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6화
‘좋군.’
마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며 마현은 창밖으로 자그만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내일이면 만나는가?’
손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2년 전쯤 마교로 온 학방에 의해 손정에 대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손정이 아니라 학성이라고 불러야 하나?’
5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자신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물론 그건 손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에 빠져 있던 마현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네 명의 남녀가 ‘하하, 호호’ 웃으며 3층으로 올라온 것이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네 명의 남녀는 들뜬 모습이었다.
무림인이기에 마음껏 활보하는 것이 몸에 익어서 그런지, 그다지 주위를 의식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웃음소리는 단지 귀에 거슬릴 뿐 주위에 폐를 끼치는 정도는 아니었다.
마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볍게 음파차단 마법을 주위에 펼쳤다.
‘이제 조금 낫군.’
마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조용히 사색을 즐겼다.
마현 바로 옆 탁자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남궁세가의 대공자인 남궁혁과 이공자 남궁방, 그리고 제갈세가의 장녀 제갈영영, 소가주 제갈문이었다.
“그런데 말이죠, 이렇게 찾아가는 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제갈문이 조금은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문이 너는 그게 문제야.”
그런 제갈문을 향해 남궁혁이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
“모든 걸 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거.”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다 좋은데 가끔은 너무 답답하단 말이지.”
푸른 옷을 입은 남궁혁은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제갈 누이, 내 말이 맞지?”
“네, 맞아요.”
남궁혁의 말에 여인이 눈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 아, 정말…… 이제 혼인한다고 이렇게 동생을 몰아쳐도 되는 겁니까? 방아, 안 그러냐?”
제갈문은 누나인 제갈영영이 제 편을 들어주지 않자 흥분한 목소리로 남궁방을 향해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나한테 그걸 묻는 거야? 내 대답은 한 가지뿐이라는 걸 잘 알 텐데. 나는 지금 이 나이에 형님한테 얻어맞기 싫다고.”
“으아아아아!”
친구인 남궁방만은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거라 믿었던 제갈문은 그의 배신에 손으로 머리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푸하하하하!”
그 모습에 셋은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남궁세가와 제갈세가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곳에 있어서 매우 교류가 활발했다. 특히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백공과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묘 사이의 우정은 무림에서도 유명할 정도로 각별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자식들도 친해졌고, 그중 남궁세가의 대공자 남궁혁과 제갈세가의 장녀 제갈영영의 혼사가 오가면서 두 세가의 사이는 더욱 끈끈해졌다.
“그런데 가가. 우리가 너무 시끄러웠던 게 아닐까 싶네요.”
“응?”
술잔을 들던 남궁혁은 제갈영영의 턱짓에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 탁자에서 홀로 조용히 사색을 즐기며 술잔을 드는 마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겠군.”
“사과도 할 겸 나쁘지 않다면 합석하자고 할까요?”
남궁방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모두에게 물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남궁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방은 마현 앞으로 걸어갔다.
“실례하오.”
“…….”
마현은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못 들었나?’
남궁방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마현을 불렀다.
“실례하오!”
“…….”
하지만 마현은 여전히 묵묵부답인 채 창밖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남궁방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실례하오!”
남궁방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마현을 불렀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
마현은 여전히 창밖을 볼 뿐이었다.
‘얼씨구?’
남궁방의 미간이 좁아졌다.
마현이 태연한 얼굴로 술잔을 들어 술을 마셨던 것이다.
‘이거 날 무시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못 들은 거야?’
남궁방은 양손을 허리에 걸치며 마현을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르는 대도 못 듣는 걸로 보아 아마도 귀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려던 남궁방은 문득 심술궂은 생각이 들었다.
왠지 마현의 사색을 깨고 싶다는 생각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남궁방은 마현 곁으로 바싹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목소리에 약간의 내력을 실어서 소리를 질렀다.
“실. 례. 하. 오!”
마현은 언뜻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주위에 쳐놓았던 음파차단 마법이 낯선 청년, 남궁방으로 인해 깨졌음을 알았다. 이어 귀를 먹먹하게 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실. 례. 하. 오!”
마현의 낯은 절로 찌푸려졌다.
마현은 당연히 마땅찮은 눈빛으로 남궁방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남궁방 역시 마현 못지않게 못마땅한 눈빛으로 마현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무슨 사람이 그리 불러도 대답을 안 하는 게요? 내 말이 들리기는 하는 게요?”
‘아!’
마현은 순간 자신이 조금 전 음파차단 마법을 펼친 것을 떠올렸다.
“이런, 제가 실례를 저질렀군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보아하니 몇 번은 족히 부른 모양이었다. 마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하며 사과했다.
“에효! 난 또 귀가 먹은 줄 알았지 뭐요.”
그 모습에 남궁방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이거, 사과하러 와놓고 제가 사과를 받고 있으니…….”
남궁방은 짐짓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우리가 조금 시끄럽게 굴어 사과하러 왔는데 되레 제가 사과를 받아 버렸습니다.”
남궁방의 말에 자연스레 마현은 그 뒤쪽을 바라보았고 세 명의 남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이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건네오자 마현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나누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합석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모로 결례가 되었으니 저희가 대접을 하지요.”
남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현을 초대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마현은 사천당문에서의 일도 있고 해서 별로 정파의 후기지수들과 어울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물론 자신의 신분을 감추면 상관없겠지만, 왠지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단박에 거절하니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네요.”
제갈영영이었다.
그녀는 제갈세가의 인물이라고 하기엔 조금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대체로 신중한 반면 그녀는 직선적이고 불같은 성격을 가졌다.
그렇기에 제갈세가의 사람치고는 특이하게 쾌화(快花)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제갈세가에서는 잘 쓰지 않는 쌍검을 등에 메고 있었다.
“제갈 누이.”
남궁혁이 제갈영영의 이름을 불렀다.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여러모로 결례를 저질러 버렸습니다.”
남궁혁의 말에 남궁방은 머쓱해하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마현으로 인해 잠시 어색한 자리가 되었지만 이내 그들은 다시 유쾌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마현 역시 그대로 앉아 있기 머쓱해서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들로 인해 더는 조용히 사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뾰로롱, 뾰로롱.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산길.
무당파로 향하는 길이었다.
녹음이 푸르른 산길이라서 그런지 싱그러운 숲의 향이 몸도 마음도 상쾌하게 만드는 듯했다. 거기에 이름 모를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더해져 청초한 느낌마저 들었다.
메마른 신강의 땅만 보다가 이런 산길을 걸으니 색다른 맛이 느껴졌다.
‘확실히 본산이나 하르센 대륙의 숲과는 다르군.’
손정이 보고 싶은 마음에 단숨에 갈 법도 하건만 마현의 발걸음은 여유가 넘쳤다.
정오가 조금 안 된 시각.
저만치 몇몇 인물들과 작은 정자처럼 보이는 건물이 언뜻 보였다.
‘저곳이 해검지인가?’
좀 더 거리가 가까워지자 정자 위에 걸린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현판에는 마현이 생각했던 대로 ‘解劍池’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해검지라 불리는 자그만 정자 뒤에 그와 비슷한 규모의 건물이 하나 보였다. 그 앞에 네 명의 무당파 제자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아마 해검지에서 풀어 놓은 무인들의 무구를 보관하는 곳인 듯싶었다. 무당파에 대한 예로 무구를 풀어 놓았는데, 그것이 사라지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무량수불.”
마현이 해검지에 가까이 다가가자 한 무당파 제자가 다가왔다.
“무구를 가지고 계신지요?”
“혹 섭선도 무구가 되는지요?”
마현은 손에 들린 섭선을 보여주었다.
“섭선이라면 그냥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그리고 산문은 조금만 더 올라가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량수불.”
마현은 도호를 들으며 다시 위로 올라갔다.
얼마 가지 않아 산문이 보였고, 도인답지 않게 부리부리한 눈으로 산문을 지키고 서 있는 무당파 제자 둘이 보였다.
‘어지간히 번거롭군.’
마현으로서는 굳이 해검지와 산문의 경계를 나눈 것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당파에 오르는 객이라면 지켜야 할 사항이니 굳이 어길 생각은 없었다.
산문으로 들어서자 다른 무당파 제자 하나가 다가왔다.
“참배하러 오셨습니까?”
그 제자는 마현을 무인이 아닌 일반 참배객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아닙니다. 무당파 제자 한 분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무당파 제자요?”
마현의 말에 산문을 지키고 서 있던 도인이 눈을 빛냈다.
“어느 분을 찾아오셨습니까?”
“속세에서는 손정이라는 이름을 썼고, 지금은 학성이라는 도명을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 학성 사숙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현이 학성을 찾자 그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제껏 학성을 찾아온 이도 없었거니와 과거 거지 아이로 세상을 떠돌았기에 마땅히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좋은 비단옷으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서생이 학성을 찾으니 꽤나 놀라웠다.
지금 산문을 지키고 선 그는 그 사실을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5년 전 청명진인을 따라 사천으로 갔다가 학성을 처음부터 봤던 송천이었던 것이다.
송천은 마현의 얼굴을 좀 더 유심히 살폈다.
‘설마?’
송천은 그때 학성과 함께 있던 다른 거지 아이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라고 하기엔 지금 서생의 모습은 너무 말쑥했다.
하지만 혹시 몰라 송천은 궁금증을 드러냈다.
“혹…….”
“……?”
“공자께서는 5년 전 학성 사숙과 함께 있던 그 거지 아……, 흠흠. 아이가 맞습니까?”
막상 그렇게 물어놓고 송천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무량수불, 빈도가 실언을 한 모양입니다.”
그는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곤 사과를 했다.
마현은 그런 송천을 보며 언뜻 낯이 익다고 생각했지만 무당파에 아는 이라고는 청명진인과 학성, 학방뿐인지라 그저 상대가 착각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천의 말을 듣고서야 당시 청명진인을 만났을 때 젊은 도사 몇이 더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중하지 않은 인연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청명진인을 따라온 이들 중 한 명인가 보군.’
“아닙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그 거지 아이가 맞습니다.”
마현은 송천이 자신을 기억해 준 것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좀 더 수월하게 학성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하하, 제 눈이 틀리지 않아 다행이군요.”
송천은 산문 뒤에 서 있는 다른 제자를 불렀다.
“사제, 미안한데 내 대신 자리 좀 서줘.”
그러고는 마현을 데리고 산문을 넘어 무당파 내로 안내했다.
“참으로 때를 잘 맞춰 오셨습니다.”
“……?”
“학성 사숙께서 일 년 전에 폐관수련에 들어갔었습니다. 마침 오늘 나오시는 날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었다. 자칫 날짜가 어긋났다면 만나지 못할 뻔했다.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송천이 안내한 곳은 객당이었다. 객당 1층은 넓은 강당처럼 내부가 뻥 뚫려 있었다. 거기에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아마 무당파를 방문한 손님들을 위한 접견실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