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29화 (129/351)

# 129

4화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괜찮아. 나는 걱정하지 말고 서둘러 가라.”

마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떠날 것을 재촉했다.

야율황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며 야율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자, 선아.”

“알았어.”

갑작스럽게 야율황기와 야율선이 자리를 뜨자 한동안 방 안은 적막감이 흘렀다.

* * *

신시(申時; 오후 3~5시)가 되자 육대세가 가주들이 모여 화산파 장문인실로 향했다.

“오파일방 장문인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외다, 하하하하.”

하북팽가의 가주 팽희수가 칼칼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화산파 제자가 정말 마교 대공자의 말대로 금마공을 익혔을 거라 다들 생각하시오?”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기가 의문을 표했다.

“했으면 어떠하고 안 했으면 어떻소? 문제는 지금 그 아이가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지, 안 그렇소?”

팽희수가 무슨 시시콜콜한 질문을 하냐며 슬쩍 핀잔을 주었다.

“이 당 모는 마교 대공자의 이야기에 무게를 두었으면 하오.”

당자성이었다.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고, 모르시는 분은 모르시겠지만…… 제 막내 여식 생일잔치가 얼마 전에 있었소이다.”

모용기가 당자성의 말에 의문을 표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막내 여식의 생일과 마교 대공자는 그만큼 연관성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용세가와 사천당문은 지리적으로 중원의 양 끝단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서로의 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의 생일잔치에 마교 대공자가 귀빈으로 참석을 했었소이다.”

그 말에 모용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구려.”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묘가 아는 척을 했다.

“우연히 막내 여식과 말 그대로 옷깃이 스친 정도의 인연이 있어 그날 참석했었소. 그때 본 이 당 모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는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외다.”

당자성의 말에 제갈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당파 태극검룡을 생각한다면 그 말씀에 힘이 실리는구려.”

제갈묘는 좌중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그리 말한 연유를 설명했다.

“무림대회가 있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들 자제들에게 이야기를 들어 아실 것이외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교 대공자와 무당파의 태극검룡이 친우라니요. 이 남궁 모 역시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허허허. 정말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백공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제 가아(家兒)의 말에 의하면 어지간히 마음을 나눈 사이가 아니라고 하더이다.”

당자성은 당화평을 통해 들은 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이야기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당자성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듣자하니 어릴 적 함께 자란 사이라 하더이다. 고아로 함께 자라 서로를 가족처럼, 형제처럼 의지하며 살았다고 들었소이다.”

“확실히 그런 사이라면 이번 무림대회에서 처음 선을 보일 친우의 화려한 등장을 마교의 대공자가 일부러 깨트릴 이유도 없겠지요. 당 가주의 말씀을 들으니 확실히 이 제갈 모 역시 마교 대공자의 말 쪽에 무게가 실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사이이기에 마교의 음모 또한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할 것이라 생각하오.”

결국 이야기는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일단 화산파 제자를 심문하면 뭔가 단서라도 나오겠지요.”

제갈묘는 발걸음을 멈추고 오대세가 가주들의 눈을 차례로 바라본 후 힘주어 말했다.

“문제는! 이 기회를 잡아 맹의 주도권을 넘겨받아야 한다는 것이외다!”

제갈묘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담기량의 장문인실 앞에 도착했다.

“일단 우리는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오파일방 장문인들 얼굴이나 즐깁시다.”

나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들 장문인실로 우르르 들어갔다.

예상한 바대로 오파일방 장문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육대세가 가주들이 장문인실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눈인사만 오갈 뿐 누구 한 사람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맹주, 어떻게 하기로 결정하셨소이까?”

걸걸한 성격의 팽희수가 결국 무거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빈도는 본파 제자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의례적인 대답이었지만 팽희수의 어투는 뭔가 살짝 꼬인 느낌을 주었다.

“팽 가주.”

그러자 곡상천이 발끈했다.

“왜 부르시오?”

오히려 그런 곡상천의 반응을 즐기는 듯 팽희수는 왜 그러느냐는 의아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팽희수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크흠!”

곡상천은 분기로 속이 들끓었지만 더 말해봐야 꼬투리를 잡으려 한다는 잡음이 들릴까봐 참아야 했다. 그는 그저 불쾌감만 내비치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맹주께서 자파 제자가 분명 금마공을 안 익혔다고 했으니…… 믿어도 되겠소이까?”

제갈묘가 담기량을 빤히 쳐다보며 짓궂게 물었다.

그에 질세라 청허자가 제갈묘의 말을 비꼬아서 되받아쳤다.

“제갈 가주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제갈 가주께서는 맹의 사람인지, 마교의 사람인지 참으로 헷갈리게 만드시는구려.”

“이 제갈 모가 무림맹의 사람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제갈묘는 청허자를 빤히 쳐다보며 하얀 이를 내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래서 이 빈도의 귀가 혹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 물어본 것이오.”

청허자 역시 그런 제갈묘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짐짓 웃음을 보였다.

“맹주와 청성파 장문인께서 그리 말씀을 하시니 이 제갈 모의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하하핫!”

제갈묘는 한껏 과장되게 웃은 뒤 다시 말했다.

“하지만! 만일 우려한 일이 사실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도 응당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나직했지만 분명 경고였다.

“크흠!”

“커험!”

“아미타불!”

오파일방 장문인들이 저마다 기분 나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낸 반면 육대세가 가주들은 편한 모습으로 의자등받이에 기대는 모습들이었다. 사실 육대세가 가주들로서는 급할 것이 없었다.

그저 앉아서 굿이나 보다가 떡에 묻은 콩고물이 떨어지면 주워 먹으면 그만인 것이다. 제아무리 오파일방과 대립각을 세우고 알력이 끊이지 않는다지만 일부러 떡에서 콩고물을 흘리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정파인이니까.

그렇기에 그냥 진흙땅에 한 발만 살짝 걸친 채 제삼자처럼 구경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색하고 무겁기만 한 장문인실의 분위기에 모두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마침 문이 열렸다.

“맹주님, 저녁식사는 어찌할까요?”

허담이 안으로 들어서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담기량에게 물었다.

“따로 나가기도 그러니 여기로 가져오시게.”

“알겠습니다.”

“오늘은 밤이 길듯하니 식사를 미리 준비하라 일러두었소이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조금 의외였다. 하지만 담기량의 말대로 오도평의 심문을 앞둔 오늘은 밤이 길어질 것이 분명했다. 잠시 후 장문인실에는 조촐한 식사가 차려졌다.

* * *

아무것도 모르는 시녀가 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 오도평을 찾아갔다.

내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양측에서 음식물 반입을 두고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흑풍대에선 부대주 철용이, 화산파에선 한 제자가 함께 오도평이 머무는 방에 시녀와 함께 들어갔다.

시녀는 아무 말 없이 오도평에게 쟁반을 건넨 후 다시 철용과 화산파 제자와 함께 방을 나왔다.

그리고 한식경쯤 흘렀을까?

조용하던 별채 안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밖으로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그 비명은 별채의 고요를 뒤흔들며 팽팽하던 앞뜰의 대치를 순식간에 깨트렸다.

그 비명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흑풍대의 왕귀진과 화산파 매화검수의 수좌였다.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몸을 띄워 별채 문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둘이 좁은 문 앞에 마주하자 은은하게 피어오르던 적대감이 살기로 바뀌었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살기를 내뿜었지만 작금의 상황이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상대의 눈을 노려보며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들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시큼한 냄새였다.

‘독?’

왕귀진은 오도평의 상태를 확인함과 동시에 어지러움을 살짝 느꼈다.

재빨리 마력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며 방 안을 살폈다. 내내 불안해했던 상황이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방 안에 멀쩡히 있어야 할 오도평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입 주위에는 그가 먹었을 음식들이 거품에 휩싸인 채 질펀하게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위 속에 든 음식을 토해 놓은 색깔이 아니었다.

검은 빛이 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독이 섞여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미 오도평의 얼굴과 드러난 맨살은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왕귀진은 재빨리 다가가 오도평의 목 위로 손을 얹어 맥을 살폈다.

맥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독에 의해 절명한 것이 틀림없었다.

챙!

그때였다.

화산파 매화검수의 수좌가 검을 뽑으며 분노의 일갈을 터트렸다.

“혈음마독! 흥,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독의 성분을 한눈에 알아본 매화검수의 수좌가 매서운 살기를 왕귀진을 향해 내뿜었다.

“본색? 금마공을 익힌 증거를 없애기 위해 살인멸구를 해놓고, 결국 본교를 음해하려고 하는구나!”

왕귀진 역시 마기를 터트리며 검을 뽑아들었다.

“음해? 혈음마독을 써놓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구린 짓은 정파가 더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구나!”

“뭣이?”

쐐애애액!

매화검수 수좌의 검이 낙뢰처럼 허공을 갈랐다. 왕귀진 역시 그에 지지 않고 검을 들었다.

카강!

두 검이 허공에서 서로 얽혔다.

그리고 그 검들은 떨어지지 않았다. 왕귀진과 매화검수의 수좌는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며 살기 어린 눈빛을 주고받았다.

“무슨 일이오, 대주?”

그때 방 안으로 철용이 급히 들어왔다.

“죽었다.”

왕귀진은 여전히 앞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철용은 왕귀진의 말을 듣고 죽은 오도평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독?”

그 역시 오도평의 피부와 그가 토해낸 음식물을 보며 독살당한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철용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움직이며 주위를 살폈다.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철용의 눈이 번쩍 떠졌다.

“시녀! 시녀를 찾아야 해.”

철용이 방문을 박차고 나서며 마당에 도열한 대원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 오도평의 식사를 가져온 시녀를 찾아라! 어서!”

매화검수의 수좌는 철용의 말을 듣고 거세게 왕귀진을 밀었다. 잠시 거리가 벌어지자 그가 왕귀진을 매섭게 노려본 후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오도평이 마교의 놈들에게 독살되었다. 이 사실을 장문인에게 알리고 너희들도 시녀를 찾아라! 마교 놈들이 증거를 지우기 전에 서둘러라! 한시가 급하다!”

화산파 제자들이 그 즉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주군, 주군.”

흑풍대원 하나가 문을 벌컥 열며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마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냐?”

“화산파 제자 오도평이 조금 전 독살을 당했습니다.”

“독살?”

마현의 음성이 조금 높아졌다.

옆에 앉아 있던 설린과 냉천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현을 바라봤다.

눈을 가늘게 뜬 마현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지금 대주와 부대주는 무얼 하고 있나?”

“대주께서는 별채에서 오도평의 시신을 지키고 있으며, 부대주께서는 오도평에게 식사를 건넨 시녀를 찾고 계십니다.”

“화산파는?”

“지금 화산파는 오도평의 독살이 본교의 소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이유는?”

“오도평의 독살에 사용된 독이 본교의 혈음마독임을 증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가늘어진 마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설마 독으로 제거를 할 줄이야.”

냉천휘는 쇠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정파의 기치를 내세우는 무림맹에서 그런 치졸한 방법까지 쓸 줄은 몰랐네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설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설린의 시선에 마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어떻게 할 것 같소?”

“……?”

당황하거나, 아니면 이 난해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고민해야 할 모습이 마현에게서 보이지 않으니 설린과 냉천휘는 조금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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