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19화 (119/351)

# 119

19화

『그리 볼 것 없다.』

하지만 다시 들려온 전음에 냉천휘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실 설린이 그들과 동행하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현 때문이었다.

설린의 기억에 학방과 마현이 제법 친하게 서로를 대하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혹시나 화산파로 가는 동안 그에 대한 소식을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설린은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설린은 그리 허락을 하고서도 이내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듯해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화산파로 온 것도, 그들을 마차에 태우려고 하는 것도, 과거와 달리 자꾸만 변해가는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탓인지 그녀의 표정이 더욱 차갑고 냉랭하게 굳어졌다.

“귀하들께서 화산파로 가신다니…… 그럼 함께 가도록 하지요.”

망설이던 냉천휘가 마침내 마차 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하하하, 이거……. 킁킁킁!”

냉천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걸개아는 잽싸게 마차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다 올라타려는 순간 설린이 얼굴을 차갑게 굳히자 민망한 웃음을 터트리며 옷자락을 잡아 냄새를 맡았다.

때마침 설린이 코끝을 찡그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걸개아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에 걸개아뿐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무안한 얼굴로 설린의 눈을 피했다. 그리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개아야.”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당화평이 키득거리며 걸개아를 불렀다.

“……왜?”

걸개아는 힘없이 대답했다.

“마부석에 한 자리 비었더라.”

연신 키득거리며 당화평이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걸개아를 지나쳐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무량수불.”

학방 역시 도호를 읊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빈도가 다음에 스승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이야기해 주겠네. 물론 밥은 얻어먹지 않음세, 무량수불.”

학성 역시 걸개아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친 후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잠시 뒤.

“흠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상을 짓고 있는 걸개아의 뒤에서 나직한 헛기침이 들렸다. 바로 냉천휘였다. 아무래도 걸개아가 손님이다 보니 냉천휘는 차마 마부석으로 가라고 말을 하지 못한 것이다.

걸개아는 찔끔 눈물을 머금으며 마차 문 앞에서 물러섰다.

“이 거지는 마부석에 오르지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냉천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힘없이 마부석으로 오르는 걸개아를 잠시 쳐다보던 냉천휘는 곧 마차에 탄 후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설린은 상념에서 깨어나 마차 안에 탄 이들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저들 일행 중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설린은 굳이 그것을 묻지 않았다.

마차가 출발하고 얼마 동안 소소한 인사말 몇 마디가 오갔지만 그게 다였다.

그저 마차가 달리며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한동안 내부를 채울 뿐이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의외로 설린이었다.

“학방 도인이라고 하셨나요?”

설린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학방에게 말을 걸었다.

“이 빈도의 도명을 기억해주셔서 영광입니다.”

학방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에 보니 마 공자와 가까워 보이던데……. 두 분이 친하신가요?”

“마 공자라 하시면…….”

“네, 마교 대공자요.”

마현의 이름이 또다시 거론되자 학성은 설린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마 공자가 어떤 인물이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입에 올리는지 궁금증이 생겨났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학성만이 아니었다.

당화평도 매한가지였다. 한 번 겪어봤지만 그에게 마교의 대 공자는 정말 모를 사람이다.

어찌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마인처럼 보이다가도, 달리 보면 오히려 정파인보다 더 점잖아 보이고 다정한 면이 있었다. 마현이 떠오르자 당화평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반면 학방의 얼굴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학성 때문이었다.

‘휴우…….’

어찌 만나는 사람마다 학성 앞에서 마현을 이야기 하는지 내심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학성은 이미 마교 대공자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런 학성을 바라보며 학방은 고민에 빠졌다.

‘마교 대공자가 어릴 적 친우라는 사실을 알면 사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그것도 걱정이지만, 나중에 그들이 서로 만난다면 정파인들이 편견을 가지고 학성을 바라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

설린은 시시각각 표정이 변해가는 학방을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딴 생각에 빠졌던 학방은 그런 설린을 보고 아차 싶었다.

“이거, 빈도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

설린은 학방의 사과를 말없이 듣기만 했다.

학방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빈도가 그것에 대해 드릴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무량수불.”

학방의 대답에 설린이 아쉬움을 느낄 찰나였다. 당화평이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학방 도인님. 얼마 전에 마교 대공자가 무당파에 들렸다고 하지 않았나요?”

학방의 얼굴에 잠시 당혹감이 어렸지만 이내 표정을 수습하며 대답했다.

“잠시 들렸다가 간 거라 딱히 말씀을 드릴 것이 없어 그리 말했습니다.”

설린이 이번에는 당화평에게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시나요?”

“별것 아닙니다. 단지 마교 대공자가 제 여동생 생일잔치에 들렸다가 무당파로 향했다 하기에 잠시 물어본 것입니다.”

“사천당문에요?”

“예.”

“그렇군요.”

설린은 그 후로도 무표정한 얼굴로 몇 마디를 더 물었지만 별다른 것이 없었기에 대화는 금방 끝이 났다.

‘음…….’

그런 설린의 모습에 냉천휘는 눈을 빛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설린이 그저 차갑게 보이겠지만 냉천휘는 다르다.

오랜 시간 알아왔기에 그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사저가 지금 들떠있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무림대회에 갑자기 참석하겠다는 것도 이상했다.

처음에는 그저 바람을 쐬고 싶다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뭔가 냄새가 난다.

‘마교 대공자라…….’

냉천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설린의 얼굴을 살폈다.

‘혹, 연정?’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에이, 설마!’

다른 이라면 모를까. 자신의 사저가 그럴 리 없다고 그는 쉽게 결론을 내렸다. 그만큼 사저를 잘 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냉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 * *

“근데, 마 공자. 묵는 객잔이 어디요?”

술이나 마시자며 두서없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던 야율황기가 대뜸 마현에게 물었다.

“……?”

그 뜬금없는 물음에 마현은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 딴 건 아니고, 술을 퍼마시든 밥을 먹든 우리도 일단 잘 곳은 마련해야 할 것 같아서…….”

야율황기는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마현이 야율황기의 뒤를 보자 맹수들과 뒤섞인 남만야수궁의 야인들이 보였다.

야율황기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같이 묵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오.”

“바로 저깁니다.”

못 가르쳐 줄 이유도 없었고, 다른 정파인들과 한 객잔을 쓰느니 차라리 남만야수궁 야인들과 쓰는 것이 낫겠다 싶어 마현은 매향객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로 앞이네. 애들아, 방 잡으러 가자!”

야율황기는 반색하며 맹수들을 앞세우고 야인들과 함께 매향객잔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매향객잔 앞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왜 안 된다는 거야? 앙?”

“아이구, 손님. 정말 안 됩니다요!”

“손님 차별하는 거냐? 우리가 새외에서 왔다고 차별하는 거야 뭐야?”

“누가 차별한다고 그러십니까요.”

“그런데 왜 안 돼!”

“저, 저…….”

지배인은 울상을 지으며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황소만한 덩치의 대호 한 마리가 앉아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지배인의 손가락질을 받은 대호는 귀찮다는 듯 뒷발로 귓가를 벅벅 긁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한 번 포효를 내지르고는 지배인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크허어엉!

“히익!”

지배인은 갑자기 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겁하며 뒷걸음치다가 객잔으로 오르는 계단에 걸려 엉덩방아를 쿵 찧었다.

크르르릉!

대호는 그런 지배인의 얼굴에 송곳처럼 수염이 곤두선 주둥아리를 바싹 들이대며 새하얀 콧김을 훅 불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혀를 내밀어 입가를 싸악 핥았다.

지배인은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안 그래도 조금 전 마교와 청성파가 한바탕 하는 바람에 객잔 내부가 피로 엉망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남만야수궁이 와서 윽박을 지르니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에겐 기절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객잔 입구에는 대호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은 맹수들이 저마다 나직한 울음을 토해내며 위용을 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

그 광경에 마현은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야율황기가 맹수들을 앞세워 갈 때부터 알아보았다. 마현이 예상했던 것과 별반 다름없는 일이 결국 벌어진 것이다.

마현은 흑풍대를 이끌고 객잔 앞으로 걸어갔다.

야율황기는 마현이 다가오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객잔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 공자, 아 글쎄 이 자식이……, 엥? 어디 갔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객잔 앞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바르르 떨고 있던 지배인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야율황기가 거센 콧김을 내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 끝까지 나 호야왕을 무시해?”

호방하고 직설적인 그의 성격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제가 해결하지요. 철용.”

마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며 철용을 불렀다. 이런 일에는 대주인 왕귀진보다 철용이 더 잘 어울렸다.

“예. 주군.”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보라.”

“명.”

명을 받은 철용이 굳게 닫힌 객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현은 객잔 기둥에 몸을 기대고 느긋하게 철용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야율황기를 비롯한 남만야수궁의 야인들은 그러지를 못했다.

이야기가 제법 길어지는지 좀처럼 철용이 객잔에서 나오지 않자 야인들 사이에서 슬슬 짜증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투덜거림은 처음에는 작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지며 거친 욕설로 변해갔다.

“이 새끼들이 지금 장난치나! 야, 지배인!”

더 이상 참지 못한 한 야인이 몸을 일으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아! 다들 조용히 안 해!”

다행히 야율황기가 나서며 호통을 치자 사내는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리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현은 철용을 기다리면서 그런 야인들의 모습을 살폈다.

‘대충 세 무리인가?’

언뜻 보면 모두 같은 야인들 같지만 자세히 살피니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에 따라 무리는 대략 세 부류로 나뉘어졌다. 그 기준은 그들이 데리고 있는 맹수들이었다.

어지간한 황소보다 더 큰 곰, 호랑이가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의 큰 덩치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늑대, 그리고 하늘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독수리였다. 물론 독수리 역시 보통 독수리보다 두어 배는 더 커보였다.

그리고 야율황기의 옆에는 그 모든 맹수들을 압도하듯 엄청나게 큰 호랑이 한 마리가 하품을 하며 앉아 있었다.

그런 맹수들을 마치 고양이나 개 다루듯이 하는 야인들을 보니 괜히 남만야수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현이 야인들과 맹수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기다리던 철용이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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