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2화
일단 당과 같은 아이들이나 먹는 것을 찾은 것도 그랬지만, 그걸 먹으면서 걷는 모습이 상당히 파격적인 까닭이었다. 그 대상이 다름 아닌 마의 상징인 마교의 대공자이다 보니 더욱 그러했다.
당연히 웅성거림이 조금씩 높아졌다.
“이놈아! 빨라 안 오냐?”
그때 석단 위, 귀빈석에서 짜증이 묻어나는 호통이 터져 나왔다.
바로 걸왕이었다.
그 목소리에 마현은 당비연을 번쩍 안아들고는 한 걸음에 석단 위로 날다시피 뛰어올라갔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마현은 당비연을 내려놓으며 걸왕에게 다른 이들에게 하던 것보다 조금 더 깊게 허리는 숙였다. 마현이 걸왕을 부르는 호칭을 듣고 귀빈석에 앉아 있는 이들의 눈이 하나같이 동그래졌다.
걸왕이면 전대 고수이자, 현 개방 방주의 스승이며, 태상방주였다.
굳이 연배로 보자면 무림의 선배이기는 하지만, 정파의 최고 원로나 다름없는 걸왕에게 감히 선배라는 호칭을 쓴다는 건 무례한 일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이제 갓 소년 티를 벗은 이가 아니던가. 그런데 마현은 걸왕에게 선배라는 호칭을 자연스레 썼고, 무슨 생각인지 걸왕 역시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저, 대공자님.”
그런 마현 곁으로 한 중년 사내가 다가왔다.
“사천당문의 집사를 맡고 있는 상거이라고 합니다.”
“아……, 상 집사님이시군요. 마현이라고 합니다.”
그의 인사에 마현 역시 포권을 취하며 자신을 밝혔다.
“대공자와 함께 온 수하 분들은 어찌해야 할지…….”
상거이는 눈을 돌려 사천당문 정문에 오와 열을 맞춰 마치 석상처럼 서 있는 흑풍대를 가리켰다.
“자리를 만들었지만 도통 움직이지 않으셔서…….”
상거이는 소매로 땀을 훔치며 말끝을 흐렸다.
그사이 귀빈석과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 천막 하나가 쳐졌고, 그 아래 흑풍대원의 수와 똑같은 서른 개의 상이 차려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마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흑풍대주.”
마현의 부름에 왕귀진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마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예, 주군.”
“자리하라.”
“명!”
짧게 답한 왕귀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흑풍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특별히 왕귀진의 명이 있지 않았지만 대원들은 바로 마련된 자리로 성큼성큼 발을 놀렸다.
“그대도 자리하라.”
“명!”
마현의 명에 왕귀진 역시 석단에서 내려와 비어 있는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흑풍대가 모두 자리를 잡자 마현은 사천당문 집사 상거이를 향해 다시 부드러운 웃음을 보인 후 귀빈석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험험.”
어색함이 감돌자 당자성이 나직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사천당문 가주 당자성이라 하오. 조촐한 자리에 이리 와주셔서 감사하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교 대공자 마현이라고 합니다.”
마현은 당자성의 인사에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하며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귀빈석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도 다시 한 번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자 귀빈석에 있던 청성파 장로 옥허자, 속청검문 문주 정용휘 역시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밖에 이미 얼굴을 알고 있는 당화평과 당문혜, 그리고 정호영은 가볍게 포권을 취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인사가 끝난 후 귀빈석은 무거운 침묵만 맴돌 뿐이었다.
마현은 자신을 향한 이들의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거북함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청성파 장로 옥허자와 속청검문 문주 정용휘의 시선이 매우 따가웠다. 드러내놓고 반감을 표출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에서는 상당한 적대감이 느껴졌다.
마치 적과의 동침을 연상시키는 듯한 묘한 침묵을 유일하게 깨트리는 것은 젓가락이 접시에 부딪히며 내는 작은 소음과 음식을 씹는 게걸스러운 소리뿐이었다. 바로 그 소리의 주인은 걸왕이었다.
걸왕은 마현의 합석으로 인해 불편해진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먹을 것을 입에 넣었다.
“다들 눈에 힘 빼고 먹어라. 음식 식는다. 쩝쩝쩝.”
걸왕은 말을 하는 와중에도 젓가락질을 쉬지 않았다.
마현은 피식 웃으며 걸왕의 말에 따라 앞에 놓인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곤 차려진 음식들을 하나하나 맛을 보았다. 사천 요리 특유의 매운맛과 감칠맛이 느껴졌다.
음식은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입에는 맞소이까?”
당자성이었다.
그 역시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엿보였지만 다른 이들보다는 나았다.
“맛있군요.”
마현은 흡족해하며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크흠…….”
그때 속청검문 문주인 정용휘의 헛기침이 들려왔다. 상당히 불편하고 언짢아하는 음색이었다. 그것이 마현의 심기를 긁었다.
좋은 날 초대받아 온 것인 만큼 어지간하면 불편해도 참고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마현은 들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정용휘의 눈을 직시했다. 부드러웠던 표정은 여전했지만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속청검문의 문주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만?”
정용휘 역시 마현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잘 되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좀 더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내비쳤다.
“본인에게 불만이 있습니까?”
마현의 얼굴에선 부드러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무례한!”
그때 정용휘 옆에 앉아 있던 옥허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노성을 터트렸다. 그 목소리에 마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정용휘를 지나쳐 옥허자에게 향했다.
옥허자는 냉랭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수염까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적대감이 큰 듯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과거 30여 년 전, 정마대전 때 가장 치열했던 곳이 바로 이곳 사천성이었다. 사천성을 지키던 네 무가 중 두 곳, 정파의 명문이었던 아미파와 점창파가 멸문을 했을 정도이니, 가히 그때 사천성은 한 폭의 지옥도나 마찬가지였다고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멸문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사천당문과 함께 사천성을 간신히 지켜낸 청성파의 피해는 생각 이상으로 극심했다.
5년간의 정마대전이 끝나고 근 25년 이상의 시간 동안 오로지 문파의 재건에만 모든 힘을 쏟아온 청성파였다. 그 피해가 어느 정도일지, 그리고 마교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클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옥허자는 그 정마대전을 몸소 겪은 이였다.
옥허자뿐만 아니라 현재 정파를 지탱하는 수뇌부들 상당수가 당시 정마대전을 경험한 이들이다.
비록 지금은 밀약에 의해 평화적인 시기라고는 하지만 그때의 참혹했던 정마대전은 살아남은 자들로선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어제 마현이 독패장을 멸문시켰다.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이곳 사천당문으로 온 것이다.
당연히 옥허자의 눈빛에 적대감이 묻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옥허자와 정용휘의 적대감으로 인해 귀빈석은 가뜩이나 무거웠던 분위기가 그로 인해 더욱 침중해졌다.
당연히 마현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탁!
그때 걸왕이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큰 소리로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에잉, 가뜩이나 입맛 없는데…….”
걸왕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귀빈석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지고 딱딱해졌다.
“차라리 한 판 붙어라. 미적대지 말고.”
막상 멍석을 깔면 놀지 못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다.
“크흠…….”
“험험…….”
걸왕이 그리 말하자 옥허자와 정용휘는 무안한 듯 헛기침을 내뱉으며 그제야 마현에게서 시선을 뗐다.
“에잉, 배알도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혀를 차는 걸왕의 눈이 그 둘을 잠시 비켜가더니 이내 동그랗게 변했다. 걸왕이 쳐다보는 시선 끝에 청년 셋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한 청년은 도인 복장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청년은 자주색 무복을, 그리고 마지막 청년은 한눈에 봐도 때가 꼬질꼬질한 옷에 개기름이 반질반질한 얼굴의 거지였다.
도인 복장을 한 청년은 청성파의 일대제자이자 현재 상석에 있는 옥허자의 제자 태일이었다. 그리고 자주색 무복을 입은 청년은 속청검문 문주의 제자이자 소문주 정호영의 사형인 유엽강이었다. 마지막으로 거지 청년은 개방의 방주 불취개의 제자이자 소방주인 걸개아였다. 셋 모두 각 문파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후기지수였다.
그들은 마교에 의해 단숨에 멸문한 독패장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다.
“어? 대사부님!”
거지 청년이 걸왕을 보자 그 자리에서 훌쩍 몸을 날려 귀빈석 앞으로 뛰어 올라왔다.
“여기 계셨습니까?”
거지 청년의 말에 걸왕은 긴장한 듯 몸을 반쯤 일으켜 얼른 주위를 살폈다.
“불취개, 그놈도 왔냐?”
“스승님 말씀이십니까, 대사부님?”
걸왕은 연신 주위를 살피며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걸개아의 미진한 대답에 소리를 빽 질렀다.
“빨리 대답하지 못해? 앙?”
목소리에 왠지 초조함이 느껴졌다.
“내일쯤 사천성에 도착한다는 소식만…….”
“정말이냐?”
걸왕은 눈을 가늘게 하며 걸개아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걸개아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제가 어찌 대사부님에게 거짓을…….”
“흠…….”
걸왕은 그런 걸개아의 얼굴을 계속 째려보았다.
“정말입니다, 대사부님.”
그 시선에 걸개아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나는 바빠서 이만 간다. 마 가야, 다음에 보자.”
“대, 대사부님.”
걸개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걸왕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걸왕의 목소리만 남아 울려 퍼질 뿐이었다.
걸왕이 사라지자 걸개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지며 죽을상으로 변했다.
“마, 망했다.”
걸개아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실 개방 방주 불취개는 반각 정도면 사천당문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불취개는 걸왕이 사천당문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걸개아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걸왕을 잡아두고 있으라는 엄명을 내렸다.
불취개가 어떤 인물인가.
별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취개는 술로 당할 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술을 잘 마셨다. 술을 잘 먹는 이들 중엔 간혹 그걸 자랑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성격이 걸걸한데다 한 번 화가 나면 폭발하듯 엄청난 기세로 분노를 터트린다. 개방 방주 불취개가 그랬다.
분명 불취개는 스승인 걸왕이 눈치를 채고 도망간 것을 알아차리면, 그를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한 걸개아에게 무섭게 화를 낼 것이다. 그 불같은 성격으로 보아 아마 죽지 않을 정도로 맞을 것이 틀림없다.
“……난 죽었다.”
크게 낙담한 걸개아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사이 태일과 유엽강이 옥허자와 정용휘 앞으로 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스승님.”
태일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아니다, 괜찮다.”
옥허자는 마현으로 인해 잔뜩 구겼던 표정을 부드럽게 풀며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독패장은 생각 이상으로 처…….”
태일은 옥허자와 정용휘, 그리고 당자성 등 귀빈석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독패장에서 직접 보고 온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태일의 보고를 옥허자가 막았다.
“됐다. 나중에 보고하거라.”
태일이 이상함을 느끼고 두 눈을 크게 뜨며 스승 옥허자를 쳐다봤다.
유엽강 역시 궁금증이 가득한 눈동자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독패장을 보고 온 것은 명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 명에 따라 독패장에 관한 것을 이 자리에서 이야기한 후 차후의 일을 상의하고자 모인 것이다.
하지만 곧 두 사람은 왜 옥허자가 보고하려는 것을 막았는지 알 수 있었다. 걸개아가 옆구리를 살짝 건드리며 귀빈석의 한쪽을 눈짓으로 가리킨 것이다.
걸개아가 가리킨 곳에는 낯선 청년 하나가 앉아 있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태일은 몸을 돌려 마현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청성파 일대제자 태일이라고 합니다, 무량수불.”
“속청검문의 유엽강입니다.”
둘의 인사에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둘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마현입니다.”
마현은 몸을 돌려 걸개아를 향해서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마현이라고 합니다.”
마현의 부드러운 소개에 걸개아의 얼굴은 굳어졌다. 무겁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는 재빠르게 마현의 위아래를 훑었다.
검은 비단으로 지어진 서생 옷에 검은 섭선.
그리고 이름이 마현.
개방의 제자답게 걸개아는 그 즉시 한 인물을 떠올렸다.
“흑풍마군?”
걸개아의 음성에 태일과 유엽강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역시 개방의 제자군요.”
“……걸개아라 하오.”
걸개아는 잔뜩 굳어진 표정만큼이나 딱딱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셋의 등장으로 인해 잠시 부드러워졌던 분위기는 다시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