

조용히 앞만 바라보며 움직이고 있었지만 설린은 자꾸만 뒤쪽 폭죽이 터진 곳에 신경이 쓰였다.

‘어떻게?’

분명 조금 전 마현은 폭죽을 든 채 자신 옆에 서 있었다.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이 끝나고 채 몇 걸음을 내딛지 않았는데 수십 장이나 떨어진 곳에서 폭죽이 터졌다. 마현이 터트린 것은 분명한데, 제아무리 신법의 달인이라고 해도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었다.

헌데 마현은 아무렇지 않게 그 일을 해냈다.

잠시 생각해 보니 그가 며칠 동안 보여준 것들 모두가 상식적으로 가능한 것이 거의 없었다.

펑! 퍼엉!

그렇게 막 생각에 잠겼을 때 멀리서 또다시 폭죽이 솟아올랐다. 눈으로 대략 가늠해 봐도 처음 폭죽이 터진 자리에서 수십 장은 족히 떨어진 곳이다.

그 소리에 긴장하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불꽃을 쳐다보던 냉천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 냉천휘의 몸이 순간 석상처럼 굳어졌다.

냉천휘 앞, 아니 설영대 앞에 걸어가는 흑풍대 사이에 마현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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