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16화
근 이십 년이 넘게 오로지 검의 길을 걸어온 자신이었다. 또한 남들보다 더 열심히 검을 갈고 닦았다. 그 대가로 청성파에서도 극소수만이 얻을 수 있는 청옥검(靑玉劍)을 받았다.
청옥검을 받았다는 것은 청성파의 무공을 온전히 물려받았다는 뜻이다. 그것은 무당파의 태극검(太極劍)을 받은 이나, 화산파의 매화검수(梅花劒手)처럼 청성파 검의 자존심이었다.
태일은 얼굴 중앙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그는 검격에 박혀 있는 푸른 옥, 청옥을 잠시 쳐다봤다. 그것은 청성파 제자라고 해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청옥검의 상징이었다. 검자루를 잡은 손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척마멸사(拓魔滅邪)! 나의 검은 오로지 척마멸사를 위함이다.’
태일의 검이 서서히 아래로 기울어지며 상체와 수평을 이루었다. 동시에 두 다리를 벌려 중심을 아래로 낮추며 자신의 절기인 청풍검(淸風劍)의 기수식을 취했다.
“지옥을 보여주지!”
마현의 몸에서 마력이 솟구쳤다.
온몸을 억누르는 마기가 순식간에 태일의 몸을 짓눌렀다.
“하압!”
태일은 마기를 떨쳐내기 위해 내력이 담긴 기합을 터트리며 마현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바닥을 스치듯 미끄러져간 태일은 검에 내력을 담아 마현의 허리를 베어갔다.
쐐애애액!
마현은 접힌 섭선을 내리며 암 바클러를 시전했다. 얇은 막이 섭선 위에 만들어졌다.
캉!
암 바클러와 태일의 검 사이에서 붉은 불꽃이 튀었다.
미약하게 일그러진 눈꺼풀 아래 태일의 동공이 동그랗게 변했다. 너무나도 쉽게 선막을 만들어 자신의 검을 막은 것이다.
‘이익!’
태일은 입술을 앙다물며 몸을 틀어 마현의 반대쪽을 노렸다.
캉!
검이 다시 언뜻 보이는 얇은 막에 가로막혔다.
태일의 눈동자가 미약하지만 파르르 흔들렸다.
마현의 비어 있는 왼손 위에 선막과도 같은 얇은 막이 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태일은 검을 들어 단숨에, 한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마현을 거세게 휘몰아쳐갔다. 쾌에 쾌를 담은 태일의 검은 순식간에 여러 줄기로 나뉘어져 마현을 덮쳤다.
외부에서 보면 마현의 몸이 푸른 검기에 휘감기는 듯했다. 검기를 동반한 서슬 퍼런 바람은 청풍검법, 그 이름에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카가가가강!
푸른 검기가 마현의 몸을 에워싸자 사방으로 쇳소리에 의한 파음이 터져나갔다.
검을 휘두를수록, 파음이 커질수록 태일의 얼굴은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져갔다.
순식간에 수십 합을 퍼부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분명 수십 합 동안 마현의 몸을 베어갔다.
하지만 모두 막혔다.
단 하나의 검도 마현의 몸을 베지 못했다.
그 순간 마현과 태일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태일은 보았다. 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마현의 광오한 눈빛을.
태일은 어금니를 부서져라 꽉 깨물면서 몸을 더욱 아래로 숙였다. 그리고 마현의 다리를 검으로 쓸어갔다.
마현은 실소를 머금으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참담하던 태일의 눈빛이 그 순간 살아났다.
마현이 허공으로 몸을 날린 것은 오만함이 낳은 실수라 여겼다. 일단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면 운신의 자유로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태일은 고개를 들어 허공으로 몸을 띄운 마현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쑤아아앙!
콰광!
예상대로 마현 역시 선기를 날려 자신의 검기를 무력화시켰다.
‘이제 끝이다!’
태일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내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마현이 바닥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의 몸을 벨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가 어디로 내려서느냐다.
그러나 태일에게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디든, 얼마나 떨어진 곳이든 단숨에 달려가 검을 휘두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몸은 석상처럼 굳어졌다.
그때 얼음장처럼 차가운 마현의 음성이 들려왔다.
“끝인가?”
응당 아래로 떨어져야 할 마현의 몸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실망이군. 고작 그 정도로 본인을 도발하다니 말이야…….”
허공에 떠 있는 마현의 유생의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짙은 흑무가 마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유형화된 마기였다.
흔들리는 태일의 눈동자에는 불신이 가득 차 있었다.
‘허공답보라니!’
허공답보는 그저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라 여겼다. 아니 실제로 있다고 해도 그걸 펼칠 만한 고수들의 이름에 적어도 마현은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눈 바로 앞에서, 아니 눈 바로 위에 마현이 보란 듯이 둥둥 떠 있는 것이 아닌가.
“마나 스크루(Mana screw)!”
마현의 손에서 손가락만한 뾰족한 그 무엇이 튕겨져 날아왔다.
지풍(指風)인 듯했다.
“헙!”
태일은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검을 들어 묵빛 기운을 막았다.
카강!
검면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푹!
검면에 부딪힌 정체를 알 수 없는 강기 덩어리가 바닥에 꽂혔다. 그 자리에는 엄지손가락만한 자그만 구멍이 패여 있었고, 그 구멍에서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라오고 있었다.
‘지, 지강?’
태일은 마현이 쏘아 보낸 것이 지풍도 아닌 지강이라는 생각에 눈이 튀어나올 만큼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마현의 양손 위에 수많은 강기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지법(指法) 중 한 번에 열 개까지 쏘아 보내는 것이 있다고는 태일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개의 강기로 분산되면 그 위력이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에 대부분 하나, 많아 봐야 두세 개가 한계였다.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지법 중의 하나인 소림의 탄지신공(彈指神通)이나 일지선공(一指禪功) 역시 한 수에 하나의 강기만 쏘아 보낸다.
하지만 그것을 염두해 두고도 지법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지풍이나 지강은 열 개가 한계였다. 그 이상 만들어낼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핑!
경악하고 있는 태일에게 또 하나의 지강이 날아왔다.
캉!
다시 검면과 지강, 정확히는 마나 스크루 사이에서 파음이 만들어졌다. 그 힘에 검이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태일은 세상에 어찌 저런 지법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십 개의 지강이 일제히 자신에게로 날아온 것이다.
“큭!”
나직한 신음을 깨물며 태일은 오로지 수비일변도의 청풍암세(靑風暗世)의 초식을 이용해 검막을 쳤다.
타탕, 타다다당!
촘촘한 그물처럼 만들어진 검막 위로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태일이 만들어낸 검막은 완벽할 정도로 촘촘하지는 않았다.
듬성듬성한 검막의 그물 사이로 지강이 하나 둘씩 빠져나갔다.
사각!
그렇게 빠져나온 지강 몇 개가 여지없이 태일의 몸에 상처를 만들었다. 하지만 태일 역시 청옥검을 받은 청성파 제자인 만큼 실력이 녹록지만은 않았다.
비록 모든 지강을 막지는 못했어도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작은 상처도 하나 둘이지, 십여 개가 넘어가면서 그의 도복은 점차 붉게 변해갔다.
모든 공격을 다 막지 못했지만 치명상을 피했다는 생각에 태일은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았다.
서서히 땅으로 내려오는 마현을 기다렸다가 마현이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태일은 빛살처럼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때 마현이 태일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운드 애그러베이션!”
상처악화 마법이었다.
푸학!
앞으로 달려 나오던 태일의 허벅지에 난 상처가 확 벌어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크학!”
생각지도 못한 통증에 태일은 신음을 토해내며 상처가 갈라진 다리를 바닥에 꿇어야 했다. 깊게 갈라진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철철 넘치고 있었다.
“크으으으!”
태일은 재빨리 지혈하며 검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마치 풍이라도 든 것처럼 몹시 흔들렸다.
겨우 신형을 세운 태일의 눈에 다시 마현이 주먹을 움켜지는 것이 보였다.
푸학!
“컥!”
이번에는 옆구리에 난 자그만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겨우 세웠던 신형이 그로 인해 다시 휘청거렸다.
지독한 고통에 태일의 턱이 바르르 떨렸다. 그로 인해 이가 서로 맞부딪히며 듣기 싫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너는 알고 있어야 했다.”
마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말했다.
푸학!
다시 몸에 난 상처 하나가 터졌다.
“컥!”
태일의 몸이 새우처럼 구부려졌다. 그의 몸은 이제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본인은 그 누구든…….”
푸학!
“크악!”
나머지 다리마저 상처가 터지며 태일이 힘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에게 어금니를 드러낸 이를…….”
푸학!
태일 도장의 어깻죽지에 난 상처가 터졌다.
그 고통에 태일의 몸이 역방향으로 활처럼 굽었다.
“살려두지 않아!”
마현의 눈에서 마기가 폭사되며 태일의 몸을 휘감았다.
푸학, 푸학, 푸학, 푸하아악!
태일의 몸 곳곳에 난 작은 상처들이 일제히 터지며 피를 뿜어냈다.
흡사 사람이 터지며 피가 사방으로 튀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엄청난 속도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결국 부르르 몸을 떨던 태일의 신형이 서서히 아래로 꺼지더니 곧 바닥에 쓰러졌다.
마현은 바닥에 쓰러진 태일의 몸을 발로 차 반듯하게 눕혔다. 그리고 가슴을 발로 짓눌렀다.
“크으으으!”
큰 상처를 입었지만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상태였기에 태일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힘겹게 뜬 눈 사이로 마현의 얼굴이 보였다. 입꼬리를 말아 웃고 있는 마현의 모습에서 그는 마신 아수라를 떠올렸다.
상처에 의한 고통 때문이지, 아니면 아수라의 모습을 봐서인지 태일은 일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죽음을 떠올렸다.
“본인이 말했지?”
마현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지이이잉!
마현의 손에 활활 타오르는 창이 하나 떠올랐다.
“넌 죽는다고!”
마현은 파이어 재벌린을 태일의 심장을 향해 내리찍었다.
그때였다.
쐐애애액!
한 자루 검이 마현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송일이었다.
그가 태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검을 던진 것이다.
어찌 보면 악수요, 다른 이에게 지탄받을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송일에겐 그보다 사제 태일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한 자루의 검이 마현의 가슴을 찌르기 바로 직전.
마현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쾅!
허공만을 꿰뚫은 송일의 검은 마현이 서 있던 자리를 지나 바닥에 꽂히며 자욱한 먼지를 만들어냈다. 검이 지나가고 마현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마현은 파이어 재벌린, 화창을 태일의 심장에 여전히 겨눈 채 송일을 향해 말했다.
“기다려, 너도 죽여주지.”
송일을 노려보며 마현은 파이어 재벌린을 높이 들어올렸다. 단숨에 태일의 가슴을 꿰뚫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