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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04화 (104/351)

# 104

4화

“더 이상 접근은 불가하오.”

왕귀진이 마기를 드러내며 불취개와 옥허자 앞을 가로막았다.

“흥!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이 간악한 마교 놈들!”

옥허자는 이를 박박 갈아대며 왕귀진의 목을 향해 검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왕귀진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앞을 가로막고 서 있을 뿐이었다.

옥허자의 등장 때문이었을까.

잠시 망설이던 태일은 검을 뽑아들었다.

“본인을 원망하지 마라.”

“갈!”

태일은 마현의 말을 싹둑 자르며 탁자를 넘어 마현의 목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챙.

바람을 가르던 태일의 검은 마현이 아닌 당화평의 손에 가로막혔다.

“다, 당 소가주.”

“죄송하오, 태일 도장.”

당화평이 태일의 검을 옆으로 밀며 마현과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늘 같은 날, 피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마현을 쳐다보았다.

“마 공자께서도 마기를 거둬 주시지요.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당화평은 최대한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그때였다.

“아빠, 나 이거 선물로 받았다.”

당비연이 앙증맞은 손에 아기자기한 노리개를 들고는 당자성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당자성은 어색한 웃음을 띠우며 좋아하는 당비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에 마현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언제 마기를 내뿜었느냐는 듯 기세마저 다시 감추었다. 그리고 흑풍대를 향해 손을 저었다. 그만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그 뜻을 알아차린 흑풍대는 조용히 자리에서 사라졌다.

“옥 도인께서도 그만 자중하시지요.”

당자성은 당비연을 품에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불취개에게도 고개를 돌려 간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 안 해도 아오. 크흠, 뭐 이런 날까지 굳이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 필요야 없지. 그 대신 좋은 술이나 한 상 차려주시오.”

“하하하, 감사하외다.”

불취개의 말에 당자성이 부드러운 눈웃음으로 감사의 뜻을 전할 때였다.

“흥!”

옥허자의 매몰찬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럴 때일수록 정파의 기치를 누구보다 우뚝 세워야 하건만, 사천당문의 변절이 참으로 개탄스럽기 그지없소이다. 무량수불!”

날이 선 칼날 같은 목소리 뒤에 읊조린 도호 역시 날이 잔뜩 서 있었다.

“오, 옥 도인.”

“버선발로 반겨야 할 우(友)는 버리고 베어야 할 적은 반가이 맞이하는 사천당문의 위세가 얼마나 갈지 이 빈도가 우화하는 날까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겠소이다. 커험.”

분노로 시뻘게진 얼굴로 마지막까지 가시가 담긴 말을 내뱉고는 옥허자가 몸을 팩 돌렸다.

“그럼 이 불청객은 그만 사라지겠소이다. 태일아, 가자!”

옥허자에 이어 마현과 대치하고 있던 태일 역시 냉랭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검을 거뒀다.

마현을 향한 태일의 차가운 눈빛은 어느새 당화평에게로 향해 있었다. 태일은 스승인 옥허자와 별반 다름없는 거북한 기침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크흠…….”

하지만 그는 곧바로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마현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은 것이었다.

“태일 도장.”

태일은 고개만 돌려 마현은 매섭게 노려보았다. 마현은 그런 태일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마라.”

“…….”

태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런 태일에게 마현은 좀 더 얼굴을 드밀었다.

“그럼 넌 죽어.”

“이익!”

“어서 오지 않고 뭘 하는 게냐.”

마현의 도발에 태일이 울컥 노기를 띠었지만 곧 삼켰다. 옥허자가 심기가 불편한 목소리로 태일을 다시 불렀기 때문이다. 태일은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마현을 쏘아보고는 몸을 홱 돌려 정자를 내려갔다.

“당 가주, 오늘 즐거웠소이다. 그럼……. 영호야, 우리도 그만 가자.”

청성파의 속자제자들이 세운 문파인 속청검문의 문주 정용휘였다. 옥허자와 태일이 그렇게 자리를 뜨자 정용휘 역시 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르르 사람들이 자리를 뜨자 당자성은 조금 당황했다. 이유야 어떻든 설마 이렇게 모두 자리를 뜰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당자성은 사람들을 잡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불취개가 그런 당자성의 소매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잡아봐야 소용없음을 넌지시 알려준 것이다. 불취개는 청성파와 속청검문을 이끌고 당가를 빠져나가는 옥허자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나직하게 찼다.

“쯧쯧쯧, 딱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렇게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우르르 빠져나가니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자 당비연의 얼굴도 시무룩해졌다.

마현 역시 더 이상 있기가 불편해 떠나려 했다.

하지만 애처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당비연을 보니 그것도 못할 짓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옅은 웃음이 피식 터져 나왔다.

‘나도 꽤나 감성적으로 바뀌었군.’

과거의 자신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아니 그때였다면 애초에 당비연의 초대를 받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초대조차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원래 몸의 주인이었던 소년의 고운 심성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어둠의 부신, 키야의 뜻이겠지.’

“아저씨도 갈 거야?”

깊은 생각에 잠기면 하늘을 바라보는 마현이었다. 그런 습관으로 인해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자신의 시선을 회피한 거라 느꼈는지 약간은 울먹이는 눈동자를 하고선 당비연이 다가왔다.

마현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당비연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직 선물도 안 줬는데 어떻게 가겠니?”

마현은 당비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사이 잔치가 열리는 대연무장에 갔다 온 당문혜의 표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굳이 듣지 않아도 대충 그곳의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청성파와 속청검문이 빠져나갔으니 무척이나 썰렁할 것이다.

“화평아.”

당문혜에게서 대략 이야기를 들은 당자성은 당화평을 불렀다.

“예, 아버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잔치를 그만 파하거라. 남은 음식들은 골고루 싸서 나눠주고.”

“알겠습니다.”

그리 말하던 당자성은 불취개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설마 우리에게도 축객령을 내릴 심산이요?”

불취개는 그런 당자성을 보며 다분히 의도적으로 눈을 부라렸다.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어차피 이리 된 거 우리끼리 편히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리했소이다.”

“하하하, 오늘 내 사천당문의 술이란 술은 모조리 마셔주겠소이다.”

당자성의 말에 불취개는 가슴을 탕탕 치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그 모습에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던지 당자성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많이 편해 보였다.

당자성이 고개를 돌려 마현을 쳐다보았다.

“딸아이의 바람도 그렇고 하니 마 공자 역시 함께하는 게 어떻소?”

마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당자성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지금 이 상황은 자신 때문에 벌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는 당자성의 의연함에 마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요.”

“와아아아!”

마현의 대답에 가장 신난 것은 당비연이었다.

어찌나 좋아하던지, 마현의 바짓가랑이와 소매에 매달려 팔짝팔짝 뛰며 기뻐했다.

당자성은 조용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현을 붙잡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비연의 철없는 행동은 정파 무림인의 입장으로선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그런 마음을 알았을까, 불취개가 당자성의 어깨를 툭 쳤다.

“당 가주, 어여 술이나 주시오.”

“자, 다들 올라가시지요.”

상황이 그리되자 정자 위에 이미 식어 버린 상은 치워지고, 새로이 음식 한 상이 차려졌다.

그 상을 중심으로 당자성을 비롯해 당화평, 당문혜, 당비연과 불취개, 걸개아, 그리고 마현이 빙 둘러앉았다.

비록 새로이 온 이가 개방의 방주였지만 그는 옥허자처럼 대놓고 마현에게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때로는 호방한 모습으로 곧잘 마현과 대작하기도 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술자리는 제법 편했다.

그 술자리는 당비연이 잠이 들면서 끝났다.

* * *

어둠이 깔린 으슥한 밤.

투각, 투각, 투각…….

하얀 바람이 그려진 검은 깃발을 펄럭이며 사두마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흠…….”

사라지는 마차를 보며 불취개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에 짙은 주향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취개의 얼굴에서 술기운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흑풍마군 마현이라…….’

그를 알기 위해 함께 어울렸다.

‘그런데…….’

불취개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더 잃은 느낌이었다.

“걸개아야.”

“예, 스승님.”

불취개가 부르기가 무섭게 걸개아가 옆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어떻더냐?”

“……뭐가요?”

불취개의 뜬금없는 질문에 걸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

이내 불취개의 솥뚜껑만 한 손바닥이 걸개아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딱 하면 척 알아들어야지. 에잉, 제자라고 하나 있는 게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쯧쯧쯧.”

불취개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아무리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해도 그냥 뜬금없이 물으면 어찌 압니까?”

걸개아는 쪼그려 앉아 뒤통수를 매만지며 은근히 반항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걸개아야.”

“왜요?”

“맞을까? 타구봉이 어디 있더라?”

불취개는 허리에 꽂혀 있는 타구봉을 못 본 건지 이리저리 몸을 살폈다.

“히익!”

그 모습에 걸개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하하하, 스승님.”

걸개아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는 불취개 옆으로 바싹 다가가 마치 강아지처럼 몸을 비벼댔다.

“쯧쯧쯧.”

그런 걸개아의 모습에 불취개는 혀를 다시 한 번 차고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흑풍마군 말이다. 네가 보니 어떻더냐?”

“음…….”

걸개아는 턱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냥…….”

“그냥?”

“사람 좋아 보이던데요.”

순간 불취개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그리고?”

“그리고요?”

“…….”

불취개는 이마뿐만 아니라 미간마저 좁히며 걸개아를 쳐다보았다.

“그게 다인데요.”

“휴우…….”

불취개는 축 쳐진 어깨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은 이미 타구봉을 꺼내들고 있었다.

부웅!

다짜고짜 타구봉이 걸개아를 향해 날아갔다.

“헙!”

걸개아는 느닷없는 불취개의 행동에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땅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팍!

걸개아가 있던 자리에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먼지가 가라앉자 땅바닥에는 깊은 자국이 패어져 있었다.

“스, 스승님.”

“오늘 좀 맞자.”

불취개가 소매를 팔뚝 위로 걷어 올리자 우람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리고 동시에 신형이 안개처럼 휙 사라졌다.

퍽. 퍽. 퍽. 퍽!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오로지 걸개아와 그의 몸을 둘러싼 희미한 녹색 기광뿐이었다.

“으아아악! 아아악! 거, 걸개아 살려!”

잠시 후.

“후우…….”

쪼그려 앉아 있는 불취개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손에는 자그만 곰방대가 들려 있었다.

“흑흑흑…….”

그 앞에는 걸개아가 무릎을 꿇은 채 훌쩍이고 있었다.

“제자야.”

“흑흑흑.”

“대답 안 하지?”

“흐업! 넵, 스승님.”

“어찌 개방의 소방주나 되는 놈이 그냥 ‘사람 좋아 보이던데요’, 라고 할 수 있냐?”

불취개의 입에 물린 곰방대에서 빨간 빛이 만들어졌다가 사그라졌다. 그리고 하얀 연기가 불취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네가 생각해도 너무했지?”

“넵, 너무했습니다.”

“그래그래. 앞으로는 그러지 말거라.”

불취개는 어울리지 않게도 부드럽고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걸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걸개아는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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