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11화
설린 역시 피곤했기에 모닥불 주위에 잠자리를 마련했지만 야속함과 아련한 마음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저 간간히 잠든 마현의 얼굴을 보며 남몰래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렇게 설린은 잠자리를 뒤척이다가 자정을 훌쩍 넘겨서야 겨우 선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고단한 밤이 지나갔다.
짹 짹 짹―
날이 어스름하게 밝아오며 새벽이 왔다.
마현은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에 슬며시 눈을 떴다. 이른 새벽이라서 그런지 습기로 인해 공기가 눅눅했다. 마현은 눅눅함을 없애기 위해 꺼져가는 모닥불을 파이어 볼을 이용해 다시 살렸다.
화르륵!
거의 불씨만 남은 장작더미에서 다시 불이 활활 타올랐다.
타닥, 타다닥!
“으음!”
선잠에 들었던 설린이 몸을 뒤척이다가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눈을 떠 마현이 누워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아직 자고 있을 거라 여긴 마현과 눈이 마주치자 설린은 화들짝 놀라 얼른 돌아 누웠다.
아무리 무림의 여인이고, 북해의 빙화라지만 마현이 자신의 잠든 모습을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설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설린은 그녀답지 않게 허둥지둥 옷맵시를 다듬은 후에야 긴장하며 모닥불 쪽으로 몸을 돌릴 수 있었다.
다시 어색한 침묵 속에서 탁탁,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만이 들렸다.
설린은 다시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제 저녁과 달리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설린이 문득 침울해할 때 마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 소저. 아니 설 소궁주.”
마현의 낮고 진지한 목소리에 설린은 움찔하며 허리를 펴고 바르게 앉았다.
그리고 마현의 얼굴을 직시했다. 마현 역시 불쏘시개를 내려놓으며 설린을 바라봤다.
“혹…….”
“혹?”
“혹 본인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소?”
너무나도 직설적인 물음에 설린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마현에게서 받은 애꿎은 반지만 빙그르르 돌릴 뿐이었다.
“그…….”
“본인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소.”
어렵게, 정말 어렵게 설린이 입을 뗐지만 이내 마현의 목소리에 파묻혔다.
“교주 자리에 오르는 거 말씀인가요?”
설린의 물음에 마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설린은 마현의 얼굴에 깃든 씁쓸함 속에 묻어나오는 분노를 보았다.
“……아니면?”
“복…….”
마현은 입을 열려다가 금세 닫아버렸다.
굳이 설린에게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이다.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마현은 ‘그러지 말아주시오, 부탁이오’라는 준비해 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띠링 띠링 띠리리링!
공교롭게도 그때 알람 마법이 울린 것이다.
마현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저기 흩어져 자유롭게 잠을 자던 흑풍대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세를 일으켰다.
그들보다 반응이 늦었지만 침입자를 알리는 알람 마법의 경고음에 설영대 역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내력을 끌어올려 만반의 준비를 끝마쳤다.
마현은 서클 단전에서 마력을 끌어올리며 투시 마법을 펼쳤다. 그러자 마력이 마현의 눈으로 스며들었다.
울창한 나무가 주위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시야를 차단하고 있었지만 마현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 멀리 수풀을 헤치며 이곳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사람들로 만들어진 긴 띠가 보였다.
그 면면을 살펴보니 무림맹의 소속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자신들의 정확한 위치가 발각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무림맹의 정보력은 가히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현 일행은 산길조차 제대로 나지 않은 첩첩산중으로만 은밀히 움직였다.
그동안 부딪힌 인물 또한 없었다. 간혹 사냥꾼들의 모습이 먼발치에서 보였지만, 설마 그들에게서 정보를 얻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요?”
어느새 설린 역시 딱딱한 표정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시야가 빽빽한 수풀에 가려져 있기도 했지만 워낙 먼 거리에서 다가오고 있는지라 그녀는 무림맹 무사들을 보지 못한 것이다.
“무림맹이오.”
마현은 설린을 바라보며 말했지만, 그 대답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컸다.
“대오를 정비하라.”
마현의 명에 흑풍대는 조용히 이동하며 큰 원진을 만들었다. 그 원진은 설영대와 설린, 그리고 냉천휘를 보호하는 형태였다.
설영대는 그런 흑풍대의 모습에 그들 역시 흑풍대가 만든 큰 원진 안에 다시 작은 원진을 만들어 설린과 냉천휘를 둘러쌌다.
진형이 갖춰진 것을 확인하자 마현은 플라이 마법으로 하늘 위로 올라가며 순식간에 투명화 마법을 발현시켜 모습을 감췄다. 지상에서 대략 30여 장 높이로 올라가자 주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흠…….’
발 아래로 펼쳐진 광경에 마현은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삼켜야 했다. 무림맹 무사들은 자신들이 있는 산을 빼곡히 둘러싼 채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그 수는 어림잡아도 족히 천 명은 되어 보였다.
비록 그들이 아직은 자신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진 못한 듯 보였지만 토끼몰이 하듯 산을 통째로 둘러싸고 좁혀 오는 포위망을 피해갈 방법이란 없다. 그리고 그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 둘러싸인다면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허를 찔러야겠지.’
마현은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마현은 하늘에서 본 현재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설명을 듣자 북해빙궁 사람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함을 느낀 것이다.
일단 설명을 마친 마현은 흑풍대를 향해 나직하게 명을 내렸다.
“흑풍대는 모습을 감추라.”
마현의 명에 흑풍대는 일제히 마력을 명치 부근 구미혈에 박혀 있는 마정석에 주입했다. 마정석을 통과한 마력은 자연스레 흑풍대의 상반신에 수를 놓듯 빼곡하게 새겨진 마법진으로 스며들었다.
약간의 공명과 함께 흑풍대원들의 몸이 흐릿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점점 투명해지더니 잠시 후 그들의 몸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
워낙 급박한 상황인지라 설영대의 입에선 그 어떤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흑풍대의 등을 쳐다보던 그들의 눈은 놀람으로 가득했다.
설영대원 중 하나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조금 전까지 자신의 바로 앞, 흑풍대원이 서 있던 곳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에 뭔가가 걸렸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익숙한 흑풍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소.”
“헙!”
설영대원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터트렸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사(奇事)였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흑풍대원의 옷자락과 그의 등이 손끝에서 느껴졌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이들의 능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냉천휘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앞에 서 있는 마현을 보며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마현은 투명화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흑풍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어 설명은 생략하겠소.”
“……?”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본인의 기운이 느껴져도 거스르지 마시오.”
마현은 설린을 쳐다보았다.
북해빙궁의 대표가 설린이니 그녀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다. 잠시 고민하던 설린이 냉천휘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마현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뜬 마현은 서른 명의 북해빙궁 설영대와 설린, 냉천휘를 쳐다보았다.
도합 서른두 명.
마현은 그들에게도 흑풍대와 같은 투명화 마법을 펼칠 생각이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이들 전원에게 마력을 불어넣는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는 이득은 더욱 클 것이다.’
마현은 서클 단전에서 마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마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은 서서히 퍼져 어느새 설린, 냉천휘, 그리고 설영대를 감쌌다.
“어둠의 마나로 빛마저 왜곡시키리라, 트랜스패런시(Transparency)!”
마현의 몸 주변을 은은하게 감싸며 돌던 마력이 그 기이한 주문이 끝나자마자 설영대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이질적인 마력이 몸에 들어오자 설영대원들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남의 내력이 스며들어와 마음대로 몸 안을 휘저으니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표정을 지을 것이다.
우우웅!
얼마의 시간 후, 마현과 설영대원들의 몸이 공명을 일으켰다. 그러자 설영대원들의 몸 역시 조금 전 흑풍대처럼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헉!’
설영대원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들의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는 점점 형체가 사라지고 있는 자신의 손과 발, 그리고 몸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물이 증발하며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놀람으로 부릅떠진 그들의 눈에서 자신들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인지한 순간,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 어지럼증으로 인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설영대원들은 또다시 놀랐다.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사라졌던 동료들의 모습이 다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사라지기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투명한 파란색이라고 해야 하나?
마치 파란색 물감으로 허공에 그림을 그린 듯 자신과 동료들의 몸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던 흑풍대원들의 모습 역시 그렇게 투명한 파란색으로 보였다.
똑같은 과정이 다시 설린과 냉천휘에게 일어났고, 두 사람 역시 점차 사라져갔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서서히 사라지며 투명한 파란색으로 변해가는 마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설영대뿐만 아니라 설린과 냉천휘 역시 너무도 신기한 광경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심지어는 이곳저곳 만지기에 바빴다.
그때였다.
바스락.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수풀이 꺾이고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쉿!』
마현이 매직마우스로 주의를 주며 검지로 입술을 가렸다.
잠시 우왕좌왕하던 설영대 역시 그 목소리에 기세를 감추며 몸을 웅크렸다.
『이것이 유지되는 시간은 길어야 반 시진이오.』
마현의 말에 설영대원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몸을 내려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 동안 최대한 빨리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오.』
『알았어요.』
설린이 북해빙궁을 대표해 전음으로 대답했다.
『흑풍대주, 흑풍대가 길을 뚫어라.』
『명!』
설영대와 설린, 냉천휘를 둘러싸고 있던 흑풍대가 수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신형을 틀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들을 죄여오는 무림맹 무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 * *
“근데 정말 여기에 마교 놈들과 북해 얼음덩이들이 있는 건가?”
“무림맹에서 소화산(小華山) 일대에 대대적으로 천라지망을 펼치라 명을 내린 걸 보면 이 근처 어디에 있기는 하겠지.”
“하긴……. 그런데 이 일로 정마대전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정마대전뿐이라면 그나마 낫지. 이번엔 새외삼궁 중에 두 곳이 끼어들었으니 어찌될지…….”
“그러게 말이야. 남해태양궁을 보니 완전히 사생결단 낼 분위기더군.”
“그런데 정말 화산파에서 마공을 익혔을까?”
한나절 내내 계속된 수색 작전 때문에 지루함을 느낀 것인지, 무림맹 무인들은 두런두런 낮은 목소리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조용히 하지 못할까?”
그 잡담이 도가 지나쳤는지, 그들을 이끄는 수장이 나직하게 호통을 쳤다. 그러자 잡담을 나누던 사내들이 흠칫하며 입을 닫았다.
수장은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을 일일이 노려본 후 다시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깊은 산속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작은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공터를 보자마자 수장이 손을 살짝 들어 걸음을 멈추게 했다. 수장은 검 자루에 손을 얹으며 공터를 유심히 살폈다.
그런 그의 눈에 공터 곳곳에서 모닥불의 흔적이 보였다. 방금 전에 꺼졌는지 나무 타는 매캐한 냄새가 금세 코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