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22화
“흑풍대주.”
마현의 부름에 왕귀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풍대를 이용해 오늘 밤 사천성을 살피라.”
마현은 호태악이 올린 보고서 한 장을 왕귀진 앞으로 내밀었다.
“아녀자들이 실종될 확률이 높은 곳들로 뽑은 것이다.”
왕귀진은 마현의 명을 들으며 그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삼백의 스켈레톤이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명!”
마현의 명을 받은 왕귀진의 신형은 안개가 사라지듯 다시 몸을 감추었다.
왕귀진은 흑풍대를 이끌고 사천성 북쪽 빈민가를 중심으로 흩어졌다.
남들의 이목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은 흑풍대원들은 투명화 마법으로 다시 신형을 완벽히 숨기고 기척을 지웠다. 그들이 숨은 장소를 중심으로 땅거죽이 들썩거렸다.
마치 두더지가 땅속에서 땅을 파고 지나가는 것처럼 땅거죽은 흑풍대원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조용히 눈을 감고 스켈레톤들과 교감을 나누던 흑풍대 부대주 철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철용은 급히 한 구의 스켈레톤으로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 스켈레톤의 눈을 통해 철용은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다.
무림인이 아니고서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한 기척이 마을 안으로 들어서는 게 느껴졌다. 이 평민촌은 사천당가의 직접적인 세력권 안에 있어 이제껏 실종된 여인이 없는 곳 중의 하나였다.
달빛마저 스며들지 않는 담벼락 그림자 속.
스켈레톤 하나가 땅속에서 머리를 반쯤 내민 채 스산한 안광마저 감추고 있었다. 기척을 숨긴 채 평민촌으로 숨어 든 십여 명의 그림자를 스켈레톤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철용이 스켈레톤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평민촌으로 들어선 십여 명의 그림자들은 하나같이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근 20여 장 이상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철용의 입언저리가 말려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철용은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하필 이 시기에 마기가 터질 것은 뭐람.”
“시끄럽다!”
십여 명의 인물들 중 하나가 불만을 터트리자 그들을 이끄는 한 인물이 나직하게 호통을 쳤다.
“이럴수록 더욱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냐?”
이어지는 호통에 모두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크흐흐, 이 위기만 넘기면 우리는 사천당문을 넘어 사천성의 진정한 패자가 된다.”
복면 사이로 뚫린 눈동자에서 붉은 마기가 감돌다 사라졌다.
“단주님, 빨리 합시다. 아랫도리가 벌써부터 후끈거립니다요, 크크크.”
“어허!”
“뭐 어떻습니까요? 어차피 피가 모두 빨려 죽기 전에 그저 맛 한 번 보는 건데.”
호통을 친 자나 대수롭지 않게 음담패설로 응답하는 이들이나 눈동자에 욕정이 차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농담은 여기까지다. 네 명씩 조를 짜서 최대한 어린 여자를 잡는 즉시, 곧장 귀가하라.”
“알겠습니다요, 으흐흐흐.”
“단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최대한 어린년으로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곧 네 명씩 짝을 지은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열 구의 스켈레톤이 어둠 속에 숨어서 살피고 있었다.
“역시 독패장이었군.”
마현은 왕귀진의 보고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여인들의 피가 필요한 마공이라…….”
마현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어느 정도 안목이 생겼다지만 여전히 무공에 대한 지식이 그리 많지 않아 마현은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일단 어떤 마공인지 먼저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겠군.’
마현은 잠시 고민하다 흑사신을 소환했다.
곧바로 흑사신이 땅바닥을 뚫고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부탁이 있다.”
“쳇! 재미있는 일에는 부르지도 않고, 부탁은.”
흑도는 추도영을 죽일 때 자신을 부르지 않아 마음이 토라져 있었다.
“너희들의 존재는 본교에서 아무도 몰라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 대신 며칠 내로 한바탕 신나게 놀 수 있게 해주지.”
“흥!”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지만 흑도의 귀는 이미 마현을 향해 팔랑거리고 있었다.
“뭔데 그러나?”
그런 흑도를 무시하고 흑권이 물었다.
“정파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 버려야 할 일이 생겼다.”
마현의 말에 흑권의 눈이 조금 커졌다. 쉽게 받아들일 말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마공을 익혔다는 점.”
“약하군.”
“그 마공이 피를 필요하다는 점.”
“금마공(禁魔功)인가?”
흑권의 켜졌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아마도…….”
마현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감히 본교를 깔보았다는 점. 그게 그 문파가 이 세상에서 지워져야 할 이유다.”
마현은 옆에 서 있는 왕귀진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흑권에게 눈을 돌렸다.
“아무래도 흑풍대의 스켈레톤들은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번엔 너희들이 좀 수고를 해주었으면 한다.”
“뭐? 본교를 무시해?”
마현의 말을 안 듣는 척하면서도 다 듣고 있던 흑도는 과장되게 목소리를 키웠다. 그리고는 마현 앞으로 걸어와 서탁에 양손을 짚으며 말했다.
“감히 본교를 무시하다니……, 내 이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
흑도는 거센 숨을 코로 내쉬었다. 마현은 그런 흑도를 올려다보며 입가를 말아 올렸다.
“해 주겠나?”
“크크크, 해주지. 오랜만에 몸을 풀 수 있는 기회……. 하하하, 그게 아니라 감히 본교를 무시했으니 본좌가 가만있을 수 있나?”
뜨끔했던지 흑도는 뒤통수를 긁으며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마현은 고개를 돌려 나머지 세 흑사신을 쳐다보았다.
“본교와도 관련된 일이니 그 부탁을 받아들이겠네.”
“한 번쯤 새로 얻은 몸을 움직이고 싶었는데 잘 되었군. 본좌 역시 받아들이겠네.”
흑권과 흑검은 흔쾌히 마현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흑창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마현은 마치 유람 나온 서생처럼 섭선을 살랑살랑 부치며 사천성 성도 중앙 대로를 걷고 있었다.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 놓고 사천성 성도 중앙 번화가를 걷는 이유는 독패장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에 띄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목적지 없이 한가롭게 걷던 마현의 눈에 당과를 파는 노점상이 보였다. 마침 입이 심심하기도 하고 당과가 워낙 맛있던 까닭에 노점상으로 발걸음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무심코 인사를 건네던 노점상 주인은 고개를 들어 마현을 보고는 금세 아는 체 했다.
“아이구, 또 오셨네요.”
“당과 맛이 좋아 다시 왔네.”
“사천성 안에서 저희 맛을 따라올 곳은 아무 데도 없습지요. 사실 어른들 역시 심심찮게 와서 드십니다요.”
“그런가?”
“아참! 혹 몰라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요.”
“뭔가?”
“모레는 제가 장사를 하지 않습니다요.”
“모레?”
마현의 말에 노점상 주인은 쑥스러운 듯 뺨을 긁었다.
“그때 보셨던 꼬마 아가씨 있잖습니까요?”
“기억하네.”
마현은 당비연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가씨 분이 그 유명한 사천당가 여식이십니다요. 그 아가씨 생일이 모레입니다요.”
“그거랑 자네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날 사천당가에서 당과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죠. 하하하.”
평범한 노점상 주인이 사천당문에 요리사로 초대받았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지, 그는 함지박 만하게 터진 입을 쉽사리 닫지 못했다.
“축하하네.”
“하하하, 감사합니다요.”
노점상 주인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그날은 사천당문으로 가서 자네 당과를 먹어야겠구먼.”
마현의 말에 노점상 주인은 질겁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이구, 어르신. 거긴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입니다요. 혹여나 얼씬거리다가는 곤욕을 치루기 십상입니다요.”
“나를 걱정해 주는 겐가?”
마현은 순박한 노점상 주인의 마음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나 역시 초대를 받았으니까.”
마현의 말에 노점상 주인은 눈을 화등잔처럼 떴다가 슬쩍 눈초리를 가늘게 만들었다. 솔직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손님이라 그런 마음을 입 밖으로 내놓지는 않았다.
“못 믿는 겐가?”
마현이 슬쩍 노려보며 묻자 노점상 주인은 급히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요.”
“뭐 그날 보면 알겠지.”
“하하하, 맞습니다요.”
그렇게 웃던 노점상 주인이 자기 머리를 툭 쳤다.
“에고, 이 정신머리 하고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요.”
주인은 머리를 흔들더니 당과가 담긴 쟁반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하나면 됩니까요?”
“그래, 하나 주…….”
“두 개!”
주인이 막 당과를 집어 들려는 찰나 웬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비단 목소리뿐만 아니었다. 마현 옆으로 포동포동한 손 하나가 끼어들어 보란 듯이 두 개의 손가락을 쫘악 벌리고 있었다.
그 손을 본 주인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마현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에는 때국물이 좌르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마현은 그 손의 주인이 거지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현 옆으로 바싹 다가선 이는 거지였다. 마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 거지를 쳐다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거지의 옷차림이었다. 그 거지는 한눈에 보기에도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였다. 하지만 거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현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거지는 새하얀 백발로 보건대 늙은이가 틀림없는데, 피부는 아기처럼 매끈하고 탱탱했다. 더욱이 얼굴이며 손을 보건대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손님?”
그러는 사이 주인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두 개 주게.”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다지 비싼 음식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냥 하나만 사기도 그렇고 해서 적선하는 셈치고 마현은 하나를 더 주문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주인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당과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늙은 거지의 손이 더 빨랐다.
“잘 먹겠네.”
늙은 거지는 마현을 향해 히죽 웃은 후 당과를 입에 물었다.
당과를 들고 걸어가며 먹는 것도 어색해서 마현은 그 거지 옆에서 당과를 한 입 물었다.
달면서도 고소한 맛이 느껴졌다. 당과 자체가 이리 맛있는 건지 아니면 노점상 주인 말대로 특별히 여기가 맛있는 건지, 다시 맛보는 당과의 맛은 참으로 일품이었다.
마현이 다시 당과를 향해 입을 벌리려는데 그 앞에서 초롱초롱한 눈을 애처롭게 깜빡이는 한 쌍의 눈동자가 보였다. 늙은 거지가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 것이다.
슬쩍 눈가를 찌푸리며 그 늙은 거지의 손을 살폈다. 어느새 다 먹어치웠는지 당과를 꽂았던 자그만 꼬챙이만 들려 있을 뿐이었다.
문제는 자신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들고 있는 당과를 쳐다보는 눈빛이었다.
“크흠!”
사람이 무엇을 먹고 있는데 그걸 빤히 쳐다보는 시선은 참으로 불편하다. 그렇기에 마현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몸을 틀었다. 그러자 그 늙은 거지는 뻔뻔스럽게도 마현 앞으로 몸을 옮기며 여전히 당과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하아…….”
‘결국 나와 당과는 인연이 아닌 모양이군.’
피식 웃음을 내뱉은 마현은 자신이 딱 한 입 베어 먹은 당과를 그 늙은 거지에게 내밀었다.
“고맙네. 복 받을 걸세.”
거지는 전광석화(電光石火)보다 더 빠른 손놀림으로 마현의 손에 들린 당과를 빼앗아 들었다.
이번엔 전처럼 당과를 마구 먹는 게 아니라 아주 조금씩 아껴 베어 무는 늙은 거지의 모습에 마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로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늙은 거지 역시 마현 옆으로 따라붙으며 말을 걸었다.
“근데 말이야. 오물오물. 처음 보는 인물인데…….”
그 늙은 거지는 마치 사천의 사람은 모두 안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그냥 유람 나온 서생이오.”
나름 재미있는 인물이었기에 마현은 그의 말에 대답을 해주었다.
“요즘 사천에 오면서 재미난 소식을 들었는데 말이야. 오물오물.”
늙은 거지는 입에 당과를 넣으며 말을 이었다.