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18화
“청명 사숙님의 진전을 이어받은 학성 사제입니다.”
걸개아의 얼굴에 바로 ‘그렇지!’하는 표정이 지어졌다.
“그렇다면 태극검룡의 별호를…….”
“무량수불.”
학방은 웃으며 도호로 대신 대답했다.
태극검룡이라는 별호는 무당파에서 조금 특별한 별호다.
언제부터인지 태극검룡은 무당제일검으로 이어지는 별호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학방이 태극검룡의 별호를 사제에게 내어주었다는 소식은 곧 그를 능가하는 무당파의 차기 검이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학성아, 인사하거라. 개방의 소방주 걸개아 소협. 이분은 사천당문 소가주 당화평 소협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빈도는 학성이라고 합니다. 무량수불.”
학성은 도호를 읊으며 부드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이거 장막에 쌓인 학성 도인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렇게 서로 인사가 오갔다.
“그런데 어쩐 일로 본파에 오르십니까?”
“아!”
학방의 질문에 걸개아가 잠시 잊고 있던 마현을 떠올렸다.
“무당파에 마교 대공자가 들렸다는 소식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가던 길입니다.”
걸개아의 대답에 학방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마교 대공자요?”
반면 학성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학방은 서둘러 대답했다.
“그는 본파에서 내려간 지 오래입니다.”
“그렇습니까?”
되묻는 걸개아의 음성에 힘이 쭉 빠져 있었다. 힘이 빠지기는 당화평도 마찬가지였다.
“어쩌지?”
“글쎄…….”
“별수 없지. 화산파로 갈 수밖에……. 무림대회까지 며칠 남지 않았으니 말이야.”
“으으으. 그나저나 난 죽었다.”
걸개아는 스승인 불취개를 떠올리며 울상을 지었다.
“화산파로 가시는 길입니까?”
둘의 대화를 잠시 듣고 있던 학방이 조심스레 끼어들며 물었다. 학성과 둘이 가는 것보다 일행이 있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강호초출인 학성이 당화평과 걸개아와 친해지는 것이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되는 것은 없으니까.
“아마 그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동행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학방의 제안에 걸개아와 당화평은 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목적지인 화산파로 향했다.
무당파가 있는 무당산에서 섬서성은 그리 멀지 않았다. 무당산에서 길을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일행은 섬서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보게, 학성.”
“말씀하시게.”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가 싶네만……, 어찌 청명진인의 제자가 되었는가?”
걸개아가 궁금하다는 듯 불쑥 질문했다.
요 며칠 함께 동행하면서 당화평과 걸개아, 학성은 나이가 비슷해서인지 생각보다 빨리 친해졌다.
“궁금한가?”
학성의 물음에 걸개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 방도 특유의 궁금증이 그를 가만 놔두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리 비밀도 아니…….”
대답하는 학성의 말을 당화평이 중간에서 잘랐다.
“잠깐!”
그 행동에 학성과 학방은 의아해하면서, 걸개아는 오만상을 쓰며 당화평을 노려보았다.
“그냥 대답해 주지 말게.”
“……?”
“크크크.”
당화평이 짓궂은 웃음을 터트리며 은근한 목소리로 학성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거 아는가?”
“무얼 말인가?”
“거지가 사는 밥이 아주 맛있다는 것을.”
“응?”
당화평의 말뜻을 모르는 학성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걸개아는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그러는 당 소협은 얻어먹어 보셨습니까?”
“하하하하!”
학방의 질문에 당화평은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을 쫙 펴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하다는 뜻이리라.
자연스레 일행들의 눈이 걸개아에게 모였다.
“야! 당화평!”
결국 그 눈빛을 이기지 못한 걸개아가 당화평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소리를 지르는 걸개아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당화평의 말은 그 자체로 거지이자 개방 방도로서 수치요, 치부를 훤히 까발린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험험, 사형.”
학성은 나직한 헛기침을 내뱉으며 학방을 불렀다.
“왜?”
“우리도 한 번 얻어먹어 볼까요? 설마 천존님이 꾸지람을 하시지는 않겠지요?”
당황하는 걸개아의 모습에 학성 역시 슬슬 장난기가 발동하던 참이었다.
“무량수불……. 그만한 일로 천존님이 진노하실까?”
학방 역시 그 장난에 점잖게 동참했다.
설마 설마 했던 학방마저 그리 말하자 걸개아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했다.
“하하, 하하.”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걸개아는 요상한 웃음을 실실 흘렸다. 흐느적거리던 걸개아는 결국 나무 한 그루를 잡고 쭉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나 거진데……, 하하, 하하, 하하하.”
그 모습에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하하하하.”
하지만 그들의 웃음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뚝 끊겼다.
두두두두두!
관도 끝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모두 귀를 기울였다.
상당수의 말이 달려오는 듯 아직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도 지축이 은은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누구지? 관인가?”
걸개아가 땅바닥에 귀를 붙였다가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얼마 후, 관도 끝에서 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해?”
새하얀 말과 마차, 그리고 새하얀 털을 두른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었다.
북해빙궁 외에는 없었다.
“북해빙궁에서 이번에는 설혼(雪魂) 냉 소협이 온다고 하지 않았나?”
걸개아는 마차를 보며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남자가, 게다가 무인이 마차를 타고 온다는 것은 조금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먼 여정이니 타고 올 수도 있는 거지.”
당화평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도 아까워.”
걸개아는 양손으로 뒷목을 잡으며 입을 다셨다.
“소궁주 빙화의 얼굴이 그리 아름답다던데.”
그는 팔을 털며 여전히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는 길에 좀 얻어 타고 갈 수 있으려나?”
걸개아는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북해빙궁 무리를 쳐다보았다.
걸개아의 그런 바람이 하늘에 닿아서일까?
두두두두―
푸히이잉!
마차와 말들이 일제히 그들 일행 앞에서 가던 길을 멈춰 섰다.
당연히 걸개아의 입은 찢어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헤벌쭉 벌어졌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마차의 창문이 열렸다.
“실례하오.”
냉천휘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걸었다.
“마음껏 실례해도 되오.”
걸개아는 능글맞은 표정과 그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 이 길이 화산파로 가는 길이 맞소이까?”
아무래도 북해빙궁의 사람들이다 보니 중원 길에 어두운 모양이었다. 하긴 북해에서 쭉 내려왔다면 섬서성 북쪽으로 왔을 테니 길이 어두울 만도 했다.
“험험, 길눈이 조금 어두운 모양입니다. 허허허.”
걸개아는 짐짓 점잖은 척 웃으려 했지만 그건 그만의 착각이었다. 보는 이들에겐 그의 웃음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걸개아는 평소와 달리 여전히 목소리를 깔고 슬쩍 운을 뗐다.
“그래서 말이오.”
“……?”
“이 걸 모 역시 화산파로 가는 길인데……. 가는 길에 마부석에라도 태워 주신다면야 아주 잘, 지름길로 안내를 할 수 있을 것 같소만?”
걸개아는 슬쩍 실눈을 뜨며 냉천휘의 반응을 살폈다.
걸개아의 의뭉스러운 몸짓과 말에 냉천휘는 역시나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때 학방의 눈에 마차 창문 틈 사이로 언뜻 설린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움에 그가 스스럼없이 몸을 움직여 마차 곁으로 다가갔다.
쿵!
그러자 마차를 호위하던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교묘하게 고삐를 움직여 말들이 일제히 앞발로 땅을 박차게 했다. 함부로 마차 곁으로 다가가지 말 것을 엄중하게 경고하는 듯했다.
“무량수불.”
학방은 그런 그들에게 나직하게 도호를 읊으며 마차에서 조금 떨어져 창문을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설 소궁주.”
학방의 인사에 냉천휘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그는 잠시 학방을 살피더니 고개를 돌려 설린을 바라보았다. 설린 역시 고개를 틀어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설린은 학방이 보이자 가슴에 살포시 손을 올린 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설린의 고운 목소리에 걸개아는 슬그머니 학방 곁으로 다가가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중원에도 소문이 자자한 그녀의 미모를 한 번 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눈과 무표정한 설린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조차 느낄 수 없는 차가운 그 눈빛에 걸개아는 무안함을 느낄 정도였다.
“험험험…….”
그 무안함을 애써 털어 버리기 위해 걸개아는 괜한 헛기침을 여러 번 뱉어냈다.
“이쪽은 개방 소방주 걸개아 소협입니다.”
그것이 안 돼 보였는지 학방이 나섰다. 그러자 금세 걸개아의 얼굴엔 넉살 좋은 표정이 떠올랐다.
“걸개아라고 하오.”
“이런, 실례했습니다.”
걸개아의 소개에 냉천휘가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중원과 동떨어져 살아가는 새외의 북해빙궁이라고 해도 개방의 소방주를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북해빙궁의 냉천휘라고 합니다.”
냉천휘는 걸개아와 학방에게 포권을 취하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하하하, 냉 소협이 그 위명이 쟁쟁한 설혼이셨군요.”
누구라도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은 것은 인지상정. 냉천휘는 걸개아의 말에 희미하지만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려 학방을 쳐다보았다.
설린과 아는 사이라면 그 또한 신분이 낮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빈도는 무당의 학방이라고 합니다.”
“아! 태극검룡!”
냉천휘는 나직하게 그의 옛 별호를 외쳤다.
“하하하, 아직 소식이 늦군요.”
눈치를 보다가 둘 사이에 잽싸게 끼어들며 걸개아는 손가락을 좌우로 저으며 웃었다.
“……?”
“태극검룡은 이분입니다.”
걸개아는 뒤로 손을 뻗어 학성을 잡아당겼다.
“……빈도는 학성이라고 합니다.”
학성은 어정쩡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리둥절한 냉천휘를 위해 걸개아가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아!”
그때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냉천휘는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서 지금 학방 도인께서는 태극수검(太極首劍)의 별호를 가지고 있지요.”
“그렇군요, 미처 제가 몰라 결례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냉천휘는 포권을 다시 취하며 사과했다.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남은 것은 이제 당화평이었다.
“사천당문의 당화평입니다.”
둘 간의 간단한 인사가 오고갔다. 그리고 잠시지만 대화가 끊겼다.
지금 가장 난감한 이는 바로 냉천휘였다.
이렇게 인사까지 나눈 마당에 그들을 외면하고 홀로 마차를 타고 가기도 무안했지만, 그렇다고 함께 가자니 설린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 그녀는 함께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걸개아의 표정을 보아하니 ‘나도 마차에 태워주시오’라고 대놓고 요구하고 있으니 그로서는 거절하기가 더욱 곤혹스러웠다.
설린에 대해 그나마 알고 있는 학방이었다. 그가 그런 냉천휘의 난처해하는 기색을 눈치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만…….”
그때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냉천휘의 머릿속에 설린의 전음이 들려왔다.
『나는 괜찮다.』
‘응?’
냉천휘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설린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아는 그녀라면 절대로 허락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