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3화
“경청하지요.”
“화산파 제자…….”
“오도평이라 하더이다.”
사실 담기량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비무대에 오른 제자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장문인실로 오기 전 장로 허담에게 그의 이름이 오도평임을 그때서야 보고받았다.
제자를 온전히 신뢰할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담기량은 허 장로에게 그 즉시 오도평의 최근 근황에 대해서 모두 알아오라 시켰다.
“아, 그 오도평 역시 죄인 아닌 죄인이긴 하나…… 식사는 해야 하지 않겠소?”
“식사?”
“그렇지요. 조금 이른 시간이 되겠지만 심문을 위해 조금 일찍 식사를 넣어도 무방하리라 보오.”
“호오!”
“아미타불!”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곡상천이 생각하고 떠올린 대략적인 그림을 본 것이다.
“그 식사를 누가 가지고 들어가겠소? 마교? 절대 그들이 가지고 들어갈 수 없소. 그렇다면 결국 무림맹 사람들 중 한 명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소이까.”
“하지만 절대로 불가하다 하면…….”
“우겨서라도 들어가야겠지요, 우겨서라도!”
“흠…….”
지금으로선 그 방법밖에 없는 듯했다.
“장문인.”
그때 밖에서 담기량을 부르는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게.”
담기량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흰머리가 군데군데 보이는 장년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장로 허담이었다.
“허 장로, 알아보았는가?”
허담이 가까이 다가오자 담기량이 고개를 살짝 들어 물었다. 다른 장문인들의 시선 또한 모두 허담에게로 모여들었다.
한데 무슨 일인지 허담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난색을 표했다. 그의 표정은 장문인실에 들어올 때부터 좋지 않았다.
“그래, 오도평의 스승은 누군가?”
여전히 머뭇거리는 그를 보며 결국 담기량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스승을 두지 못한 문하생입니다, 장문인.”
“스승을 두지 못했다?”
담기량은 그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가 어찌 일대제자로 오를 수 있었던 겐가?”
“5년 전만 해도 그자는 입문 10여 년이 지났지만 겨우 삼대제자에 승격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워낙 무도에 재능이 없는지라 어느 누구도 제자로 거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자가 단 5년 만에 일대제자로 승격했다?”
담기량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분명 뭐가 있었다.
10여 년 동안 수련을 하고도 겨우 삼대제자에 오른 자가 갑자기 일대제자가 되었으니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타고난 무골에, 피나는 수련을 하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담기량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의혹을 다른 장문인들 역시 가졌는지 표정들이 다들 어두워졌다.
“다만 5년 전부터 갑자기 실력이 일취월장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와 동시에 검술이 패도적이고 음습해졌고…… 간헐적으로 이성을 잃고 흥분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허어,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아무도 보고하지 않은 것인가?”
담기량은 나직하게 허담을 꾸짖었다.
“오랜 시간 본파 내에서 무시당하고 살았던 이였기에 다들 이를 악물고 수련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소한 부작용일 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 어디 가문 아이인가?”
그 오랜 시간 내쳐지지 않고 본파 내에 머물렀다면 분명 평범한 가문의 아이는 아닐 것이라 여겼다.
“제법 규모를 갖춘 상단의 막내아들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해 전 상단이 몰락하며 오도평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한날한시에 자진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아란 소리군.”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이 틀어져도 화산파에게 크게 곤혹스러울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니까.
“더 이상은 없는가?”
“본파 내에서도 함께 어울리는 제자도 변변히 없었던지라…… 그게 다입니다, 장문인.”
“휴우.”
담기량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손을 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허담의 말을 들으니 담기량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보고 받은 내용대로라면 마공을 익혔을 확률이 더욱 커진 것이다. 만일 오도평이 정말로 마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무림맹과 화산파는 어쩌면 헤어날 수 없는 후폭풍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오파일방 주도의 무림맹의 현재 권한은 그 즉시 오대세가에게 넘어갈 것이고, 더는 정파로서의 대의명분과 정당성을 내세울 수도 없을 것이다.
“맹주.”
더욱 무거워진 장문인실의 침묵을 청성파 장문인 청허자가 깨트렸다. 담기량은 고개를 들어 청허자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맹주를 직시하는 청허자의 눈빛은 차가웠다.
“맹주, 내 말을 곡해해서 듣지는 마시오.”
“…….”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청허자의 목소리에 담기량은 입을 열지 못했다.
“다 화산파를 위함이고, 맹을 위함이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가 싶어 모두 청허자를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쉽게 입에 올릴 말은 아닐 것이라 짐작만 할 따름이었다.
“오도평……, 그 아이를 차라리 제거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청허자의 뱀의 혀처럼 차가운 그 목소리에 모두들 석상처럼 몸이 굳었다.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 아이가 마공을 안 익혔을 수도 있지만 익혔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파 무사(武史)에 치욕스러운 이름을 남길 바에야 차라리 의로운 죽음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 그 아이에게도 더 좋을 것이라 이 빈도는 여겨집니다, 무량수불.”
청허자는 품에서 자그만 옥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것은 분명 약병인 듯한데 어떤 종류의 약이 담겨 있는지 쓰여 있지 않았다.
“혈음마독(血陰魔毒)이외다.”
청허자는 시종일관 차갑게 말을 끝내고는 그와는 전혀 상반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자신이 화두를 던졌으니 그 판단은 알아서 하라는 듯 보였다.
“흠…….”
혈음마독을 쳐다보는 장문인들 사이에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혈음마독은 마교의 대표적인 독 중 하나다.
결국 청허자의 말과 혈음마독을 조합해 보면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마교로 돌리겠다는 뜻이다. 특히 마공의 진위 여부를 가리자며 마교 대공자가 자신의 목을 내걸고 호언장담까지 했으니 단숨에 마교를 궁지로 몰아버릴 수가 있었다.
“아미타불.”
소림사 방장 혜공이었다.
“무량수불.”
이어 무당파 장문인인 청하진인이 어두운 얼굴로 도호를 읊었다. 스승인 현도상인의 유언이 여전히 걸렸지만 차라리 이 기회를 이용해 둘의 인연을 끊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담기량이 눈을 들어 다른 장문인들의 의중을 묻자 종남파 장문인인 곡상천도 응했고, 끝까지 갈등하던 개방의 불취개 역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말이 사실인지 지금 당장 현이를 만나봐야겠습니다.”
학성이 안절부절못하며 제자리를 맴돌다가 결국 문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앉거라.”
나직하지만 노기가 담긴 호통이 그의 발걸음을 잡았다.
“스승님.”
학성이 고개를 돌리며 청명진인을 불렀다.
“앉으라 하지 않았더냐!”
“하오나 스승님…….”
학성이 재차 간곡하게 부르자 청명진인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의 표정으로 보건대 귀도 닫은 듯하다.
“스승님.”
학성은 그런 청명진인 앞으로 다가와 안타까운 얼굴로 다시 불렀다.
“나를 그리 불러도 소용없다.”
청명진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매우 매몰찼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
학성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청명진인은 여전히 눈을 감고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학성은 청명진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소매를 잡았다.
“분명 무언가가 있습니다. 스승님도 잘 알지 않습니까? 현이가 절대로……!”
그사이 청명진인의 손이 번뜩이더니 순식간에 학성의 수혈을 짚었다. 청명진인의 무릎 위로 학성이 풀썩 쓰러졌다.
“하아―.”
그제야 눈을 뜬 청명진인은 자신의 무릎 위에 쓰러진 학성을 내려다보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구나……, 이 못난 스승을 원망하거라. 그걸로 네 마음이 다스려진다면 말이다.”
청명진인은 한동안 학성을 내려다보다 문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혹 학방 있느냐?”
“부르셨습니까?”
문이 열리고 학방이 안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레 그의 시선은 정신을 잃고 청명진인의 무릎 위에 쓰러진 학성에게로 갔다.
밖에서 둘이 주고받는 얘기를 들었기에 대략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했다.
“학성을 데리고 무당파로 돌아가자.”
안쓰러운 눈빛으로 학성을 내려다보는 청명진인을 보며 학방 역시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알겠습니다, 사숙님.”
* * *
비록 이제 도문(道門)은 아닐지라도, 처음 도문으로 시작한 화산파에 이리도 사치스러운 방이 있다는 것을 세인들은 모른다. 그곳은 화산파를 방문하는 귀빈들만이 묵을 수 있는 방이었다.
마현과 설린, 냉천휘, 그리고 야율황기와 야율선이 그곳에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어떻게 화산파에 마교의 금마공이 들어갔을까요? 아주 오래된 금마공이라면 과거 정마대전 때 흘러 들어갔을 수도 있다고 여기겠지만, 너무 이상하군요.”
설린이 요모조모 따져가며 현 상황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문제는 본인이 본교에서 나온 후 이런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오.”
마현은 자신을 주목하는 이들에게 사천성에서 있었던 독패장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쩌면 두 사건이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싶소.”
마현의 표정은 진중했다.
우연이라면 다행히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한 짓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와 같은 일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고, 그건 무림 전체의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어찌된 일인지 확실히 알아봐야겠네요.”
“그래야지요.”
“쉽지 않은 일이 될 거야.”
야율황기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무림맹 사람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심문 자체도 제약을 받을 것이고.”
“알아. 하지만 해야지.”
마현은 심령을 제압해서라도 반드시 배후가 있는지 알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콩 콩 콩!
그때 굳게 닫힌 창문에서 기척이 들렸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3층이다.
그런 방 창문에서 기척이 들리자 모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발라진 한지 너머로 언뜻 새의 그림자가 비쳤다.
꺅 꺅 꺅.
그것을 보고 야율선이 데리고 있던 흰 독수리, 백조가 울음을 터트렸다.
“궁에서 온 모양이군.”
야율황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작지만 다부진 매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와 야율황기의 팔뚝 위에 앉았다.
그 매 다리에는 자그만 전서통이 달려 있었다. 야율황기는 전서통 안에서 둥그렇게 말린 서찰을 빼들었다.
남만야수궁에서 온 서찰을 읽어나가는 야율황기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다가 결국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오빠, 무슨 일이야?”
그 표정을 읽은 야율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야율황기에게 다가갔다.
“마 형.”
야율황기가 마현을 불렀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야율선은 더욱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운남성주가 궁을 향해 군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운남성주가? 왜? 무슨 일인데?”
야율황기가 속 시원하게 사정을 얘기하지 않자 급기야 야율선이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관군에 소속된 소부대가 야인들의 손에 죽었다며, 운남성주는 황군을 살상한 죄를 묻겠다고 했다는구나.”
“도대체 무슨 소리야? 운남성 관군이 왜 야인들의 손에 죽어?”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운남성은 다른 변방과 달리 사실 전투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이유가 바로 운남성과 남만 사이에 가로놓인 깊은 밀림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군이 밀림 안으로 들어올 리도 없거니와 야인이 밀림 밖으로 나갈 일도 거의 없다.
혹 밀림 안으로 길을 잘못 든 관군 한두 명이 죽었다면 그나마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소규모라고 해도 일개 부대가 죽었다고 하니 야율선이 이처럼 뜨악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설사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관과 무림의 불가침 관례에 따라 대부분 원만하게 일을 처리한다. 그런데 운남성주가 독자적으로 군사를 일으켰다니.
“그걸 아버지께서도 모르시겠단다. 조사해 보니 그런 일을 벌인 야인들도 없고. 그 일을 운남성주에게 통지하고 수사에 적극 협조까지 하겠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는구나.”
야율황기는 서찰을 주먹 안에 말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