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11화
호신강기가 문파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를 띤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각 문파의 내공심법과 초식 등의 소소한 차이에서 오는 것 정도이다. 다시 말해서 내공과 경지의 차이에서 오는 단단함의 차이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마현이 보여주는 호신강기는 단단함 정도가 아니라 일반적인 호신강기와는 그 크기부터가 달랐다. 마치 얇고 투명한 단단한 벽이 자라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강제적으로 뒤로 밀려나자 견고하던 칠성진에도 미미한 허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현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촤라락!
가볍게 흔드는 손안에서 검은 부채가 펼쳐졌다.
동시에 그레이트 실드를 없애며 윈드 커터를 만들었다.
“하압!”
마현은 몸을 팽그르르 회전시키며 부채를 휘저었다.
쉬이이이익!
십여 개의 바람의 칼날이 한 곳을 집중적으로 노리며 날아갔다.
카강!
몇 개는 무당파 제자의 검과 맞부딪히며 파음을 만들어냈고, 몇 개는 바닥에 꽂히며 자욱한 먼지를 일으켰다.
파바박!
허점이 만들어진 곳을 의도적으로 흔들었지만 칠성단원들은 흔들리지 않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왜 무당파가 정파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지 알만한 광경이었다.
마현은 입가를 살짝 실룩였다.
그 정도 허점이면 충분했다. 무림인들에게는 파고들어가기 부족하겠지만 마현에게는 충분한 까닭이다. 굳이 보법의 형태로 몸을 움직여 틈새를 뚫고나갈 필요가 그에겐 없었다.
‘블링크만으로 마라환영보를 시전한다!’
마현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한 걸음 내딛은 마현의 모습이 그 순간 사라졌다.
파밧!
“헉!”
파바밧!
“헙!”
칠성진을 이루고 있는 무당파 제자들 사이에서 헛바람이 속속 터져 나왔다. 청하진인 또한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뜨며 장내를 살폈다.
“어, 어떻게…….”
그렇게 말이 끝났을 때 이미 마현은 칠성진을 빠져나와 청하진인 앞에 서 있었다.
말이야 쉬웠지만 사실상 마현에게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수조화가 아닌 오로지 수비일변도에 가까운, 모든 마력과 집중력을 마라환영보에 쏟은 것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당파 제자들이 생사를 도외시했다면 이런 시도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폐진(閉陳)과 동시에 마인을 에워싸라!”
마현의 등 뒤에서 무당파 제자들이 칠성진을 해체하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착!
마현은 청하진인의 눈을 직시하며 섭선을 접어 허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뒤로 돌았다. 청하진인에게 등을 내준 꼴이었지만 마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한쪽 무릎을 꿇으며 한 손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력을 쏟아 부었다.
마현의 몸에서 피어오른 마기, 흑무(黑霧)는 팔을 타고 땅바닥 안으로 스며들었다.
“본 펜스(Born fence)!”
스산한 목소리가 마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투둑 투두둑.
북 가죽이 부르르 떨며 소리를 내듯 땅거죽이 쿠르르 뒤틀리며 솟아올랐다.
푹! 푸핫!
동시에 땅거죽이 들썩이더니 하얀 물체가 땅 위로 솟구쳐 올랐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이었다.
땅거죽을 뚫고 삐죽 솟아오른 그것들은 서로 뒤엉키더니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갔다.
그 하얀 형상은 마치 가시나무처럼, 혹은 날카로운 생선가시들을 마구 쌓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바로 뼈로 만들어진 목책(木柵)이었다.
청하진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쉴 새 없이 바뀌는 초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마현의 등에 꽂혀 있었다.
청하진인은 입술을 앙다물며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손을 움찔거리며 움켜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청하진인은 끝내 검을 뽑지는 못했다. 무당파를 이끄는 자답게 때론 본의 아니게 독한 마음을 먹기도 했지만 그가 천성이 부드럽고 인자한 도인인 까닭이었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목책에 의해 마현과 청하진인, 칠성단 사이에 하얀 가시 벽이 생겼다.
마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청하진인을 향해 돌아섰다.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챙.
그 순간 청하진인은 망설이다 뽑지 못했던 검을 결국 뽑아들었다. 맑은 쇳소리가 검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현은 보았다. 복잡한 심경이 묻어나는 청하진인의 눈동자를.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학성에게 그 어떤 흠집도 있어서는 안 되네.』
칠성단을 의식한 두 사람은 전음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전음으로 느껴지는 청하진인의 어투와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랐다.
후우우우웅!
청하진인의 몸에서 무당파 특유의 부드럽지만 웅혼한 중압감이 느껴지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에 맞서 마현의 몸에서도 칠흑 같은 마기가 피어올랐다.
그때였다.
― 마 공자, 빈도의 부탁을 꼭 들어주시게나, 무량수불!
마현의 머릿속을 천둥처럼 울리며 소리가 들려왔다.
전음이 아닌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현은 대치 상황에서 고개를 돌려 무당파 뒤로 뻗어 있는 산줄기를 쳐다보았다. 바로 현도상인이 있는 곳이었다.
―편히 잘 가시게, 배웅은 못할 듯싶으이…….
부탁이라던 현도상인의 말이 떠올랐다.
친우를 생각해 무당파를 지켜달라던 부탁. 그 대가는 ‘원하는 것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뿐이었다.
그렇게 현도상인의 말을 떠올리며 마현이 잠시 망설이던 그때, 나이가 지긋한 무당파 도인 한 명이 헐레벌떡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
“장문사형! 장문사형! 큰일입니다, 큰일! 사백께서……, 사백께서……!”
“스승님이 왜?”
“타, 탈각(脫却)하셨습니다.”
“스, 스승님이!”
청하진인은 마현과 대치 중이라는 사실도 잊을 만큼 큰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오늘 아침 문안인사도 드렸었다. 그때만 해도 정정했었는데 등선도 아닌 탈각이라니…….
놀라기는 마현도 매한가지였다.
그러는 마현의 머릿속으로 스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조금 전 머릿속을 울려온 현도상인의 말이었다.
‘편히 잘 가시게, 배웅은 못할 듯싶으이…….’
* * *
“이 말코도사야…….”
걸왕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진득한 술 냄새가 그의 몸에서 풍겼지만 취기는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그렇게 술 한 잔 하자고 해도 잘 마시지 않던 현도상인이 오늘따라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을 주절주절 내뱉는 것도 모자라 술까지 마시자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마지막 유언이 그게 뭐냐!”
걸왕은 술을 마시다 말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던 걸왕은 다시 술병을 들어 입에 주둥이째 물었다. 반은 목으로 넘어가고 반은 입 주위로 흘렀다. 그런 걸왕의 눈가에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씨부럴 놈, 유언이 그게 뭐냐고…….”
어느새 입가에 더는 술이 흐르지 않았다.
술병이 빈 것이다.
“또 그렇게 갈 것은 뭐냐고……, 누가 말코도사가 아니랄까봐.”
걸왕은 조금 전 현도상인의 마지막 가는 길이 다시 떠올랐다.
술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현도상인이 술잔을 들며 불쑥 말했다.
“마지막 한 잔, 부딪혀 볼 텐가?”
“아직 멀었어, 낄낄낄. 오늘 먼저 술 먹자고 했으니 여기 있는 술 다 먹기 전에는 안 되네.”
“무량수불.”
걸왕의 말에 현도상인은 그저 담담하게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놈의 무량수불은…….”
“걸왕, 아니 육삼아.”
“왜 남의 본명은 부르고 지랄이야?”
“마 공자를 잘 부탁하네.”
“이잉?”
뚱딴지같은 현도상인의 말에 걸왕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아까부터 왜 자꾸 그놈을 잘 부탁한다고 씨부리냐? 응?”
“창문 좀 열어주게.”
“창문은 또 왜?”
“맑은 하늘이 보고 싶어서 그러네.”
“암튼 별걸 다 시켜.”
걸왕은 툴툴거리며 무거운 엉덩이를 질질 끌고 방문 쪽으로 기어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 너머로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보였다.
“무량수불.”
그 하늘과 구름을 보며 현도상인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 * *
터벅 터벅.
마현은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둥 둥 둥 둥 둥―
그런 그의 등 뒤로 북소리가 들려왔다.
마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아스라이 보이는 무당파를 바라보았다. 그런 마현의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학성을 보러 왔는데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학성도 학성이지만 현도상인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다시 돌이켜보면 그는 분명 뭔가를 본 것 같았다.
학방의 말처럼 현도상인은 천기를 본 것일까?
‘천기라…….’
과연 하늘의 별을 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연구를 하고 미래를 보았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다 과거의 이야기이니 쉬이 믿음이 가지 않았다.
“흠…….”
현도상인을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마현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버리고자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현도상인이 했던 말의 뜻은 모르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언젠가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의 부탁은 그때 가서 판단하면 되었다. 학성 또한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이 빚을 왕창 받아낼 생각이었다.
‘기분전환 하는 데는 술이 제격이지.’
그러고 보니 중원에 나온 이후로 흑사신에게 좀 무심했던 것 같았다.
“흑사신.”
마현이 흑사신을 부르자 곁으로 네 개의 검은 그림자가 불쑥 솟아올라왔다.
“이제야 우리가 생각났냐? 쳇!”
흑도였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잔뜩 토라진 음성을 내며 가늘어진 눈으로 마현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팩 돌려 버린다. 아니나 다를까, ‘나 삐졌소!’라고 아예 얼굴에 광고를 하고 있었다.
“그다지 기분 좋은 곳은 아니군.”
흑권은 고개를 돌려 무당파를 올려다보았다.
은은한 항마의 기운이 그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그냥 술 한 잔 하자고 부른 것은 아닐 텐데…….”
“바로 그거야.”
“……?”
흑권뿐만 아니라 언제나 무표정하던 흑창까지 눈이 살짝 커지며 다들 놀라워했다.
여전히 마현을 외면하던 흑도 역시 어슬렁어슬렁 마현 곁으로 다가섰다.
“언제 다시 중원을 주유할지 모르니 한 잔 할까 하는데.”
“……이왕이면 조금 아래로 내려가는 건 어떨까? 험험험.”
흑도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어디 가고 싶은데?”
“험험, 굳이 그리 묻는다면야…….”
흑도가 나직한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고르기 싫으면 말고. 흑권, 어디 가고 싶은…….”
그 순간 흑도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현 앞에 불쑥 나타났다.
“동정호!”
“동정호?”
“그래, 동정호!”
“가고 싶어?”
마현의 물음에 흑도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위아래로 마구 끄덕였다.
“동정호라……,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니 한 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흑사신을 쳐다보았다.
“다들 어때?”
“본좌도 오랜만에 보고 싶군.”
“본좌도 찬성일세.”
흑권과 흑검 역시 싫지 않은 듯 찬성했다. 흑창도 나름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동정호로 가지.”
결정이 나자 마현과 흑사신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