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9화
청하진인의 딱딱한 표정이 점차 암울한 빛을 띠어갔다.
“이번 무림맹 비무대회에 마교 대표로 대공자가 참석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찌 그가 무당파로 왔는데도 보고가 올라오지 않은 거지?”
마치 홀로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청하진인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파였다. 마교 대공자가 무당파에 왔는데도, 그가 버젓이 무당파 안에 머물고 있음에도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는 사실에 청하진인의 가슴속에서는 은근한 노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정체를 아는 자가 없을뿐더러 수행원 없이 개인 자격으로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청하진인의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보고가 없었다는 사실은 둘째로 치더라도, 하필 그가 개인 자격으로 찾아온 이가 학성이니……, 모든 게 뒤엉키는 느낌이었다.
“사제는 학성 사질의 스승이니…… 생각한 바라도 있는가?”
그리 묻고도 청하진인은 왜 그런 질문을 했나 싶었다. 청명진인에게 답이 있었다면 자신을 이리 찾아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장문사형의 고견을 듣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청명진인의 말을 끝으로 긴 침묵이 찾아왔다. 한식경이 지났을까. 청하진인이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당파는 내 집이자 아버지야. 무당파는 제자들의 집이자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무엇보다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 바로 무당파라는 것이 내 신념이네.”
청하진인은 굳는 눈빛으로 청명진인을 쳐다보았다.
“학성과 마교 대공자 사이의 일에 대해 아는 이가 우리 외에 누가 있나?”
“그 말씀은?”
“학성을 지켜야지. 그래야만이 무당파가 지켜지네. 지금의 무당파가 아닌 미래의 무당파가…….”
잠시 말끝을 흐리던 청하진인의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안광이 쏟아졌다.
“지켜지네.”
목소리 또한 단호했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아는 이가?”
“학성을 제자로 받아들일 때 이 사제를 수행했던 ‘송’자 항렬의 사손들이 있습니다.”
“기억나는구먼.”
“어쩌실 생각입니까?”
“강제라도 폐관수련을 시켜야겠지.”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네. 같은 무당파 자식들인데 내칠 생각은 없네. 태극단(太極丹)과 태청검법(太淸劍法)이라면 그들 역시 십 년 정도 폐관을 받아들이겠지.”
청명진인은 청하진인의 굳은 결심을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마교 대공자인데…….”
“일단 제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는 겐가?”
“일단 직설적으로 이야기해 볼 생각입니다. 그 아이 성품에 둘러대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 판단되었다면 그리 할 수밖에…….”
청하진인은 마현을 보지 못했으니 청명진인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이야기가 잘 된다면 제가 직접 산문 밖으로 배웅할 생각입니다.”
“안 된다면?”
“장문사형이 판단하여야겠지요.”
“그렇지,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지.”
청하진인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니라면……, 학방을 시켜 배웅시키게.”
“……?”
청명진인은 청하진인의 말에 숨은 칼날이 있음을 깨달았다. 어떤 종류의 칼날인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과 모르는 게 차라리 나은 것이 있는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장문사형.”
청명진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량수불.”
청하진인은 그저 눈을 감으며 도호를 나직하게 내뱉을 뿐이었다.
* * *
마현은 학방의 안내를 받아 청명진인의 처소가 있는 진무각으로 향했다. 진무각은 무당파의 무를 상징하듯 거대하고 견고한 전각이었다.
하지만 마현이 볼 수 있는 건 외부적인 모습일 뿐 무당파 제자들의 수련은 보지 못했다. 다만 우렁차게 들려오는 기합 소리만으로도 무당의 저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학방과 진무각주실에 들어섰지만 청명진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학방이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나갔다 다시 돌아왔다.
“사숙께서 급한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하시는군요. 곧 돌아온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되실 겁니다.”
그때 소동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청명진인이 자리를 비우기 전 혹시 먼저 찾아오면 차를 내주라 명했다고 했다.
그렇게 진무각주실 한편에 놓인 탁자에서 마현이 학방과 함께 차를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방문이 열렸다.
* * *
들어갈 때보다 더 무거워진 마음으로 장문인실을 나온 청명진인은 서둘러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가는 내내 학성과 마현에 대한 생각으로 청명진인의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다.
그 탓일까?
지끈거리는 두통이 느껴졌다.
청명진인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장문인실과 진무각이 그다지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왜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것인지…….
“손님이 학방 도인과 함께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무각 잡일을 하는 소동이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미리 와 있다는 소리에 갑자기 갈증이 느껴졌다. 입이 쩍쩍 마르는 느낌이 꽤나 불쾌했다. 그런 청명진인의 눈에 소동의 손에 들린 물주전자가 보였다.
“마실 수 있는 물이냐?”
그렇게 물었지만 청명진인은 소동의 대답을 듣지 않고 물주전자를 들었다. 그리곤 주둥이째 입에 물고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마셨다. 얼마나 급히 마셨던지 물이 그의 입가를 타고 흘러 도복을 적셨다.
“하아…….”
그제야 갈증이 가신 청명진인은 소매로 입가를 쓱 닦으며 집무실로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집무실 가까이 다가가자 작지만 마현과 학방의 대화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다시 목이 텁텁해지며 갈증이 느껴졌다. 청명진인은 불쾌한 갈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소동은 이미 총총 걸음으로 벌써 멀어져가고 있었다.
청명진인은 손을 들어 소동을 부르려다가 그만두었다.
애써 침을 모아 몇 번 목을 적신 후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현과 눈이 마주쳤다.
갈증으로 인한 불쾌감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가져다주는 짜증 때문일까?
청명진인은 웃음 짓는 자신의 얼굴이 어색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면경 앞으로 뛰어가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애써 꾹꾹 누르며 탁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미안하구나. 많이 기다렸느냐?”
“아닙니다.”
청명진인은 마현의 인사를 받으며 비어 있는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잠시 마현을 보던 청명진인은 학방을 향해 손을 가볍게 저었다.
“수고했느니라.”
청명진인의 축객령에 학방은 마현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취한 후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좀 더 편히 터놓고 마현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학방을 내보냈다. 그런데 그가 나가자 숨이 막힐 듯한 무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공기마저 더운 듯했다.
청명진인은 손으로 옷깃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길게 쉼호흡을 하며 기운을 일주천시키자 텁텁한 기운이 사라졌다.
흡족한 표정이 만들어질 때 청명진인은 마현과 눈이 마주쳤다. 아마도 자신의 모습이 좀 이상했을 거라 여겨지니 어색한 웃음이 만들어졌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너도 잘 지냈느냐?”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허리를 깊게 숙이는 마현의 모습에 청명진인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 깊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제 너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구나.”
“전처럼 편히 부르시면 됩니다.”
“전처럼 편하게라…….”
속으로 탄식처럼 머금은 말이었지만, 그 말은 그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마현은 청명진인의 행동이 조금 어색하다는 것을 느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비록 인연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무시해도 좋을 만남이었다. 단지 이 인연이 이어진 것은 학성이라는 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명진인의 어색한 눈빛을 마주하자 방 안의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그 무거운 분위기는 둘 사이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었다.
청명진인은 손바닥에 묻어나는 땀을 도복에 슥 문질러 닦았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도복 자락을 손으로 가득 움켜잡았다.
다시 목이 간질간질해졌다.
갈증이다.
청명진인은 이 갈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마교 대공자 신분인 마현 때문이었다.
‘참으로 못할 짓이로고……, 무량수불.’
청명진인은 눈을 감으며 속으로 도호를 읊었다.
하지만 해야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자, 자식 같은 제자 학성 때문에라도……, 그리고 무당파를 위해서라도.
다시 헤아려보니 마현 때문인지 알았던 갈증이 사실은 자신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현아.”
청명진인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마현을 불렀다.
“…….”
“내 편히 말하겠다.”
“그리하십시오.”
마현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잠자코 청명진인을 바라봤다.
“학성이……, 그러니까 정이 말이다.”
“…….”
청명진인이 어렵게 학성의 이름을 꺼내자 마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입을 연 청명진인은 쉽사리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손을 뻗어 학방이 마시다 남긴 찻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 버렸다.
“현아, 정이는 소중한 친구지?”
“……그렇습니다.”
마현은 애써 불안감을 삼키며 대답했다.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를…….”
청명진인은 입술을 자근거리며 망설이다 마침내 물었다.
“잊으면 안 되겠느냐?”
순간 마현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커졌다.
“생각해 보거라. 정파 후기지수, 그것도 차후 무당파를 이끌어가야 할 무당파 제자와 마교의 대공자 사이의 우정. 자네나 학성에게는 어떨지 모르나 세상은 그리 순수한 눈으로 보아주지 않을 것이야. 그 관계는 둘 다 앞으로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게야.”
“…….”
말을 마친 청명진인은 습관처럼 손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찻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
“미안하다.”
“…….”
마현은 굳어진 눈빛으로 청명진인을 쳐다보았다.
청명진인에게서 느껴지던 이유 모를 불안감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냥 자네 가슴 속에만 담아두면 안 되겠나?”
“청명진인님.”
마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격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냥 돌아가 주게.”
청명진인이 얼마나 어렵게 말을 꺼냈는지는 알겠다. 또 느껴진다. 하지만 마현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해는 되지만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 이유는 제가 마인이고, 학성이 정파인이라서 그런 겁니까?”
격앙되었던 마현의 목소리는 점차 차가워졌다.
청명진인은 그런 마현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피할 수 없으니 피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 눈빛에 마현의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마현의 눈에 청명진인과 과거 하르센 대륙의 스승과도 같았던 백마법사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유가 고작 그 잘난 흑백 양분론입니까?”
“…….”
청명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마현을 직시할 뿐이었다.
“가는 길이 다르다 하여 그게 잘못은 아닙니다. 그저 길이 다를 뿐……. 마(魔)가 곧 악(惡)이라고는 하지 마십시오. 악(惡)은 정(正)에도 있는 것이니.”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성을, 아니 정이를 생각해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인연이 나빠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청명진인은 마현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터질 듯 울분이 치솟아 오르나, 5년 전 진인에게 진 목숨 빚이 있으니 오늘은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마현은 말을 잠시 잘랐다.
그런 그의 눈에서 뜨거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번뿐입니다.”
그런 마현의 모습에 청명진인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안 돼!’
분명한 답을 받아야 했다.
서로 모른 척, 우정은 그저 가슴 속에만 묻어둔다고.
그리하지 않으면 곧 화산파에 있을 무림대회에서 둘은 만날 것이다. 천하의 이목이 화산파로 모인 그때 둘이 만나게 해서는 안 되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는 없느냐?”
청명진인의 눈빛에서도 강렬한 기운이 맴돌았다.
“학성에게, 아니 정이에게 안부나 전해주십시오. 그럴 것 같지도 않지만……,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마현은 차갑게 몸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문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마현을 그리 보낼 수 없는 청명진인은 몸을 날려 방문을 몸으로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