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34화 (134/351)

# 134

9화

“공조를 위해 기별을 준다고 했으니, 조만간 연락이 올 것 같습니다.”

“적양대(赤陽隊)는?”

“화산파 아래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열풍대와 적양대를 직접 이끌겠다.”

양곽원은 마현과 설린이 사라진 방향을 다시금 노려보았다.

“하지만 몸도 성치 않으신데…….”

발목을 다쳐 쩔뚝거리는 양곽원을 보며 열풍대주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양곽원은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부르짖었다.

“반드시! 마현의 목을 직접 베어야겠다! 그 피로 얼룩진 자리에서 설린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내 그녀의 몸을 취할 것이다!”

양곽원의 꽉 다문 턱선이 벌레가 지나가듯 꿈틀거렸다.

생각보다 무림맹 무인들의 사상자는 많았다.

생살이 불에 타며 생겨난 노린내와 함께 짙은 혈향이 이미 형체도 없이 박살이 난 별채 주변을 숨 막히게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현과 흑풍대를 경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림맹 수뇌부는 현재의 전력만으로도 충분히 마현을 비롯한 마교와 북해빙궁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육대세가는 모르지만 오파일방은 이번 일을 예상하고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했었다.

근 열 배에 달하는 무인들의 압도적인 숫자로 단숨에 제압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오판이었다.

마현의 무위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골강시의 존재는 무림맹 수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골강시로 허를 찌르며 마현과 흑풍대, 그리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 북해빙궁이 화산파에서 탈주했다.

담기량은 허담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서 걸음을 옮겨 마현이 탈주한 검은 길을 거쳐, 오도평과 시녀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일그러진 눈으로 오도평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금마공을 익힌 본문 제자. 그리고 그 금마공을 준 장로 허담.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다.

“맹주.”

청허자였다.

“상심이 크겠지만 본맹과 화산파에 큰 치욕을 준 마교와 북해빙궁을 이대로 놔둘 참입니까?”

청허자의 말에 담기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차갑게 빛냈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상념들도 모두 지웠다.

오도평은 금마공을 익히지 않았다. 그것은 마교의 간악한 술책이다.

그 술책에 화산파의 한 기둥이었던 허담이 억울하게 자결했다.

그로 인해 치욕을 받았다. 화산파도, 무림맹도…….

담기량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망설임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껏 침통함에 젖어 있던 담기량의 기세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는 냉혹하리만큼 차가운 눈동자로 육대세가의 가주들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시간부로 특급추살령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무림맹 차원의 천라지망을 명하오! 더불어 마교로 통하는 모든 길목에 특급경계령을 내리겠소. 만일 본 맹주의 명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반역자로 처단할 것이오!”

담기량은 맹주를 상징하는 만년온옥으로 만들어진 옥패를 꺼내 들었다. 바로 정천패(正天牌)였다.

맹주를 상징하는 옥패, 정천패가 가진 의미는 컸다.

현 무림맹의 체계상 제아무리 맹주라고 해도 일방적인 명을 내릴 수 없다.

맹주 자리는 일종의 조율자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정천패를 공식적으로 드러낸 후 내린 명은 다르다.

이유 불문, 무조건 따라야 한다.

그렇다고 그런 권한을 임기 내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천패를 사용함으로써 맹주에게 돌아가는 불이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정천패를 사용한 이후 맹주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제약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맹주직을 단지 조율하는 자리 정도로만 보면 오판이다.

현재 무림맹을 이루는 핵심 세력은 육대세가와 오파일방이다.

당연히 육대세가는 그들끼리 주로 뜻을 맞춰왔고, 오파일방 역시 매한가지다.

결국 무림맹을 이끌어 가는데 있어 서로의 이해관계가 달랐던 양측은 늘 대립하며 팽팽하게 맞서왔다. 그때 맹주의 권한이 힘을 발휘한다.

아무리 조율적인 의미가 크다고는 하지만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을 정도로 대립이 심할 경우에는 당연히 맹주의 의견에 힘이 실리기 마련이다.

정천패를 보자 육대세가의 가주들은 하나같이 침을 삼키며 눈을 빛냈다.

암묵적인 합의 때문이었다.

그동안 어느 한쪽으로 힘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자, 맹주는 오파일방과 육대세가가 한 번씩 돌아가면서 맡았다. 그런데 담기량이 정천패를 사용한 후 물러난다면 그 균형이 깨진다.

담기량이 사 년 임기의 맹주직을 수행한 지 아직 일 년이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육대세가가 다시 맹주직을 맡게 되는 것이다.

육대세가 가주들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마다할 리 없었다. 그들이 반색하는 것과 달리 오파일방 장문인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저 쓴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그런 오파일방 장문인들의 뇌리에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마현의 모습이 맺혀졌다. 그러자 은은한 살기가 눈동자에서 일렁였다.

빠드득.

누군가의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문인들과 가주들께서는 천라지망을 위한 동원령을 내려주시오. 마교로 향하는 길목을 모두 막아야 할 것이니 특히 청성파와 사천당문, 그리고 개방은 다른 곳보다 큰 힘을 보태주셨으면 하오.”

담기량은 청허자, 당자성, 그리고 불취개를 향해 명했다.

마현을 잡기 위해서는 다른 곳보다 이 세 곳의 역할이 더욱 막중한 까닭이다. 거론된 세 사람 역시 그 뜻을 알았기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독 장로.”

담기량은 주위를 살피다 화산파의 무각인 중향각(重香閣)을 책임지고 있는 독소명 장로를 불렀다.

“예, 맹주.”

“일단 섬서성부터 천라지망을 펼칠 것이니, 당장 화산파 삼대제자 이상 전원을 집결시키고, 그리고 섬서성 내 속가제자들이 있는 무가들과 표국 등에도 모두 동참하라 명을 내려주시게.”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전서구를 날리겠습니다.”

“곡 장문인.”

담기량은 끝으로 곡상천을 불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내 그럴 줄 알고 미리 종남파에 기별을 넣어놨소.”

담기량은 곡상천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몸을 돌려 양곽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그 앞으로 걸어갔다.

“양 소궁주는 어쩔 생각이신가?”

“저 역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양곽원의 눈이 가늘어지며 싸늘하게 빛났다.

“여기 있는 열풍대 외에도 화산파 아래 적양대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화산파와 종남파, 그리고 남해태양궁이라면 아무리 마교와 북해빙궁이라 해도 섬서성 내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양곽원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림에 대해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고맙네. 내 양 소궁주의 배려는 잊지 않겠네.”

담기량의 말에 양곽원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 * *

오전에 있는 마교 대전회의를 끝내고 마주전을 나서며 사공소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허진이 그런 사공소 곁으로 다가와 안색을 살피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야, 그냥 요즘 좀 피곤해서 그런 것뿐이네.”

사공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나이도 있으니 노환이 오는 거겠지. 허허.”

사공소는 싱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가 당주에게 말해 몸에 좋은 보약이라도 한 첩 올리라 하겠습니다.”

“됐네. 안 그래도 요즘 매일 율 군사가 생맥산차를 올린다네. 그거 마시는 것만으로도 족해.”

산맥산차 특유의 쓴맛이 떠올랐는지 사공소는 입을 쩝쩝 다시며 다시금 눈가를 찌푸렸다.

“하지만 교주님, 교주님이 본교의 중심…….”

“그 소리도 매일 율 군사를 통해 지겹게 듣고 있네.”

사공소는 손을 휙휙 저으며 그만하라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허진은 물러나지 않았다.

“며칠 내로 가 당주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부교주.”

“예, 교주님.”

“본좌를 그리도 못살게 굴고 싶은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공소는 허진의 입가에서 담담하게 번지는 미소가 왠지 못마땅했다.

“에잉, 쯧쯧쯧.”

그가 마땅찮은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오늘인가? 무림맹 무림대회 본선이?”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째 조용하군.”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허진의 물음에 사공소는 고개를 돌렸다.

“뭐긴, 자네가 그리도 예뻐하는 대공자 말이야.”

“아!”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려올 법도 한데 말이야…….”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젓는 사공소의 얼굴은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둘의 대화를 제법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두 명의 인물이 있었다. 바로 군사 율기와 삼공자 도종극이었다.

『어찌 되어 가나?』

도종극은 귀기가 어린 섬뜩한 눈빛으로 사공소와 허진의 등을 쳐다보며 전음으로 물었다. 율기는 차갑게 웃으며 역시 전음으로 답했다.

『마현은 살아서 신강의 붉은 흙을 밟지 못할 것입니다.』

『하긴 군사라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일을 진행하겠지.』

도종극은 율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공소와 허진에게서 눈을 뗐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겠지, 군사?』

『그래서 남해태양궁을 조금 흔들어 놓았습니다. 굳이 본림에서 손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율기의 말에 도종극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짐시 후 사공소와 허진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도종극은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애욕에 눈이 먼 사내는 어리석음을 알면서도 행하지.”

도종극은 유독 승부욕이 강한 양곽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설린을 좋아함도, 그럼으로써 마현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음도 익히 율기를 통해 들은 후였다.

“그렇다면 일을 완벽히 마무리하는 게 좋겠군.”

“그래서 북해빙궁도 조금 흔들어 놓을까 생각중입니다.”

율기의 말에 도종극이 씨익 웃었다.

“생각보다 판이 커지겠군.”

“판이 커지고 혼란스러울수록 본림에게는 득이 되면 되었지 실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림주.”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도록 하라.”

“그리하겠습니다, 소림주.”

도종극은 몸을 반쯤 틀다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나저나 스승님도 대단하셔. 남만야수궁을 묶어두기 위해 운남성주마저 움직이게 만들다니 말이야.”

조용히 중얼거리는 도종극을 바라보는 율기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남해태양궁은 이미 검림(劍林)과 손을 잡았소, 소림주. 천하는 당신네 귀림(鬼林)의 것만이 아니라오.’

“보는 눈들도 있으니 중요한 일은 따로 찾아와 고하라.”

도종극의 목소리가 율기의 상념을 깨트렸다.

율기와 헤어진 도종극은 몇 걸음 채 걷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사공찬이 도종극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입니까, 사형?”

“요즘 코빼기도 안 보여 꼬리를 만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공찬의 비웃음에 도종극 역시 비웃음으로 상대했다.

“그것 참 다행이로군.”

“요즘 듣자하니 죽으라고 수련에 힘쓰신다고요?”

두 사람의 말투는 상당히 꼬여 있었다.

“본교의 절대 원칙, 강자가 군림한다. 나는 군림하고 싶어서 말이야.”

“호오, 그러십니까?”

도종극이 입꼬리를 말며 사악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의 일그러진 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사공찬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나는 누구처럼 깨갱하며 꼬리를 말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사공찬은 그답지 않게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그 빈정거림에 도종극의 표정 역시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형 말씀을 들으니 꼭 저와 한판 벌이고 싶다는 뜻으로 비춰지는군요.”

“그렇게 들렸나?”

“그리 들리는군요.”

도종극의 말에 사공찬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리 들었다면 제대로 들은 것이지.”

사공찬은 턱을 빳빳하게 세우고 눈만 아래로 지그시 내려뜨며 도종극을 빤히 보았다.

그 오만한 모습에 도종극은 눈가를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대공자가 먼저 아니던가요?”

“맛있는 건 나중에 먹고 싶은 법이지.”

도종극은 그런 사공찬을 보며 히죽 웃었다.

“발정 난 암캐처럼 그리 짖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종극의 눈에서 음산한 귀기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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