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24화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는데 같이 가지 않겠습니까?”
뜬금없이 구경거리를 입에 담자 걸왕은 그저 마현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걸왕은 마현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놈들을 잡으러 가는 것이냐?”
“마교의 대공자인데 단순히 잡으러 가겠습니까?”
“……?”
“이 세상에서 지우러 가는 것입니다.”
마현은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정마(正魔)를 떠나 악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클클클, 마교 대공자의 입에서 그 말을 들으니 참으로 웃기구나.”
“마는 마일뿐, 악은 아니지요. 안 그렇습니까, 걸왕 선배님?”
“…….”
걸왕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현은 덧붙였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어둠에서 악이 자라는 것이라 이 거지는 생각한다.”
걸왕은 마현의 말을 되받아쳤다.
“저는 빛에서 지독한 악을 겪었습니다.”
마현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백마법사들을 떠올렸다. 마현의 눈동자에서 분노에 휩싸인 살심이 투영되었다. 원한이 가득한 마현의 눈빛에 걸왕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경험에서 나온 원한 어린 살심이었다.
‘흠…….’
걸왕은 속으로 무거운 신음을 삼켰다.
‘빛에서 자란 지독한 악이라…….’
걸왕은 얼굴을 찌푸린 채 마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현을 따라 걸음을 내딛던 걸왕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갔다. 마현이 서천성 북쪽, 그러니까 정파 세력권으로 들어섰던 까닭이다.
설마 천인공노할 짓을 정파 쪽 문파가 저질렀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렇기에 마교 대공자 신분인 마현을 따라나선 것이었다.
‘아니야, 정파는 아닐 거야. 우연히 정파 세력권 내에서 활동하는 놈들일 수도…….’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무참히 깨졌다.
마현이 걸왕을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독패장이 훤히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던 까닭이다.
‘서, 설마…….’
걸왕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은은한 노기를 담아 기운을 내뿜었다.
그가 마현을 향해 내력이 담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네가 말한 그놈들이 독패장이라는 소리냐?”
“그렇습니다.”
마현은 독패장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 믿을 수 없다!”
걸왕은 거칠게 마현의 말을 내쳤다.
“알고 보니 정파였다. 그래서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마현은 걸왕의 말에 차갑게 반문했다.
“네 말이 맞는다고 하자. 이건 정파 내부의 일이다. 그러니 빠져라.”
걸왕은 마현의 말이 맞다면 이건 정파 내 치부라고 생각했다. 그런 치부를 마교의 손에 맞기고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정파 내부의 일일 수도 있으나 본교와도 관련된 일이기도 합니다.”
“……?”
“자신들의 짓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저들이 본교를 모함한 죄.”
“그것뿐이냐?”
걸왕의 목소리는 좋지 않았다.
“또한 저들이 익힌 마공은 본교에서도 금서로 취급하는 금마공, 극양천혈공. 반드시 본교의 손으로 회수를 해야 합니다.”
극양천혈공이라는 단어에 걸왕의 몸이 흠칫했다.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마공이었다. 그 마공이 왜 마교에서도 금마공으로 지정됐는지도 말이다. 물론 금마공에서 풀렸다는 것은 알지 못했지만.
일단 극양천혈공이라는 단어 자체만으로 걸왕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미, 믿을 수 없다.”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진실인지 아닌지 눈으로 보실 테니.”
걸왕은 다시 한 번 마현의 말을 부정하려 했다.
“혹시 나를 이용하려는 짓이면 내 너를 용서치 않으리라.”
“지금 제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정마대전이 일어나겠지요.”
정마대전이라는 단어에 걸왕은 입술을 씹으며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정마대전을 피하기 위해 나를 데리고 온 것이냐?”
그제야 걸왕은 마현의 손에 놀아났음을 깨달았다.
마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아무리 걸왕이라도 더 이상 어떻게 할 노릇이 없었던 까닭이다.
“밥값은 하셔야지요.”
걸왕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원래 며칠 후 손을 보려 했지만 걸왕 선배를 만나니 질질 끌 이유가 없어지더군요.”
“이, 이노옴!”
결국 걸왕은 노기를 참지 못하고 내력을 폭사시켰다.
“독패장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제가 다시 설명을 해드려야겠습니까?”
마현 역시 마력을 내뿜으며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렇게 두 기운이 부딪혔다.
분하지만 걸왕은 내력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정마를 떠나 독패장이 한 짓은 결코 인간의 탈을 쓰고선 저지를 수 없는 일이었다.
“흑풍대주.”
“예, 주군.”
마현 앞에 왕귀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공서를 회수하고, 독패장을 지워라!”
* * *
콰광!
독패장의 정문이 산산조각 났다.
부서진 정문으로 흑풍대가 들이닥쳤다. 그들 중심에는 흑사신이 있었다.
댕댕댕댕댕―
적의 침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독패장 안을 가득 채웠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정문 앞 공터로 독패장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독패장 장주 독모진을 비롯해, 소장주 독무웅, 그리고 독패장의 상징이자 힘인 패권단, 패장단, 패수단의 세 단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독패장을 침입하다니, 네놈들은 누구냐?”
독모진은 내력을 발산시키며 일갈을 터트렸다.
그들 앞으로 왕귀진이 나섰다.
“마교 대공자 흑풍마군의 직속 무력단체인 흑풍대다.”
“마교?”
왕귀진의 말에 독모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독모진의 몸에서는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살기를 담은 기운이 폭사되었다.
“마교가 본 독패장을 이리 쳐들어온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잔악한 심성을 드러낸 것이냐?”
왕귀진은 그 어떤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본 흑풍대의 주군인 대공자 흑풍마군의 말씀을 전한다.”
“갈! 감히 본 독패장을 무시하는 것이냐?”
독무진이 날카롭게 일갈을 다시 터트렸지만 왕귀진은 담담히 자신의 말만 이어갔다.
“일(一),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독패장이 그 짓을 덮기 위해 본교를 향해 화살을 돌린 죄, 멸!”
왕귀진의 말에 독무진의 몸이 번개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다가 석상처럼 뚝 굳었다.
“이(二), 본교에서도 금서로 취급하는 극양천혈공을 익힌 죄, 극양천혈공을 회수함과 동시에 독패장 멸!”
독패장이 그리 감추고 싶었던 치부가 흑풍대주 왕귀진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독모진의 눈동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르르 요동쳤다.
“갈! 감히 마교에서 저지른 짓을 본 독패장에게 뒤집어씌우려 하다니!”
패수단 부단주가 왕귀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왕귀진의 눈에서 마기가 폭사되더니 발밑으로 떨어졌다.
땅속으로 스며든 왕귀진의 마기는 패수단 부단주의 몸을 향해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땅속에서 하얀 손뼈가 불쑥 튀어 올라 그의 발목을 잡았다.
푹!
“헙!”
푹 푹 푹!
패수단 부단주가 들이마시는 헛바람 소리보다 더 빠르게 세 개의 다른 하얀 손뼈가 땅속에서 튀어나와 그의 다른 발목과 종아리를 잡았다.
“뭐, 뭐야…….”
놀라기도 잠시, 패수단 부단주의 몸은 땅 아래로 끌려들어갔다.
“크아아…….”
결국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패수단 부단주의 몸이 땅속으로 끌려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끌려들어갔던 맨흙 바닥에 피가 서서히 퍼지며 흙을 붉게 적셨다.
“부, 부단주님!”
“부단주님!”
그 모습에 패수단 단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놈들!”
다섯 명의 패수단 단원들이 일제히 왕귀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채 한 걸음도 내딛기 전.
푹 푹 푹 푹 푹!
“크으…….”
“으아…….”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그들의 몸 역시 땅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곳에서는 어김없이 붉은 피가 솟아올라 흙을 붉게 적셨다.
“흑풍대주, 인마!”
그때 흑도가 잔뜩 신경질이 난 목소리로 왕귀진을 불렀다.
“죽고 싶냐?”
“죄송합니다, 흑도 어르신.”
“아 씨, 아까운 놈 여섯이나 줄었네. 조심해.”
“주군께서 독패장 장주, 소장주, 그리고 총관은 살려두라 명했습니다.”
“알아, 인마! 빨리 비키기나 해!”
“예.”
왕귀진은 손을 들어올렸다.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원진을 짜라.”
“명!”
“명!”
왕귀진의 명에 의해 흑풍대는 간격을 벌려 독패장을 둘러쌌다.
“이제야 우리 차례인가?”
흑도는 도를 들며 혀로 도신을 핥았다.
그의 검은 도에서 시커먼 마기로 만들어진 도강이 피어올랐다.
“오랜만에 날뛰어볼까? 크크크!”
나머지 세 흑사신의 몸에서도 독패장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마기가 폭사되었고, 그 마기는 단숨에 독패장을 집어삼켰다.
* * *
“같이 가겠습니까?”
독패장의 문이 부서지는 것을 본 마현은 걸왕을 쳐다보며 의중을 물었다.
“같이 가서 꼭 내 눈으로 봐야겠다.”
걸왕은 마현에게 다시 기세를 내뿜으며 말했다.
“만약 네놈의 말이 틀리다면 나는 정마대전이 일어난다 해도 네놈을 죽일 것이다.”
“그럼 가시죠.”
마현은 옆으로 피하며 길을 만들어 주었다.
“오냐!”
걸왕은 그런 마현을 지나쳐 먼저 발걸음을 내딛었다.
마현은 산보 나온 서생처럼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독패장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걸왕은 마현과 달랐다.
연신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독패장으로 들어간 이들은 대략 서른 명 정도였다. 아무리 뛰어난 마인들이라고 해도 단지 서른 명 정도로 사천성에서 한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독패장을 무너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인들이 더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아무도 없었다.
걸왕은 슬쩍 눈을 돌려 마현을 쳐다보았다.
여유가 넘치는 얼굴이었다.
‘서른 명만으로도 자신이 있다는 소리인가?’
그러는 사이 마현과 걸왕은 독패장 가까이 다가섰다.
독패장 가까이 다가가자 혈향이 코끝을 찔렀다.
걸왕은 평생 무림에 살았어도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피 냄새에 표정을 굳히며 마현과 함께 독패장 안으로 들어갔다.
독패장 안은 말 그대로 시산혈해였다.
마현은 표정의 변화 없이 중앙으로 걸어갔다.
“주군!”
마현을 본 왕귀진이 군례를 취했다.
“주군을 뵈옵니다!”
“주군을 뵈옵니다!”
그러자 흑풍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흑사신은 걸왕이 오기 전 스스로 귀환한 상태라 마현을 맞이한 것은 흑풍대뿐이었다.
마현은 흑풍대의 인사를 받으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독패장 안에는 장원의 무인들 이외에 평민들의 시체도 보였다. 마현은 그 시체를 보며 낯을 찡그렸다.
“이미 죽어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마현은 고개를 돌려 평민들의 시체를 살폈다.
생혈이 빨려 죽은 모습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치 목내이(木乃伊; 미라)처럼 뼈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죽어 있었다.
“생존자는 없나?”
마현이 왕귀진을 향해 묻자마자 독패장 한구석에서 십여 명의 여인들이 흑풍대 십여 명과 함께 걸어 나왔다. 공포에 젖어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을 이끌던 철용이 마현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한 뭉텅이의 종이를 넘겼다.
“극양천혈공입니다.”
마현은 극양천혈공을 받아들며 그 마공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마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본교에서도 특별 취급되는 마공서가 정파로 흘러들었다니…….’
그냥 지나치면 아무 일도 아니지만 왠지 찝찝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현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일단 본교에 보고서를 올려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