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3화
당자성에게 있어 오늘은 좋은 자리다. 물론 부수적으로 독패장에 관한 일도 논의를 하고자 했지만 오늘은 자신이 사랑하는 막내 여식의 생일 잔칫날이었다. 굳이 이런 날 삭막한 분위기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당비연의 나이가 아직 어려 귀빈석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놀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런 딱딱한 분위기가 계속 지속된다면 아무리 당비연이 어리다 해도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당자성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또한 독패장과 마교에 대한 논의도 하고 싶었다. 잠시 고심하던 그는 곧 아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화평아.』
『예, 아버지.』
『너와 문혜가 마교 대공자를 네 거처로 데리고 가거라. 거기서 따로 어울리게 하여라. 그냥 그리 하기는 좀 어색할 테니 방금 온 셋과 함께라면 자연스러울 게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어찌되었든 초대받아 온 마교 대공자다. 네가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잘 처신하여라.』
『예.』
당화평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르신들과 함께 있어 분위기가 딱딱해진 것 같으니 우리 젊은이들은 따로 술 한 잔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그게 좋을 것 같구나. 안 그렇습니까?”
당자성의 의미를 담은 눈짓에 옥허자와 정용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당 가주, 뜻대로 하시지요.”
눈에 거슬리는 마현 역시 보지 않아도 되니 다들 순순히 당자성의 말대로 따라주었다.
“함께 가세나. 마 공자도 함께 가시지요. 이 당 모가 이번에는 제대로 대접을 하겠습니다.”
마현은 당화평의 말을 들으며 옥허자와 정용휘, 그리고 당자성을 잠시 쳐다보았다. 여기 있어봐야 심기만 거슬릴 뿐이다.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가야겠군.’
생각 같아서는 당장 불쾌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당비연을 생각해 참았다. 당비연을 보러 온 것이지 이들 때문에 사천당문에 온 것이 아니니까.
더욱이 당비연은 뭐가 그리 바쁜지 한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 터라 선물조차 아직 건네지 못했다. 그렇기에 마현은 자리를 옮겨 잠시 앉아 있다가 당비연에게 줄 선물을 주고 바로 일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러지요.”
마현은 당화평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당화평이 마현을 비롯해 사천성 내 후기지수들을 안내한 곳은 자그만 정자였다. 그 정자 위에 올라보니 어느새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젊은 사람들끼리 모였지만 불편한 기색은 여전했다.
마현은 그저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정자 아래 만들어진 연못에서 헤엄치는 비단잉어를 바라볼 뿐이었다.
문제는 애초에 마현을 삐딱하게 받아들인 태일과 유엽강이었다. 그 둘은 마현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느꼈는지 서서히 불쾌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나마 유엽강은 속청검문 소문주 정호영이 있어 자중하는 편이었지만 태일은 달랐다. 특히나 누구보다 마교에 대한 반감이 강한 옥허자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마현을 쳐다보는 시선엔 노골적인 적대감을 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현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 당황한 당화평은 서둘러 잔을 들었다.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니오. 다들 술 한 잔 듭시다.”
“그럽시다.”
당화평의 마음을 이해한 정호영이 잔을 들며 거들어 주었다. 그러자 유엽강 역시 마지못해 잔을 들었고, 그 모습에 당문혜는 조금은 딱딱해졌던 표정이 풀리며 함께 잔을 들었다.
“이런, 마 공자의 잔이 비었군요.”
잔을 들던 정호영이 마침 마현의 잔이 빈 것을 알고 술병을 들었다. 하지만 그 술병은 마현의 잔으로 향하지 못했다.
“빈도가 따르지요.”
태일이었다.
정호영은 잠시 갈등하는 눈빛을 보였지만 이내 술병을 태일에게 넘겼다. 술잔을 드는 이 시점에 굳이 술을 따른다고 하니 어쩌면 좀 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거라 판단한 까닭이다. 당화평이나 당문혜 역시 그렇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마현은 초대받은 손님이었다. 그렇기에 마음을 좀 누그러트리며 술잔을 들었다.
“고맙소.”
탁!
술병 주둥이와 술잔이 부딪히는 희미한 파음이 들렸다.
‘응?’
순간 마현의 눈썹이 비틀렸다.
마현은 눈을 들어 태일을 쳐다봤다. 그리고 비웃듯 미소 짓는 태일의 얼굴과 마주쳤다. 은은한 내력이 마현이 손에 쥔 술잔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태일은 그냥 술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술병에, 정확히 말하자면 술병에 담긴 술에 내력을 주입시켰다. 그리고 내력이 담긴 술을 마현의 술잔에 따르고 있었다.
‘후후후. 네가 제아무리 마교의 대공자라고 해도…… 나의 내력을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태일은 독패장을 조사하며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바로 마현에 관한 것이었다.
독패장을 멸문시킬 때 마현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그저 수하들에게 독패장을 멸문시키라고 명을 내린 것뿐이었다.
더욱이 마현의 나이 이제 갓 스물 정도라는 사실도 걸개아를 통해 알았다. 또한 무인, 아니 마인의 길에 들어선 지 이제 5년 정도라 했다.
비록 마교 대공자이기는 하지만 스물이라는 나이에, 기껏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를 이루어봤자 얼마나 이루었겠는가.
하지만 태일은 달랐다.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청성파에 입문해 무인의 길을 걸은 지 장장 20년이었다. 또한 옥허자의 과한 사랑으로 인해 상당한 영약을 복용해 그 나이에 가질 수 없는 내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십대에 파격적으로 일대제자 신분을 얻었다. 향후 청성파를 이끌어갈 차기 주자로 떠받들어지는 몇몇 제자 중 한 명인 것이다.
마현은 태일의 눈빛에서 자신을 깔보는 마음을 알아차렸다.
‘훗!’
내심 실소가 터져 나왔다.
쪼르르르.
술잔에 술이 찰수록 무게가 무거워져갔다. 작은 술잔에 어지간한 장사라도 버티지 못할 거력이 담긴 것이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둘의 표정 역시 달라졌다. 그것을 함께 동석한 이들이 모를 리 없었다.
“카운터카런트(Countercurrent)!”
마현은 태일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차갑게 말아 올렸다. 마현의 얼굴을 주시하며 내심 비웃고 있던 태일이 그런 마현의 표정을 놓칠 리 없었다.
마현의 역류 마법에 술잔에 가득 담겼던 술이 다시 술병으로 들어갔다. 분명 술병의 주둥이가 아래로 되어 있건만 마치 시간이 뒤로 흘러가는 듯했다.
태일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탁!
마현은 빈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태일 도인이라고 했나?”
마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별로 그대의 술을 받고 싶지 않군.”
마현은 손을 뻗어 직접 술을 따랐다. 그리고 그 술을 단숨에 입속에 털어 넣었다.
탁!
술잔을 내려놓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현이 사악한 눈빛으로 태일을 노려보았다.
마현의 동공에 태일의 당황한 눈, 그리고 자근자근 씹어대는 입술이 보였다.
“본인이 만만하게 보인 모양이군.”
태일을 바라보는 마현의 눈빛에서 은은한 마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아직 마기가 새어나오지는 않았다.
“이곳이 사천당문이라서, 정파의 무리 안에 본인이 홀로 있다고 해서 조용히 술잔이나 기울였다고 생각하나?”
마현은 다시 술병을 들어 술을 따랐다.
쪼르르르.
술을 따르는 소리일 뿐인데 그 소리는 탁자를 가득 덮었다.
“그리 보았다면 오판이야.”
마현은 술잔을 들어 입술에 적셨다.
이번에는 천천히 음미하듯 술을 들이켰다. 그리곤 잠시 후 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자는 말이야.”
마현의 눈빛에서만 맴돌던 마기가 서서히 밖으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고작 늑대 무리에 홀로 서 있다고 해서 겁을 먹지 않아. 배가 불러 잠시 잠을 청할 뿐이지.”
쏴악―!
동시에 마현의 몸에서 마기가 폭사되었다.
달그락, 따르르르.
마기의 파동에 의해 탁자가 부르르 떨렸다. 그로 인해 탁자 위에 놓인 그릇들이 요동치며 울어댔다.
마기에 반응한 태일이 기세를 끌어올리며 오른손을 검병에 올려놓았다. 여차 하는 순간 검을 뽑을 기세였다.
“뽑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마현의 마기에 살기가 담겼다.
“검을 뽑는 순간 너는 죽어.”
마현의 마기가 더욱 짙어졌다.
* * *
유쾌한 사천당문의 잔치.
고급 요리와 좋은 술이 가득한 사천당문의 대연무장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오늘의 주인공인 당비연은 아직 어린아이라 한시라도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오늘의 잔치를 더욱 활발하고 유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는 달리 귀빈석은 한없이 무겁기 짝이 없었다. 많은 말이 오갔지만 귀빈석에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쾅!
청성파 장로 옥허자는 결국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노여움에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을 하고 옥허자는 연신 거친 숨을 토해냈다.
“우리를 조롱하러 온 것이 분명하오.”
숨결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거칠기 짝이 없었다.
“아니면 무슨 의도가 있거나.”
속청검문 문주 정용휘가 옥허자의 말을 거들었다.
그들은 다른 두 문파였지만 사실 한 문파나 다름없기에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건 아닐 것이외다.”
당자성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지만 그 역시 얼굴이 굳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우리 아이에게서 마교 대공자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하지만 그런 의도…….”
“당 가주. 지금 무슨 말씀을 그리도 편히 하시는 겁니까?”
옥허자가 당자성의 말에 발끈했다.
당자성은 그저 속으로 한숨만 삼켰다. 자신 역시 옥허자의 입장이라면 저리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답답한 것만 따지자면 여기 이 자리에서 자신이 가장 답답할 것이다.
그런 당자성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느낀 탓인지 옥허자와 정용휘는 더 이상 그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자리는 더욱 어색해졌고 무거워져갔다.
한동안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끌시끌하던 사천당문 대연무장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좋구나!”
그리고 걸걸하면서도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허름한 누더기를 입은 장년인 하나가 한 손에는 술병을, 다른 한 손에는 닭다리를 물어뜯으며 귀빈석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개방 방주 불취개였다.
“하하하, 다들 오랜만이오. 우적우적, 벌컥벌컥.”
불취개는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술과 닭다리를 먹으며 귀빈석의 비어 있는 의자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앉는 것과 동시에 거지 특유의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아무도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좋은 날 분위기가 왜 이렇소?”
불취개는 손을 뻗어 음식물을 한 움큼 집더니 한입에 털어 넣고 다시 우물우물 씹어댔다.
“휴우…….”
불취개의 물음에 당자성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적우적……!”
음식을 씹을 때마다 끊임없이 움직이던 불취개의 턱이 딱 멈췄다. 동시에 눈썹 한쪽이 치켜세워지며 눈빛에 기광이 감돌았다.
불취개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당자성과 옥허자, 정용휘 역시 그러했다. 그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일제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대연무장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던 흑풍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흑풍대?’
불취개의 미간에 주름이 만들어졌다. 그와 동시에 몸을 날렸다. 상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과 흑풍대가 일제히 달려간 곳은 방금 마기가 터져 나온 곳.
바로 마현이 있는 자그만 정자였다.
당자성을 선두로 불취개, 옥허자, 정용휘는 단숨에 당가 내원에 위치한 정자에 도착했다.
정자에서는 마기와 청성파 특유의 도기(道氣)가 맞부딪히고 있었다.
‘흑풍마군?’
마기와 함께 검은 서생 옷을 본 불취개는 개방 방주답게 단번에 마현의 정체를 파악했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마기를 드러내느냐!”
불취개는 일갈을 터트리며 정자가 있는 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 보이던 취기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스르릉.
“과연, 이제야 간악한 이빨을 드러내는구나.”
옥허자 역시 불취개 옆으로 다가서며 서슴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마현과 대치하는 이가 그의 제자이기에 누구보다도 나설 명분이 확실했다.
그 순간이었다. 검은 그림자들이 불취개와 옥허자 앞에 내려섰다.
바로 흑풍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