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8화
마현은 차가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검을 들고 달려오는 곡상천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현과 눈이 마주친 곡상천은 몸을 한껏 낮추며 마현의 다리를 검으로 베어 들어왔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마현은 몸을 위로 띄웠다. 곡상천의 검이 발 아래로 지나갈 때 마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후우우웅!
등 뒤로 몰려오는 매서운 기운을 느낀 것이었다.
마현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몸 주위로 실드를 쳤다. 하지만 급조하다시피 시현한 실드는 견고하지 못하고 엉성했다.
콰광!
강기에 직격당한 실드가 산산이 부서졌고, 온전히 막지 못한 충격이 마현의 등을 파고들었다.
“큭!”
마현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튕겨지듯 앞으로 날아간 마현은 애써 신형을 틀어 균형을 잡으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하지만 또 다른 공세가 정신없이 몰아쳐오고 있었다.
땅을 스치듯 날아온 장풍이 마현이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위로 솟구치며 마현의 턱을 노렸다. 개방 방주 불취개의 강룡십팔장(强龍十八掌)이었다.
마현은 마라환영보를 밟으며 강룡십팔장으로 만들어진 장풍을 간신히 피한 후 블링크를 이용해 좌측으로 반 장쯤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후우우웅!
마현의 가슴으로 권강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소림사 방장 혜공대사의 백보신권(百步神拳)이었다.
마현은 다시 두 팔을 들어올려 두 개의 암 바클러를 만들어 가슴을 보호했다.
콰과광!
하지만 암 바클러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부서졌다. 암 바클러를 부순 권강은 여지없이 마현의 가슴을 강타했다.
“컥!”
마현은 그 충격에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충격에 휘청거리는 신형을 애써 바로잡을 때 입가에서 가느다란 피가 흘러내렸다. 마현은 표정을 더욱 딱딱하게 굳히며 소매로 피를 닦았다.
그런 마현 주위로 다섯 명의 인물이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바로 오파일방의 장문인들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육대세가의 가주들이 그들과 함께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육대세가의 가주들은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당장 공세를 취해 오진 않았지만 눈치를 보건대 어쨌든 무림맹이라는 한 울타리에 있었기에 곧 동참하려는 듯 보였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우선 화산파를 벗어나야 한다.’
마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빛냈다. 지금은 적들의 거센 공세를 막아낼 길이 보이지 않았다.
무인들의 수에서도 압도적인 차이가 났지만 그보다 심각한 것은 이곳이 적지 한복판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각 문파 장문인 한 명씩과 차례로 싸우는 거라면 또 모르지만 그들 다섯의 합공은 마현으로서도 어찌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무당파의 장문인 청하진인이 다른 이들과는 달리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 허담의 시신을 거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우선은 화산파를 벗어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뒷일은 이 위기를 벗어난 다음 생각하면 될 것이다.
“무림맹과 화산파를 능멸했으니 오늘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마라!”
청허자가 마현을 향해 다시 검을 들었다. 그는 마현을 공격하는 이들 중 담기량과 더불어 줄곧 가장 악독한 수를 썼다.
‘조금의 틈만 있으면 된다!’
마현은 일단 실드를 주위에 쳐 청허자의 검을 막았다.
캉!
실드와 청허자의 검 사이에 붉은 불꽃이 튀었다. 그 충격으로 단전이 약간 울렁거렸지만 마현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필드 쇼크!”
서클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은 마현의 발을 타고 땅으로 스며들었다.
쿠르르 콰드드득 콰득!
마현이 발을 내디딘 곳을 중심으로 땅거죽이 파도를 치듯 들썩거리며 사방에서 요동쳤다.
“큭!”
뜻하지 않은 진동에 장문인들은 짧은 신음을 삼키며 재빨리 신형을 바로잡았다.
그 찰나의 시간, 마현이 기다렸던 약간의 틈이 생겼다.
“블링크!”
마현의 신형은 땅속으로 푹 꺼진 듯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뒤늦게 혜공대사의 주먹이 날아들었지만 이미 마현의 모습은 그 자리에 없었다. 마현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수적 열세에 몰려 있는 흑풍대와 설영대 위였다.
흑풍대와 설영대는 선전하고 있었지만 수백 명의 적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 길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앙다문 마현의 입술이 윗니에 짓이겨졌다.
“흑풍대는 온전한 힘을 개방하라!”
마현은 마교를 떠난 후 흑풍대가 가진 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스켈레톤 소환을 잠시 금지시켰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세인들의 눈을 의식할 여유가 없을 만큼 급박했다.
마현의 목소리가 마력을 타고 흑풍대에게 전해졌다.
그 명에 흑풍대의 기운이 달라졌다. 한순간 흑풍대에게서 검은 마기가 뿜어져 나와 사방을 에워쌌다. 그 가공할 마기를 함께 싸워나가고 있는 북해빙궁이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흑풍대의 온전한 힘의 개방?’
설린의 눈초리가 살짝 가늘어졌다.
흑풍대가 강한 것은 알겠지만 마현의 무위와 비교하면 약하다고 느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싸움에서 흑풍대가 보여준 것은 내공보다는 외공을 위주로 한 무력이었다. 또한 대주를 위시한 전체적인 무력 역시 설영대보다 한참이나 떨어졌다.
마교 대공자의 무력단체라고 하기엔 상당히 빈약한 그 전력을 보고 설린은 내내 의아스럽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설영대주, 설영대를 뒤로 물려주시오.”
왕귀진의 말에 설영대주 역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설영대를 흑풍대 뒤로 물렸다.
“우어어어어!”
그와 동시에 몸을 웅크렸던 흑풍대원들이 일제히 한 걸음 내딛으며 함성을 질렀다. 그러자 흑풍대 주위에 떠돌던 마기가 흡사 벽력탄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 검은 마기들은 바싹 마른땅에 촉촉한 단비처럼 스며들었다.
푹!
확연히 달라진 기세에 주춤하는 사이, 흙더미가 뒤집어지는 소리가 흑풍대와 설영대를 둘러싼 무림맹 무인들의 중앙에서 터졌다.
“으아악!”
이어서 비명이 터졌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혈전의 서막을 알리는 전주곡처럼, 처절한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푹 푹 푹!
“크아악!”
“으아아악!”
고막을 날카로운 칼로 후벼 파듯 듣기에도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무림맹 무인들이 워낙 흑풍대와 설영대를 겹겹이 싸고 있어 비명이 터져 나온 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좀처럼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답답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지금 무림맹 무인들은 하나같이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 적은 자신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비명은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발적으로 시작된 비명소리가 점차 커지며 사방에서 들려오자 무림맹 무인들의 얼굴에 깃든 황당함은 이내 공포로 변해 갔다.
흑풍대 뒤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한 설영대원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하얀색 물체가 언뜻 어른거렸다.
“저, 저…….”
설영대원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어느 한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설영대의 시선이 그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설린과 냉천휘 역시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둘의 눈 역시 그 설영대원 못지않게 놀람으로 가득 찼다.
“해, 해골…….”
“이, 이런 괴사가 있나?”
설린과 냉천휘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마현을 올려다보았다. 하긴 제아무리 허공답보라고 해도 마치 평지에 서 있는 것처럼 안정된 자세로 떠 있는 것 자체가 괴사라면 괴사였다.
그걸 감안한다면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고 여길 법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장내에 보이는 건 살도, 근육도 없이 단지 뼈로만 이루어진 해골들이었다. 게다가 뼈로 이루어진 각종 병기들을 들고 무림맹 무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충격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요물들!”
무림맹 무인 하나가 동료의 등을 베어가는 스켈레톤을 일검에 잘랐다.
빠각!
스켈레톤은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하지만 무인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채 짓기도 전이었다. 허물어졌던 스켈레톤의 뼈가 마치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한곳으로 모이더니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끼끼끼끼끼!
스켈레톤은 흉흉한 귀성을 터트리며 자신을 벤 무림맹 무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터벅터벅 걸어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스켈레톤의 뻥 뚫린 동공에서 흉광이 번뜩였고 달그락거리던 턱 뼈가 쫙 벌어졌다.
-꺄아아아악!
귀성이 높아질수록 동공에서 번뜩이는 흉광 역시 더 음산해지고 짙어졌다. 스켈레톤은 가차 없이 골검을 번쩍 들어 무림맹 무인의 목을 베어 버렸다.
서걱!
피가 뿌려지고 무림맹 무인의 수급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목이 잘린 몸은 고목나무 쓰러지듯 옆으로 넘어갔다. 그런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죽지도 않는 해골 무리들.
그것을 바라보는 북해빙궁은 기가 질렸고, 무림맹 무인들은 공포에 허옇게 찌들어갔다.
설린은 이내 그 비밀을 알아차렸다.
스켈레톤의 몸이 한 번 부서질 때마다 흑풍대원 중 누군가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본 것이다.
“가, 강시?”
청허자가 몸을 부르르 떨며 절규했다.
“마, 마교가 다시 강시를 부활시켰구나!”
담기량의 반응 역시 청허자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죽여야 하오, 반드시!”
담기량은 검을 잡은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강시를 본 이상 계속 상황을 주시하며 몇 걸음 물러나 있던 육대세가의 가주들 역시 이제는 더 방관할 수 없게 되었다.
“육대세가의 제자들은 검을 들어라!”
제갈묘의 명에 그저 후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육대세가의 무인들이 스켈레톤을 향해 달려들었다.
“강시를 상대하지 말고 흑풍대를 향해 검을 겨누라!”
제갈묘는 잠시 상황을 지켜보다 흑풍대가 골강시, 스켈레톤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다시 명을 내렸다.
몇 걸음 물러나 있던 육대세가 무인들까지 모두 합세하자 조금씩이지만 스켈레톤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또한 부서지는 횟수도 잦아졌다.
마현은 이대로는 길을 뚫을 수 없다고 판단하자 지체 없이 흑풍대 앞으로 내려왔다.
크게 숨을 들이쉬며 서클 단전에서 모든 내력을 끌어올렸다.
마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기가 회오리치며 몸을 휘감았다. 그 짙은 흑무 속에서 생소한 룬어가 흘러나왔다.
“파괴의 힘을 마나에 담아 지옥의 겁화를 땅거죽 위에 씌우리라, 시트 오브 플레임즈(Sheet of flames)!”
마현의 서클 단전에서 삼분지 일에 가까운 마력이 쭉 빠져나갔다.
양손을 모은 마현 앞으로 뜨거운 열풍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열풍은 화염을 불러왔다.
화르르륵!
마현 앞으로 한 가닥 불길이 만들어졌다.
“부, 불이야!”
“불이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마현의 몸을 둘러싼 흑무가 양손을 타고 불길로 전해지자 불길은 맹렬하게 치솟으며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해 버렸다.
“사, 사람 살려!”
“뜨거워! 으아아악!”
불은 폭풍이 몰고 온 거센 파도처럼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또한 땅마저 삼키려는 듯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활활 타올랐다.
그 불바다 속에서 온전한 것은 오직 죽지 않는 스켈레톤뿐이었다.
마현이 한데 모으고 있던 양손을 옆으로 쫘악 벌렸다.
화르르르―
그러자 불바다가 갈라졌다.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난다!”
마현이 몸을 날렸다.
그 뒤를 따라 흑풍대 역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뜨거운 열기에 익숙하지 않은 북해빙궁 무인들이 내력으로 몸을 보호하며 갈라진 불길 사이로 뛰어들었다.
* * *
담벼락이 허물어지고 그 사이에 길게 난 검은 길을 한 사내가 노려보고 있었다.
원래 길도 아니었다. 또한 검은색도 아니었다.
길은 새로 만들어진 것이고, 검은색은 그을림이 덧칠해지며 생긴 것이다.
불길에 의해 만들어진, 아니 한 마리의 코끼리가 밀림을 헤치고 강제로 길을 만든 것처럼 뚫린 흔적 앞에서 사내, 양곽원이 시퍼런 안광을 갈무리한 채 입술을 자근자근 씹어대고 있었다.
양곽원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주.”
“예, 소궁주.”
창백한 얼굴을 한 열풍대주가 양곽원 앞으로 걸어왔다. 어딘가 모르게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마현에 의해서 잘린 왼팔 때문이었다.
“분명 림(林)에서 마현을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나?”
“화산파 안인지라 그들이 움직이기에는 힘이 들었을 겁니다. 아마 조만간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리라 판단됩니다.”
그 정도는 양곽원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자신의 눈앞에서 마현이 설린과 함께 사라지자 질투심과 분노를 참지 못해 물은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